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도의 멸종 - 기온이 1도씩 오를 때마다 세상은 어떻게 변할까?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14년 9월
평점 :
절판


녹고 있는 지구를 냉동실로

-마크 라이너스,6도의 멸종, 세종서적, 2008.를 읽고 쓴 서평

 

6개의 열쇠

 

지구온난화’,‘기후변화’,‘지구 평균 기온 상승’,‘탄소 배출’,‘부메랑’,‘후회’. 이 단어들은 환경운동가이자 저널리스트인 마크 라이너스의 책‘6도의 멸종에서 내가 뽑은 키워드 6개이다. 6개의 단어를 보고 난 후에는 이 책의 주제와 전체적인 흐름, 주고자 하는 메시지를 유추해 낼 수 있을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당신 또한 아직 책을 읽지 않았더라도 이 책이 기후변화와 관련된 이야기를 중심으로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인간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을 것이다. 비록 아직 이 책이 널리 알려져서 지구온난화를 막는 데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지는 못했지만, 이런 서평 같은 매체로 책을 소개하는 자리를 통해 널리 알려지고, 더 많이 언급되고, 책의 진가가 보이게 된다면 조금이나마 힘을 보탤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렇게 된다면 이 책이 세상에 나올 수 있게 도운 모든 인물, 그리고 나 또한 정말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우리 지구가 달라졌어요

 

‘6도의 멸종이 내 손에 처음 들어왔을 때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표지에 있는 아이스크림처럼 녹고 있어 당장 냉동실에 집어넣고 싶게 보이는 지구 일러스트였다. 마치 지구가 사라져가는 것 같아 책 제목과 어울리며 책에 대한 흥미와 호기심을 크게 일으켰다. 그렇게 책을 펴기도 전에 지구의 기온 상승으로 지구가 아이스크림 녹아내리듯이 변할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었고 책을 읽으면서 이 일러스트가 계속 생각나기도 했다. 페이지를 한 장 넘기자 책의 목차가 나왔다.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과 그것이 지구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상황 하나하나 소제목을 붙인 것이 보였고 차례 하나마다 작은 제목이 7개 정도 있었다. 자칫 소제목이 너무 많아 책을 읽는 도중에 중간중간 흐름을 끊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책 줄거리를 읽지 않고도 각 차례의 핵심 키워드를 한눈에 볼 수 있어 내용을 유추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머리말에서 이 책이 우리의 삶을 담고 있는 지구의 미래에 대한 긍정적인 메시지보다는 대부분 최악의 상황을 염두 하고 있다는 것, 마지막 문장에서 지옥으로의 여행으로 떠나보자고 한 것이 지구의 평균 기온 상승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본문에서의 흥미진진한 전개를 예고하고 있어 인상 깊었다. 머리말에서 예고한 것처럼 본문의 내용은 과학자들의 연구와 실제 사례를 바탕으로 기후변화로 인한 인류의 어두운 미래를 점쳤다. 책 맨 뒤에 참고한 문헌의 출처가 30페이지가 넘는 것에서 작가가 이 책에 투자한 시간과 노력을 알 수 있었다. 수박 겉핥기식으로 주장만 하는 다른 책들과는 다르게 명확한 수치를 제시하면서도 근거가 확실하고 그만큼 더 자세하고 더 깊게 분석해낸 이 책이 그런 점에서 신뢰가 갔다. 그리고 책 주제의 관련 분야에 관심이 있거나 비문학 서적을 읽기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책이 마음에 쏙 들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소설, 만화와 같은 문학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게는 한 페이지를 넘기는 것이 버겁게 느껴질 수도 있다. 연구 자료가 많이 인용된 만큼 전문적인 과학용어가 머리를 아프게 하고, 지구과학 교과서처럼 읽히고, 이해하는데 어려움을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정확하고 믿을만한 자료는 이 책이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기 편하게 하고 책을 읽을 때 조금만 더 집중한다면 머릿속으로 책의 내용을 그릴 수 있을 만큼 몰입하게 만든다.

이 책을 읽으면서 해수면 상승으로 인한 저지대 섬나라들의 소멸 위기, 그린란드의 빙하가 모두 녹아 멸종위기에 놓인 많은 생물 등 내가 알고 있던 지구온난화로 인한 피해사례뿐만 아니라 말라리아의 번식, 아메리카 대륙의 슈퍼 허리케인 등 지구온난화와 관련 없어 보이는 생각지도 못했던, 세상 곳곳의 멍든 부분을 알 수 있었다. 또한 인간이 무심코 한 행동이 부메랑처럼 큰 피해로 돌아온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사실을 알고 나면 더는 평소처럼 분리수거가 귀찮아 쓰레기를 한군데에 몰아서 버리고, 하루 내내 에어컨을 틀고 뒹굴뒹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지구에는 온난화 안전지대가 없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다. 더 이상의 방관과 무관심은 되돌릴 수 없는 결과를 초래할 것이고, 이 책에서 주장하는 것 같이 한두 사람의 관심이 아닌 모두의 관심만이 가까워진 끔찍한 결말을 다시 쓸 수 있을 것이다. 당장 집에서부터 환경을 생각하고 가정에서의 탄소 배출량을 줄이는 등 절약을 실천하여 모범이 되어야 주변 사람들의 지구환경에 관한 관심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아파트에서 시행하는 쓰레기 분리수거나 환경 캠페인 같은 활동을 통해서 말이다. 그렇게 사람들의 관심이 차곡차곡 모여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을 중심으로 재생 에너지 생산량이 급격하게 늘고 유럽이 대체 에너지를 사용하는 방안으로 변하고 에너지 생산 시스템이 변화하는 등 눈에 띄는 변화가 하나하나 생기기 시작했다. 작가는 책에서 국가들이 화석연료 배출문제를 외면하고 서로 떠넘기고 있는 것을 비판하고 있다. 그리고 화석연료를 바이오, 풍력, 원자력 등으로 대체하고 탄소 배급제를 시행해 탄소 배출량을 줄여 저탄소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는 구체적이고 합리적인 주장을 하고 있다. (탄소 배급제는 적정 탄소 배급량을 지급하여 지구온난화의 주범인 탄소의 소비에 제한을 두는 정책을 말한다) 이 책이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아직 인류가 수천 년을 살아온 삶의 터전인 지구를 포기하기엔 이르다.

