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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 브라이도티, 포스트 휴먼 ㅣ 컴북스 이론총서
이경란 지음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7년 5월
평점 :
2차세계대전은 유럽 정신의 근본인 인간, 이성에 대한 믿음을 깨뜨렸다. 백인 남성으로 대표되는 표준, 상식, 규칙이 우리에게 가져다 준 것은 폭력과 혐오에 지나지 않았다. 이후 인문학은 우리를 인간 중심적 사유를 벗어나고자 끊임없이 노력해왔다. 로지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은 '인간 이후'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필요한 새 사유를 제공한다. 너무나 확고하게 믿어지던 '나'라는 고정된 주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주체의 자리는 '유목적 주체'가 자리한다. 내가 어디에 배치되는지에 따라 나는 매번 다르게 호명되고, 다른 형태를 갖는다. 이는 몸의 차원에서도, 정체성의 차원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문제다. 브라이도티의 사유는 질 들뢰즈의 탈주체이론(혹은 -되기)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는데, 크게 보면 그 사상의 끝에는 서구 철학의 변종 스피노자가 있다. 일찍이 재현representation과 유비analogy가 아닌 '일자'와 '생성'을 말한 스피노자의 신과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은 양태 사이의 위계를 설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이 있다. 물론 여전히 이성의 힘을 믿는 몇몇 학자들에게 포스트휴먼 논의는 '생기론', 혹은 '반지성주의'라는 비난을 받기도 하지만, 브라이도티의 『포스트휴먼』은 반지성주의가 아니라 이성의 이름으로 집행되는 모든 폭력을 극복하기 위한 윤리적 실험이자 치열한 성찰의 결과물이다. 『포스트휴먼』이 이성의 폐해를 지적하며 벌어지는 몇몇 무차별 폭력과 명백히 거리를 두고자 하는 이유다. 그가 포스트휴먼을 통해 말하고자 하는 것은 비인간 존재, 몸의 부산물(이라고 일컬어지던 것들), 기계 사이를 횡단하며 탈주체성을 확보하고 모두와 함께 공존하는 방법이다.
브라이도티는 현재진행형의 학자다. 오늘날 논의되는 수많은 포스트휴먼 담론의 중심에 그가 있다. 그의 주요 저서 『변신』, 『유목적 주체』, 『포스트휴먼』이 모두 번역되어 있기는 하지만, 이 책은 그 모든 책들의 후발 주자로서 브라이도티의 사상, 나아가 브라이도티와 얽힌 수많은 사유들에 접근할 수 있는 입문서 역할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