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
한나 렌 지음, 이영미 옮김 / 엘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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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 이 매끄러운 세계의 인간은 모두 절대적인 이상향에서 살고 있어요. 고통이나 슬픔을 느껴도 그것들이 없을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고, 실제로도 언제든 그 가능성을 실현시킬 수 있죠. 사랑받지 못하면 사랑ㅂ다는 현실로 가면 됩니다. 영원한 생명을 원하면 그것을 이룬 현실로 옮겨가면 되고요. 그들에게 있어, 하나의 가능성만으로 살아가야 하는 우리는 저차원 생물이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이자 공포의 대상이에요. 무엇보다 이 세계의 적들이에요.

# "그게 같은 사람이라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죠? 아내를 사랑할 수 없게 된 남편은 이미 다른 사람 아닌가요? 만약 인간이라는 존재가, 원래 그렇게 기분을 조금씩 변화시키며 과거의 자기를 잇달아 죽여가고 있는 거라면 어때요?"

# "아마 인간에게는 '나'와 비교해 '너'라는 존재가 훨씬 더 모호한 연속체여도 상관없는 게 아닐까요? (중략) 인격이 어제와 달라졌다 해도, '당신'이 '당신'이라는 사실만으로, 사랑은 계속될 수 있어요. 인간의 마음은 새로운 '나'라는 파도에 연달아 삼켜지는 모래성처럼 약한 것이니까, 절대적인 '나'는 없어요. 그래서 나와 마찬가지로 불연속적인 '당신'과의,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나'라는 것의 환영을 쌓는 것 아닐까요?"

#너는 이 이야기의 결말을 안다.
네가 바로 이 이야기의 결말이니까.

# 다만, 나에게도 어렴풋한 희망 같은 게 있습니다. 어쩌면 내가 죽은 후, 언니가 지금까지처럼 다른 사람을 계속 끌어안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친동생을 죽게 만든 수단으로 세계를 계속 선도해나간다는 가책 때문에 그것이 불가능해지지는 않을까요. 나의 주음이 마치 어떤 주문처럼 언니를 옭아매어 만약 언니가 이제는 그 힘을 쓰지 않고 있다면, 내가 목숨을 던진 보람은 있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그것이 너무 염치없는 이야기라는 것 또한 충분히 알고 있습니다.

# 한나 렌 작품의 등장인물들도 때로는 다른 나, 다른 세계라는 가능성에 안이하게 뛰어들어버릴 것 같으면서도 최종적으로는 지금의 나와 이 세계를 받아들이기로단호하게 결심한다. (중략) 오히려 SF적 상상력이 다른 나, 다른 세계의 가능성에 등장인물들을 직면시키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과 이 세계의 소중함을 자각하고, 그것을 사랑할 수 있는 힘을 얻는 것이다.

❤️ 작가 한나 렌이 데뷔한 지 9년 만에 발표한 첫 SF 소설집. '여섯 편의 단편마다 국경을 뛰어넘고 역사를 비틀며 충분히 멀리 갔다고 놀라워할 때 한 걸음 더 가버리는 과감함이 빛난다'라는 정세랑 작가님의 추천사가 이 책을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구절일 것이다.

<매끄러운 세계와 그 적들>에서는 무한한 평행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드는 것이 가능해져 모두가 꿈꾸던 삶을 산다. 사랑하는 이가 죽어 괴롭다면 그가 죽지 않은 세계로, 사랑받지 못해 괴롭다면 사랑받는 세계로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사람들. 하지만 그런 세계에서 불행한 사고로 '승각 장애'를 입어 돌아갈 수 있는 샛길도, 옆길도 사라져 버린다면? 나는 내가 지금 살고 있는 것이 유일한 세계임을 알면서도 그 차에서 도망치지 않을 수 있을지, 매끄러운 세계를 포기하고 친구의 옆을 지키는 용기 있는 선택을 할 수 있을지 한참을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다.

<미야하에게 건네는 권총>에서는 타인과의 소통 욕구가 식욕만큼 강해지게 만들거나 특정 인간을 영원히 사랑하게 만드는 등의 임플랜트 개념과 극적인 효과를 위해 권총 모양으로 생긴 장치를 사용했다는 설정이 흥미로웠다. 엉켜 버린 주인공들의 관계가 어떻게 끝날지 궁금했는데 '중편 소설이었던 것을 갑자기 서사시 차원의 소설로 바꾸어 준다'는 소설 '동급생'의 결말처럼 마지막 한 문장이 주인공들의 지난날들을 상상하게 만들었다.

<홀리 아이언 메이든>에서는 동물이든, 사람이든 끌어안기만 하면 누구보다 온순하게 만들어 버리는 '개심' 능력을 가진 언니와 그의 동생이 나온다. 일찌감치 능력을 알아본 군의 고위급 간부가 각계각층의 사람들을 데려와 포옹하게 한 뒤 전쟁의 판국이 바뀌고, 나아가 세계 정세까지도 변할 상황에 처한다. 끝에 와서 언니를 저지하고, 본래의 자매 관계로 돌아가고자 희생을 택한 동생이 안쓰럽고 기특하게 느껴졌다. 언니 앞에서 죽은 동생이 죽음의 주모자와 하수인을 찾는 수수께끼라며 보내는 편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싱귤래리티 소비에트>는 개인적으로 가장 SF의 매력이 잘 나타났던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소비에트 연방은 모든 국민의 뇌 절반을 인공지능 '보댜노이'의 연산 자원으로 사용한다. 패전한 미국의 인공지능 '링컨'은 좌절하는 국민들을 사이버 공간으로 이주시켜 자유주의가 승전한 가상 세계 속에서 살게 한다. 두 개의 인공지능이 지배하는 세계 속에서 체스 말로 전락해 버린 인간들, 클론으로 재생산된 레닌 부대는 상상만으로도 끔찍해졌다.

<빛보다 빠르게, 느리게>에서는 수학여행을 떠난 아이들이 탄 신칸센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저속화' 현상이 발생해 기차 칸 안의 시간만 2600만 분의 1 속도로 저하된다.

내용이 어렵다는 평이 있어 걱정했는데, 일본 이름과 지명 때문에 쉽게 읽히지 않았던 <제로 연대의 임계점>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독성이 좋은 편이었다.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할 기발한 설정 외에도 아름다운 묘사와 분위기를 그대로 살린 번역 또한 돋보였다.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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