 

지구야, 바람 좀 쐴래?

 

‘6도의 멸종에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문장은 이 책을 대중에게 설명하면서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구 기온이 2, 4, 6도씩 올라가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밤과 낮의 기온 차이가 15도씩 나는 것을 생각하면 그 정도의 변화는 대수롭지 않게 여겨질 수 있다. 목요일 기온이 수요일보다 6도 높다는 것은 외투를 집에 두고 나오면 된다는 의미일 뿐이다. 하지만 지구의 평균 기온이 6도 상승한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이야기이다.’이다. 나 또한 지구의 평균 기온이 상승한다는 것에 대해 가볍게 생각한 대부분의 사람들 중 하나였다는 것을 이 문장을 통해 깨달았다. 지구는 우리처럼 옷을 입고 벗거나 열기를 식힐 선풍기가 없다. 더우면 더운대로 고통받는 수 밖에 없다. 그만큼 지구의 평균 기온이 올라가는 것은 우리가 사는 지역 기온이 올라가는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지구에 큰 영향을 미친다. 우리가 느끼기에도 지구의 평균 기온이 올라가는 쪽이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우리가 사는 지역 기온이 올라갈 때는 냉방기를 가동하거나 시원한 음식으로 해결할 수 있다. 하지만 지구의 평균 기온이 올라간다면 이미 한참 늦은 것이다. 인간이 살던 지구가 아닌 인간이 살 수 없는 지구로 변해가는 것을 지켜보기만 해야 한다. 이 문장은 이 책의 주제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뒤집었다. 우리가 체감하는 지구의 변화보다 실제로 변화하는 지구의 모습이 더 앞선다는 생각이 들자, 기후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경계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구가 병들어가는 모습을 미처 보지 못할 것이라는 생각 또한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나 자신을 돌아보았을 때 지구온난화라는 주제에 대해 무감각하고 관심조차 주지 않으며 지구를 병들게 하는 나를 찾을 수 있었다.

책을 읽고 나니 지구온난화를 연구하는 과학자들이 이런 암담한 사실들을 알고 어떤 심정으로 연구했을까 하고 생각해볼 수 있었다. 다음 문장이 과학자들의 심정을 가장 잘 대변한다. ‘아니면 가능한 많은 사람들에게 진실을 알려서 늦기 전에 온실가스 배출량을 줄이는 등의 캠페인을 벌이도록 유도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최악의 시나리오는 피하도록 말이다.’이 문장에서 나는 과학자들이 우리에게 간절하게 지구온난화에 대해 주목하고 더 진지하게 받아들이라고 외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학교에서, 잡지에서, 또는 다른 곳에서 우리는 이 문제를 자주 듣고 있지만, 효과가 미미한 모양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모습을 지켜보는 과학자들의 속은 타들어 가고 있다. 지구온난화를 연구하면서 더 나은 지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과학자들의 마음이 공감되고 책을 읽으면서 더 멋있게 느껴졌다.

 

꿈도 희망도 없는 섬

 

지구촌에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크게 고통받고 있는 이웃들이 많다. 이 책에서도 그러한 사례를 여럿 소개하고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것이 바로 투발루의 사례이다. 오랜 시간 누적되어온 온실가스의 배출로 인해 한때 관광지로도 사랑을 받았던 남태평양에 자리하는 인구가 10000명이 조금 넘는, 9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작은 섬나라인 투발루는 지구에서 가장 먼저, 수십 년 이내로 지도에서 사라지게 된다. 이미 지난 수십 년 동안 지구온난화로 인한 해수면 상승으로 투발루는 섬 2개를 잃었고 나머지 섬들도 비슷한 상황에 놓였다. 지금 당장 온실가스의 배출을 멈추더라도 해수면은 몇 년간 멈추지 않고 계속 상승하여 결국 투발루를 집어삼키게 될 것이다. 국토 최고점의 해발고도가 4m이고 평균적인 해발고도가 3m로 지형이 평평한 투발루는 이미 국토의 상당 부분이 물에 잠긴 상태이다. 사람들이 마시는 지하수에 바닷물이 섞이면서 바닷물의 소금기로 인해 식수가 짠물로 변해버리고 있어 투발루 국민이 마실 물조차 점점 사라져 가고 있다. 이와 같은 상황이 지속 되면서 식물도 자랄 수 없는 땅이 되어가고 있다. 투발루에 비가 올 때마다 사람들은 집안에 차오르는 물을 퍼 나르고, 힘들게 키워온 농작물을 잃고, 코코넛 나무가 뿌리를 드러내고 쓰러져가는 모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 투발루 사람들은 침수를 막기 위해 방조제를 쌓고, 바다의 강한 염분을 견뎌낼 수 있는 맹그로브 나무를 심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큰 허리케인이나 폭풍우가 투발루를 잘못 덮치기라도 한다면 투발루는 역사 속으로 영원히 사라지게 될 것이다. 슬프게도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투발루를 구할 방안은 존재하지 않는다.

지구온난화가 계속되면서 바다가 변했다. 극지방의 빙하가 녹아내려 바다로 흘러 들어가면서 바닷물의 높이가 높아졌다. 1960대 이후 해마다 1.8mm씩 상승하던 해수면이 1990년 들어서 해마다 3.1mm씩 높아지면서 해수면 상승속도가 빨라졌다. 1993년 이후 투발루의 해수면은 9cm 넘게 상승했다. 그렇다면 투발루가 바닷물에 잠기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바로 선진국과 개발도상국들이 산업혁명 이후 배출해오던 이산화탄소로 인한 기후변화이다. 국제에너지기구의 자료에 따르면, 미국은 연간 1인당 이산화탄소 배출량이 19.73t, 호주는 17.53t, 뉴질랜드는 8.04t에 이르렀지만, 투발루의 이산화탄소 배출량은 0.46t에 불과했다. 재해의 원인이 투발루에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투발루는 너무나 큰 고통을 겪는 것이다. 투발루를 바다 밑으로 밀어 넣고 있는 부유한 국가들은 이런 투발루의 상황을 알고 있으면서도 서로 책임을 미루며 외면하고 있다. 투발루는 이웃 국가들에 자국민을 받아줄 것을 호소했지만 뉴질랜드를 제외한 국가들은 모두 거부하였다. 이민을 허락한 뉴질랜드 역시 40세 이하로 영어를 잘하고 뉴질랜드에 직장을 가진 사람만을 20027월부터 몇십 명 받아들인 것이 전부이다. 이렇게 다른 국가로 이민 갈 여건조차 되지 않는 투발루의 사람들은 인류 최초로 기후난민이 될 위기에 처하게 됐다. 몇몇 국가들이 개발과 편리를 위해 사용한 에너지의 대가를 이것과 전혀 관련이 없는 섬나라 사람들이 치르게 된 것이다. 투발루 사람들은 침수를 막기 위해 방조제를 쌓고, 바다의 강한 염분을 견뎌낼 수 있는 맹그로브 나무를 심는 등 노력을 기울이고 있지만 큰 효과를 보지 못하고 있다.

투발루의 사례를 읽고 내가 찾아낸 비슷한 주제의 작품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빙하가 모두 녹아내려 지구의 대부분이 잠기는 영화워터월드이다. ‘워터월드는 기후변화가 발생한 지구의 극단적인 상황을 잘 보여준다. 영화에서의 지구는 온난화로 인해 빙하 전체가 녹아내리고 지구 전체가 물에 잠겨 인류의 문명이 수중에 가라앉게 된다. 수백 년 동안 인간들이 행해오던 자연훼손이 지구를 덥히고 북극의 얼음은 물로 변해 인간의 삶의 터전을 빼앗아간다. 살아남은 몇몇 생존자들은 바다 위를 표류하는 생활을 하게 된다. 인간의 역사를 담은 잔해들 위에 생존자들은 인공섬을 만들고 생존을 위한 경쟁을 하게 된다. 온 세상이 물로 뒤덮인 워터월드에서는 한 줌의 흙, 한 잔의 깨끗한 물이 다른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이들에게는 드라이랜드라는 지구의 마지막 육지를 찾는 것이 최후의 희망이다. 이 영화는 소중한 자원을 낭비하고 소비와 자본주의의 쾌락을 즐기던 인류에게 결국 남는 것은 극단적인 빈곤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우리가 사는 지구가 워터월드 같은 비극적인 상황으로 가지 않게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경고하고 있다. 아마 투발루의 사람들은 이 영화에 더 깊게 공감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것처럼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라 당장 코앞의 생존 문제이기 때문이다. 내가 영화 워터월드를 소개한 이유는 이 영화를 통해 조금이라도 지구온난화의 피해에 대해 더 생각해보고 공감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때문이다. 이 영화와 같은 상황이 우리에게 닥쳐온다면 정말 절망스럽고 공포를 느낄 것이다. 학교, , 도시, 국가가 사라지고 온 주변이 물로 뒤덮인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고 꿈도 희망도 없는 세상을 무슨 재미로 살아갈 수 있을까. 나는 ‘6도의 멸종에서 이렇게 현실처럼 다가오는 투발루의 절규가 가장 인상 깊었고 지구온난화 문제를 마냥 남의 일로 바라볼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지구의 미래를 위해서, 또 미래 지구에서 살게 될 우리의 후손들을 위해서 이 책이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지구의 미래를 바꾸기 위해 행동으로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더는 외면하려고 하지 말자

 

해가 지날수록 항상 이론으로만 접하고 넘기던 지구온난화가 점점 피부로 와닿고 있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나오는 기후변화의 내가 사는 이 땅에서 벌어지는 느낌이다. 매년 내가 사는 이 지역의 평균 온도가 올라가고 있고 올해 여름은 다른 해와 달리 유난히 더 덥고 더 길게 느껴졌다. 그렇게 느낄 만한 것이 이번 해 여름은 해가 떠 있는 시간 내내 30도를 넘어가는 더위를 반복했다. 고등학교에서의 첫 해 학교생활은 물 흐르듯 빠른 속도로 지나갔지만 뜨거운 여름 날씨는 끈적한 내 땀이 흐르듯이 느릿느릿 오랫동안 나를 괴롭혔다. 끝을 모르는 더위가 나를 끈질기게 괴롭히자 나는 두손 두발 다 들고 날씨에 맞추어 내 생활 리듬을 바꿀 수 밖에 없었다. 잠을 잘 때, 내가 아무리 옷을 얇게 입고 창문을 다 활짝 열어놓고 잠을 자려 해도 내 방은 찜질방같이 더웠고 나는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어렸을 때는 선풍기 한 대로도 온 가족이 선선한 바람을 맞으며 만족했지만 요즈음 여름은 에어컨 두 대를 최저기온으로 설정하고 하루 내내 가동해도 땀이 흘러 몸이 끈적할 때도 있다. 더운 날씨를 가장 크게 느낄 때는 친구들과 야외에서 축구를 할 때였다. 30도가 넘는 치명적인 날씨에 한껏 올라온 열정이 타버려 30분이 안 되어 공을 차는 것을 포기하고 그늘로 기어서 들어가고는 했다. 유난히 더운 날에는 펄펄 끓는 날씨를 이겨내지 못하고 심지어는 일사병에 걸려 어지럼증을 호소하고 구토를 하는 친구들도 있었다. 이뿐만이 아니라 내 식생활에서도 더운 날씨에 맞추어 큰 변화가 생겼다. 내가 좋아하는 음식 중 뜨거운 음식인 라면, 국밥 등을 입에 대지 않고 차갑고 얼어있는 음식을 극단적으로 찾게 되었다. 밥을 먹을 때에 항상 차가운 물을 옆에 두고, 하루에 아이스크림을 무려 3개씩 입에 달고 살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배탈이 날 법도 하지만 배탈이 난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내 위도 내 피부가 느낀 것처럼 더위를 느꼈나 보다. 반대로 겨울은 이전보다 더 추워졌다.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던 여름이 어찌어찌 지나가고 아직 살인적인 더위의 충격이 가시기도 전에 그 짧은 시간에 엄청난 가을 추위가 나를 순식간에 찾아왔다. 아직 내 장롱에는 긴 팔 윗도리가 준비되지도 않았는데 가을이 되자마자 날씨가 급격히 추워지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초겨울 맞먹는 추위가 나를 시험했다. 마치 봄과 가을이 원래부터 없었던 것처럼 시간이 지나가고 있었다. 부랴부랴 따뜻한 옷을 서랍에서 꺼내입고 여름과는 반대로 따뜻한 열기를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하지만 여름과 완전히 대비되는 추위를 겪을 때 여름의 지나치게 따뜻한 열기가 절대 그립지는 않았다. 이렇게 기후변화로 인한 극단적인 더위와 추위를 온몸으로 겪고 나니 전보다는 지구온난화라는 주제에 대해 더 민감해지고 더 적극적으로 관련된 활동에 참여하게 되는 변화가 생겼다.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지구의 기후변화에 무감각할 수 있지만, 점차 시간이 지나면서 기후변화를 온몸으로 경험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이고 이 문제는 언젠가는 반드시 지구촌의 최대 이슈로 떠오르게 될 것이다. 어쨌든 내가 느꼈던 지구의 변화는 결코 긍정적이지 않았고, 나와 같거나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들이 지구를 보호하는 것에 앞장서기를 바랄 뿐이다.

 

갈림길 앞에서

 

독서 목록에 나열되어 있던 수백 권의 책 중에서 내가 ‘6도의 멸종을 선택하게 된 이유로는 책의 표지에서 먹음직스럽게 녹아내리고 있는 지구 일러스트나 썩 긍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은 제목보다는 내가 열 몇 개의 과목 중에서 과학을 가장 좋아하고 그중에서도 환경 쪽에 관심을 가지고 관련 도서를 찾아내려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내가 지구과학 분야에 관심이 많고 재미있어하기는 하지만 이 책을 읽는 것은, 절대로 쉽지만은 않았다. 먼저, 이 책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더 과학적, 분석적이고 어려운 설명이 많아서 이해하는 데 다른 책들을 읽었을 때보다 더 오래 걸렸다. 그렇다 보니 중간중간 이해가 잘 안 될 때마다 책을 읽는 속도가 느려질 때도 있었다. 이 책을 끝까지 읽는 것은 큰 도전이었지만 결국 시간을 투자하여 책을 다 읽고 나니 새로운 지식이 머릿속에 쏙쏙 들어온 것 같아 기분이 좋았고 뿌듯하기도 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내가 지금까지 하고 있던 잘못된 행동들을 되돌아보기도 했고 지구온난화 진행을 늦추기 위해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면서 전보다 한층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이 정말 좋은 기회였다. 나는 이 책을 읽은 시간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이 책을 읽는 시간이 단순 독서를 넘어 행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계기가 된다면 더 의미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책‘6도의 멸종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과 같이 지구온난화 문제를 속히 해결하고 지구와 소통하며 살게 될 미래를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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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평전 - 신판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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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도 사람답게 살고 싶다

-조영래전태일 평전, 아름다운 전태일, 2011.을 읽고 쓴 서평

    

 

전태일 평전을 읽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어찌 보면 단순한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호기심은 책을 읽어갈수록 놀람, 경악, 연민, 비통과 같은 혼란스럽고 눈물어린 감정들로 바뀌었으며 결국 마지막에 남게 된 것은 다시금 호기심이었다.

전태일 평전 속에는 가장 세밀하게 묘사된 공간이 있다. 바로 1970년대의 평화시장이다. 하루 14시간의 고된 노동, 무시되는 근로기준법, 그를 통한 인간 소외의 현장은 당시 사회의 폐단 그 자체였다. 전태일은 분신항거를 통해 이러한 노동 세태를 바꾸고자 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40여년이 흘렀다. 세상은 참 많이 변했다. 이제 2018년의 노동자들은 하루 최대 8시간의 근로시간과 7530원의 최저임금을 보장받는다. 그렇다면 2018년의 대한민국은 과연 노동자들이 살기 좋은 세상일까?

나의 호기심은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었다, 전태일 평전에 담긴 이야기는 단순히 과거의 역사일 뿐인가? 지금은 평화시장과 그 속의 여공들’, 그리고전태일은 행복한 노동자가 되었을까? 그리고 그 호기심은 비통함으로 바뀌었다. 2018년의 대한민국에도 전태일은 존재한다.

 

인간을 소외시키는 인간 사회

인간을 물질화 하는 세대”, 전태일이 한 차례 노동 운동을 실현하려다 좌절한 1969년 가을, 그가 잠시 일을 멈추고 쓰기 시작한 일기에서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잃어버린 직장과 와해된 바보회, 노동운동의 정체기를 마주한 그였지만 이러한 상황에서도 그는 일기 쓰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그의 일기는 과연 무엇을 말하고 있을까. 그의 일기는 노동운동을 왜 해야 하는가에 대해 끊임없이 질문하고 그 답을 찾으려 하는 전태일의 고뇌를 담고 있다. 그러나 그는 그 답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는 인간이 인간에 의해 소외받고 보이지 않는 권력이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를 바꾸고자 했다. 그는 강자가 약자를 억누르고 약자의 기본권을 박탈하는 우리 사회를 뒤집으려 했다. 이것이 바로 전태일 사상이었다.

 

몇 년 전부터 유행처럼 번진 흙수저라는 말이 있다. 처음에는 SNS를 통하여 유머처럼 퍼뜨려지기 시작했는데, 갈수록 사람들은 금수저와 흙수저를 새로운 신분제처럼 여기게 되었고 이로 인해 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수저계급론이다. 이에 따라 사회에서, 또 그 축소판인 학교에서는 부모의 사회적 지위와 소득 수준으로 한 사람의 수저를 결정하며, 이에 따라 부와 가난의 대물림이 일어난다. 우리는 모두 이러한 계급사회 속에서 살아 왔으며,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내가 중학생일 때 , 학교 주변에는 세 가지의 주거 형태가 공존했다. 32평 아파트와 15평짜리 주공아파트, 그리고 빌라. 학생들은 평소 행실이 안 좋은 친구를 보며 , 15평 주공아파트 살잖아, 쟤네 아빠 풀빵 장사한대.”라고 서슴없이 말하였고, 어른들 역시 우리에게 길 건너 빌라촌에는 절대 혼자 가지 말라고 아이들에게 당부하곤 했다. 우리 사회는, 또 그 속의 사람들은 가난함을 기준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보이지 않는 벽을 쌓아올린다.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겼다. 수저계급론에 따르면 흙수저는 금수저가 되지 못하는 것일까? 흙수저도 노력하면 금수저가 될 수는 있다. 아니, 될 수도 있었다. 과거에는!

불과 몇 십 년 전만해도 개천에서 용이 나기도했었다. , 과거의 대한민국은 사회적 유동성이 비교적 높은 편에 속했다. 그러나 올해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 대한민국 인구의 빈곤 탈출 비율은 22.6%로 사회적 유동성이 낮은 편이다. 씁쓸하지만 수저로 계급이 세습되는 것이 대한민국의 현실이 되었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빈부격차가 일어나며, 또 어떻게 이러한 사회 경제적 계급이 고착화되고 있는 것일까? 그 이유는 바로 교육이다. 앞서 1970-90년대에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있었던 비결은 바로 일류 대학 진학이었다. 당시에는 학교 수업 충실히 듣고 공부 열심히 하면 대학에 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요즘 대한민국 사회에서의 배움과 교육에는 항상 돈이 따라다닌다. 학원비, 과외비, 대학 등록금, 어학연수비 등 공부를 해서 대학에 가고, 스펙을 쌓아 취업을 하는 데도 부모의 경제적 지원이 필요하다. 계층 이동의 수단이었던 교육마저 빈자와 부자의 출발선이 달라진 것이다. 같은 권리를 가진 동등한 인간들끼리 계급을 나누고 상하관계를 정하여 결국 다른 인간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무리에서 소외시킨다. 이러한 사회를 과연 정당하다고 말할 수 있는가?

전태일 평전의 <1장 어린 시절>을 보면 이러한 사회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전태일과 그 형제들은 수저계급론에 따르면 전형적인 흙수저라고 말할 수 있다. 앞서 1970-90년대에는 사회적 유동성이 높아 교육을 통한 계층 이동이 가능했다고 말한 바 있으나 전태일의 경우 가난함 때문에 교육의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했다. 흙수저 노동자 전태일은 항상 가난했다. 그는 경제적 여유나 힘이 있지도 않았고 배움에 있어서도 부족한 사람이었지만 항상 자신보다 더 힘겨운 사람들을 위해 희생하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주는 사람이었다. 평화시장의 여공들과 재단보조들에게 전태일의 따뜻한 말 한 마디와 관심과 걱정 어린 물음은 삭막한 평화시장을 살아가는 데 큰 위안과 버팀목이 되었다. 누구도 바꾸려고 하지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밑바닥 인생의 삶에 귀 기울인 전태일의 행동은 인간이 소외되고 도태되는 것을 막고자 한 전태일 사상이 반영된 결과물이었다. 우리는 흙수저를 단순 유행어로만 여겼을 뿐, 실제로 그들의 삶에 관심을 가지거나 의문을 느낀 적은 거의 없다. 앞으로 미래 사회를 떠올렸을 때 빈부격차의 심화, 양극화, 계층화와 같은 사회 문제가 두려워지는 것이 아닌 빈부격차 축소, 계층의 자유로운 이동, 그리고 계급 대통합을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우리의 모습이 그려지게 되기를 바란다. 또한 이를 이룩하기 위해서는 당장 우리 사회 속에서 우리의 관심과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생각해보고 그들을 배척하거나 소외시키지 않고 함께 살아가는 삶의 태도를 지녀야 한다. 마치 평화시장의 전태일 같이.

 

바보로 살지 않겠다

전태일이 20세가 된 1968, 그는 근로기준법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는 이제껏 이러한 좋은 규정들이 있는 줄 모르고 노동한 지난날의 본인을 바보라고 칭한다. 또한 그는 법으로 보장되어 있는 근로기준법에 대해 알지 못하고 죽은 듯이 혹사당하고 있는 평화시장 일대의 모든 노동자들도 바보라고 생각하였다. 그리하여 전태일과 평화시장의 재단사들은 그 바보들의 모임인 바보회를 조직하여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도모하기 시작한다.

 

바보회는 하나의 노동조합, 노조이다. 노동자들의 기본 권리인 노동 삼권에서는 단결권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에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활동하는 행위는 법적으로 보장받을 수 있다. 그러나 전태일을 비롯한 평화시장 노동자들은 바보회의 조직에 대해 사업주와 평화시장 내의 권력자들에게서 많은 탄압을 받았다. 그리고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도 노동조합은 기업과 사업주에게 눈엣가시로 여겨지곤 한다. 우리나라 최대 기업인 삼성은 노동조합 자체가 없다. 이는 노동자들의 자유로운 의사가 반영되어 노동자 차원에서 노조 결성에 반대한 것이 아니라 삼성 측에서 사내 직원들에게 통보한 강압적인 방침이라는 점에서 사회적으로 문제화되고 있다. 반면에 노동조합이 활성화되어 그들의 권리와 권익을 정당하게 요구하는 기업도 있다. 바로, 현대중공업이다. 현대중공업 노조는 노사 상생의 모델로 공무원들과 다른 기업체들이 견학할 만큼 한국의 노조문화를 선도하는 대표적인 노동조합이다. 고용주인 현대중공업 역시 노사의 협의와 합의를 통해 불안정한 노사관계를 극복하고 협력적 노사문화를 구축한 기업으로 평가받고 있다.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나는 노조와 노사가 협의와 합의를 이뤄냈다는 사실에 굉장히 놀랐다. 왜냐하면 협의를 통해 노동자의 이야기를 듣는 것은 이전까지의, 또 현재의 많은 기업들이 취하고 있는 노조에 대한 사측의 태도와 매우 대비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노동 삼권에서는 단체교섭권을 법적으로 명시하여 노동자들이 임금 인상과 처우 개선과 같은 노동 환경에 대한 그들의 요구를 회사 측에게 이야기하고 노사 간에 이러한 요구 사항에 대해 논의하며 협의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하지만 이를 지키는 기업은 몇 없다. 기업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이윤 창출과 극대화이기 때문이다. 1960-70년대의 평화시장에서도, 현재 대한민국의 많은 대기업, 중소기업에서도 회사 측의 이윤을 극대화하려는 그들의 목적 하에 그 속의 직원들의 권리와 권익은 무시되었고, 묵인되고 있다. 현대중공업의 노사 협력 사례는 말 그대로 많은 노동자들의 꿈이 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우리나라의 많은 기업들과 사업장은 노동조합에 대해 삼성과 같은 대응 방식을 취하고 있다. 대기업에서는 노동조합에 가입한 사원에게 승진의 불이익을 적용하고, 중소기업에서는 아예 삼성처럼 노조 설립을 금지하는 사업장이 적지 않다. 전태일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바보회를, 또 이후에 삼동회를 조직하였으나 평화시장 내의 사업주들과 관리인들에 의해서 와해되고 감시당했다. 또한 사회적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당시 노동조합에 대한 부정적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노동조합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았고 오히려 노동조합과 그들의 노동운동을 악으로 인식하고 부정하는 태도를 보이곤 했다.

전태일은 말한다, 서로가 서로의 인간적 필요에 봉사하면서 참된 관심과 애정으로 사회구성원이 연대해야 하고, 모든 인간은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를 박탈당해서는 안 되며, 박탈해서도 안 된다고. 우리 사회는, 또 그 속의 나는 아마 지금도 노동자들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그들의 권리를 박탈하고 있을 수도 있다. 노동조합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 그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고자 하는 그들의 아우성이 아닐까? 전태일은 인간이 인간의 인간성을 박탈하는, 고용주가 노동자의 권리를 묵살하는 사회 속에서 묵묵히 살아간 당시의 노동자들에게 그들이 바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제는 더 이상 바보가 아닌 투쟁과 쟁의의 노동자들이다. 그에 반해 나는 우리들이 바보라고 생각한다. 그들의 이야기에 관심 가지지 않고 사회에 무지한 우리들이, 노동자들의 요구를 듣지 않는 기업들이, 그러한 사회가 바로 바보이다. 바보가 되지 않기 위해, 또 바보를 만들지 않기 위해 우리 사회와 그 속의 우리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그들의 권리를 존중하며 보장해야 한다, 반드시.

전태일은 죽지 않았다

전태일은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다. 부가 권력을 만들고 권력이 인간을 지배하고 인간이 인간을 물질화하는 사회를 개혁하고자 했다. 그는 끝없는 고뇌와 투쟁 끝에 결국 19701113,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는 시위에서 온 몸에 불을 붙이고 사람들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그는 그렇게 평생을 노동운동에 몸 바쳐 싸웠고, 마지막까지 근로기준법 준수를 외치며 분신한다. 그리고 그의 죽음은 노동운동의 불씨가 되었다.

 

그의 분신은 현재까지도 우리에게 많은 의미로 다가온다. 이 날 이후 음지의 것으로 치부되던 노동운동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어 세상 밖으로 드러나게 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게 되었으며, 노동자들이 조금씩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로 바뀌어 갔다. 또한 그의 정신이었던 전태일 사상을 뒤이어, 그를 대신하여 노동운동을 지속해 온 사람도 있다. 바로 그의 어머니이자 노동자들의 어머니’, 이소선 씨이다. 그녀는 처음 전태일이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는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들의 투쟁을 만류하기도 하였으나, 전태일의 분신 이후 자신이 못 다한 일을 이루어 달라는 그의 유언을 따라 노동운동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녀는 197011월 전태일의 친구들과 청계 피복노조를 결성하여 농성과 단식 등의 투쟁을 통해 하루 14시간에 이르던 노동자들의 노동시간을 줄이고 일주일에 하루 휴무를 얻어내는 등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노동 조건을 개선해 나갔다. 또한 헌 옷을 팔아서 번 돈으로 군사독재 시절 경찰과 정보기관에 쫓기는 노동운동가들과 수배자들을 숨겨주면서 그녀는노동자의 어머니’, ‘노동운동의 대모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체포나 구금을 당하거나 실형을 선고받는 등의 갖은 고초를 겪기도 하였으나 이소선은 1970년부터 별세한 2011년까지 한 차례도 쉬지 않고 노동운동과 민주화 운동과정에 앞장서 투쟁하고, 청년 노동자들을 위해 헌신하였다. 그녀의 노동운동은 아들인 전태일의 사상을 본받아 약자인 노동자들의 권리 보장에 힘썼다. 전태일의 뜻은 그의 어머니와 그 동료들, 그리고 전태일의 분신 이후 생겨난 많은 노동 단체들과 학생 운동권의 목소리와 행동으로 바뀌어 사회 속에 녹아들어갔다.

이렇게 전태일의 투쟁과 어머니 이소선의 헌신에 영향을 받은 학생 운동권과 노동 단체들은 그 당시에 급속도로 많아지게 되는데, 그 속에는 노동자들의 정치인으로 알려진심상정도 있었다. 심상정은 현재 정의당 소속의 국회의원으로 활동 중인 여성 정치가이다. 그녀는 1980년대 대학 재학 시절부터 현재에 이르러 30여 년 동안 노동자들이 그들의 권리를 보장받을 수 있도록 노동 운동에 앞장서 왔다. 1980년 서울대학교 최초로 총여학생회를 창설하고, 초대 총여학생회장이 된 그녀는 구로공단에 위장취업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노동 운동을 시작하게 된다. 그녀는 위장 취업으로 구로 공단에 취업해 노동조합을 결성했고, 19856, 전두환 군부독재 시절 최초의 정치적 연대파업 투쟁인 구로동맹파업에 나섰다. 1970년대부터 이어져 온 대한민국의 수직적 경제 성장, 그 이면에는 열악한 노동 환경 속에서 장기간 노동과 저임금에 시달리던 노동자의 희생이 있었고, 그녀가 마주한 1980년대 초의 노동 현장에서도 이러한 상황은 여전했다. 그녀와 구로 공단의 노동자들은 노동 현실을 개혁하기 위해 구로동맹파업을 추진하였으나 당시 정부와 경찰은 노동조합 결성과 쟁의를 폭력적이고 강압적으로 탄압하였고, 결국 이는 일주일 만에 마무리되게 된다. 당시 이 파업 이후에 44명의 노동자가 구속되고 1천여 명의 노동자가 해고되었으며 구로동맹파업의 주동자였던 그녀도 이 사건 이후 10년 간 수배되다가 1993년 검거되어 징역 1,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게 된다. 이후 민주노총에 몸담아 지속적으로 노동 운동에 앞장서 오다가 2003, 그녀는 본격적으로 진보정치운동에 가담하기 시작했으며 현재까지도 그녀는 노동자들뿐만 아니라 사회 하층민들을 위한 정치를 구현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이러한 그녀의 노동 인생은 전태일 분신 사건 이후 활기를 띤 대학생들의 노동 운동 중 하나로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녀는 대학 졸업 이후에도 노동운동에 몸담으며 하층민들과 소외계층을 위해 투쟁하고, 세상과 맞섰다.

이렇듯 전태일의 분신 이후에는 노동문제와 노동운동이 단순히 노동자들이 짊어져야 할 삶의 무게로만 여겨지지 않았다. 그의 분신과 전태일 사상에 영향을 받은 그 시대의 지식인들도 지속적으로 노동운동에 참여하며 노동자들의 인권 보장을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결국 전태일의 외침에서 시작한 노동 문제는 전태일의 뜻을 이어 받은 다른 노동자들과 지식인, 그리고 그들이 일군 단체들로 하여금 사회 속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이를 통해 현재 우리 사회 속에서는 노동권과 근로기준법이 보편적으로 준수되고 있다.

 

사람답게 살고 싶다

앞서 말했듯이 2018년의 세상 속에서는 노동자들의 권리와 권익이 눈에 띠게 향상되었고, 근로기준법 또한 노동자들을 든든하게 지켜주는 울타리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이 울타리 안에 과연 모든 노동자들이 속해 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잘 모르겠다.

여성, 청소년, 외국인 노동자, 이 세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바로 이들이 사회적 소수자라는 것이다. 사회적 소수자는 인종, 문화, 종교, 성별 등의 이유로 다수의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적은 사회적 영향력을 가진 사람들을 일컫는 말로, 사회적 소수자에 속한 사람들은 여러 영역의 사회적 활동에 상당한 제약을 받곤 한다. 그 사회적 활동에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바로 노동이다. 그들은 노동활동을 할 때 마땅히 누리고 요구할 수 있는 그들의 권리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고, 또 사업체들은 그들이 약자라는 이유로 그들을 착취하고 그들의 권리를 묵살한다. 이러한 상황은 전태일의 분신 이후 보편화된 노동 인권이 과연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되고 있는 지에 대해 의문을 남긴다.

대표적인 사회적 소수자, 여성의 노동인권에 대해 한 번 알아보자. 18세기 산업혁명 이후 노동이 기계화됨에 따라 여성 임금노동자는 급격하게 증가하게 된다. 초기에는 경공업 공장에 미혼의 청년층 여성들이 고용되었으나, 시대가 변화할수록 기계·화학 공장이나 사무·판매 등 서비스 분야에 기혼의 장년층 여성들이 대거 고용되는 등 여성 노동은 산업화에 따라 변화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현재에 이르러서는 여성들의 지적 수준이 함양되고 그에 따른 여성의 사회적 참여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면서 보다 다양한 산업에 여성들이 투입되고 있다. 그러나 다양한 산업 속에서도 여성 노동자에 대한 인권 문제는 여전히 발생하고 있다. 20181011일 환경노동위원회 국정감사에서도 여성 노동자들의 인권이 쟁점이 되었다. 국내 항공사 승무원과 골프장 캐디의 사연이 국정감사장에서 공개되었는데, 그들은 몸에 딱 달라붙는 유니폼을 입고 근무하며 고객들의 성희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또한 캐디는 자영업자로서 계약을 맺는 특수 고용직으로 분류되는 직업이기 때문에 적극적인 근로 감독이나 노동법의 적용에서 배제되어 그들의 권리를 주장하기에 더욱 불리하다. 이밖에도 서비스직에 종사하는 많은 여성들은 고객으로부터 그들의 노동권을, 또 본질적으로 그들의 인격을 침해당한다. 일부 사람들은 여성 노동자가 판매하는 물건이나 제공하는 서비스를 얻기 위해 그에 따른 대가를 지불하고 나면 그 여성노동자 또한 물건처럼 이용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그들을 조롱하고 비하하며 추행하기도 한다.

이러한 그릇된 소비자 외에도 여성 노동자의 권익을 보장하지 않는 인물들은 바로 기업과 고용주들이다. 그들은 여성 노동자에 대한 소비자의 갑질을 방관하며 여성 노동자들의 노동권을 보장하지 않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요즈음 사회적으로 큰 논란이 되고 있는 유리벽과 유리 천장이 그 사례인데, 유리벽과 유리 천장은 여성이라는 이유로 승진에서 배제되고 더 중요하고 수준 높은 일을 처리하는 데에 기용되지 않는,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정한 기준을 넘어서지 못하게 하는 기업과 고용주들의 태도가 기반이 되어 형성된다. 근로 환경에서의 여성의 권리 침해 문제를 은근슬쩍 감추고 덮으려는 고용주들과 우리 사회의 태도가 여성 노동 인권에 대한 보이지 않는 벽을 쌓고 있다. 앞으로도 여성들의 노동 인권을 묵살하고 그들의 권익을 보장하지 않는다면 이 벽은 점점 더 높아지고 더욱 더 단단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성의 노동 인권에 대해 더욱 큰 관심을 가지어 이 문제를 바라보고, 또 문제를 제기한다면 이 벽은 점점 낮아져서 언젠가는 사라질 수도 있다.

또한 이는 여성에게만 적용되는 문제가 아니라 청소년, 외국인 등의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과 여러 사회 하층민, 소외계층에게도 나타나고 있는 문제이다. 우리 사회에서 이들의 노동을 천시하고 이들의 노동 인권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결국 우리 사회 전체가 침체되고 퇴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소비자의 입장에서도, 고용주의 입장에서도, 또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근로기준법에 따른 노동 인권을 차등 없이 똑같이 보장하는 것이 마땅함을 기억하고 이를 실천에 옮기는 것은 우리 사회를 도태되는 인간 없이 통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원동력이다.

 

 

혼자 하는 장군 없다

17살 고등학생의 시선에서 바라본 전태일 평전 속 이야기는 충격적이고 놀라웠지만, 마냥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1970년이든, 2018년이든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 속에서는 소외계층과 그로 인한 인권 문제가 존재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에 대한 책임을 소외 계층에게만, 또 부당한 대우를 하는 권력자에게만 전가하고 있다. 어떠한 인간적 문제이든 외면하지 않는 것이 인간이 가져야 할 인간적인 과제이다. 우리는 지금 인간적인 도리를 다 하고 있는가? 인간으로서 다른 인간들의 문제에 귀 기울이지 않는 우리들의 모습을 과연 인간이라고 볼 수 있는가?

우리는 인간으로서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 몇 가지를 기억하도록 하자. 우리 사회의 모습과 세상의 뉴스에 호기심을 가지자. 그리고 그 속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관심을 보이고 귀 기울이자.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의외로 간단하지만 그 일을 통해 우리가 이끌어 낼 수 있는 결과는 모든 사람들에게 놀라움으로 다가오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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