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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차와 장미의 나날
모리 마리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홍차와 장미의 나날'은 제목만으로도 왠지 근사하게 느껴진다. 홍차와 장미가 함께 하는 일상을 상상해 보라. 저자는 "좀 곤란한 인생이지만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한다.
진한 오렌지 색깔의 겉표지가 식감을 자극한다. 작가의 말마따나 우리네 삶이 어떻든지 간에 매 끼니를 잘 먹는 것은 중요하다.
"괜찮아, 먹고 싶은 건 매일 있으니까!"라는 말에서 인생을 달관한 듯한 느낌이 드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세상살이에 힘들고 지칠 때 누구도 내 곁에 머물지 않는다 해도 먹고 싶은 것은 내 가까이에 있으니깐 괜찮다라고 위로할 수 있지 않을까?
이쯤에서 작가가 궁금해진다. 표지에 있는 작가의 말만 대하면 그저 먹성 좋아서 몸집이 넉넉한 사람일 거라는 추측이 든다. 작가 모리 마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지 않으면 소설이 안 써진다"라고 말하는 일본 최고의 미식가이자 소설가, 에세이스트이다.
하지만 그의 삶은 순탄하지 않았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면서 유복하게 자랐지만 두 번의 결혼 생활이 실패로 끝난 후 생활비를 벌기 위해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 그가 풀어놓는 음식 이야기 세계로 들어가 볼까?
옮긴이 서문에서 작가 마리 모리의 생애를 엿볼 수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부족함 없이 귀하게 자랐지만, 결국 늙어서 고독사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글을 통해 그의 삶은 매순간 사금처럼 잘게 빛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옮긴이 이지수는 마리라는 특별한 미학자가 구축한 우아하고 행복한 세계를 한껏 즐겨주시길 바란다고 했다.
책은 1.사랑스런 먹보, 2.요리자랑, 3.추억의 맛, 4.일상다반사, 5.홍차와 장미의 나날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마다 삽화로 시작한다. 보기만 해도 따스한 느낌이 전해져 온다. 바닥의 둥근 쟁반에 간식이 놓여 있고, 옆으로 누워서 이불을 덮은 채 책을 읽는 작가의 모습은 그의 엉뚱한 듯하면서 소박한 일상을 진솔하게 보여준다.
그는 "요리 가운데 맛있는 것을 떠올리면 나는 곧바로 유쾌해진다"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듣자마자 그의 감정이 전이되었나? 순간 필자도 맛있는 음식을 떠올리면서 유쾌한 기분에 사로잡힌다. 그의 글이 그렇다. 책을 읽는 내내 그의 글에 담긴 감정이 고스란히 독자들의 내면을 파고 든다.
그의 생애를 따져 보면 유년시절을 제외한 그의 삶은 외롭고 스산하다. 그런데 그는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면서 신세 한탄을 늘어놓지 않는다. 그의 글을 살펴보자.
보통 콜라는 목이 마를 때 벌컥벌컥 마시지만 나는 너무 맛있어서 레몬 서너 방울과 벌꿀 용액 두세 방울을 넣어 아껴 마신다. 그러면 맛이 훨씬 고급스럽고 부드러워진다. 어쨌거나 얼음과 콜라가 다 떨어지면 사막에서 오아시스에 겨우 도착했는데 물 마시기를 금지당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183쪽)
그가 콜라를 마시는 방법이다. 이 글을 읽으면서 필자도 작가처럼 콜라에 레몬즙이나 벌꿀을 넣어서 마셔봐야겠단 생각이 든다. 작가는 왠지 콜라도 보통 사람들과 달리 우아하게 마시는 것 같다.
나의 매일은 괴로움의 연속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아아! 이건 아마 죽을 때까지겠지), 어느 날은 종일 에어컨을 틀고 '자, 오늘부터는 좋아하는 냉기 속에서 상쾌하게 일어서거나 앉거나 하자'고 마음먹는다. 실은 뱀처럼 누워서 뒹구는 시간이 많은데, 정말 뱀은 아니므로 똬리를 틀진 않으나 뒹굴고 있을 때 노크 소리가 들리면 뱀처럼 고개만 쑥 쳐들고는 한다. (190쪽)
방 구석에서 이불 안에 틀어박혀서 머리만 내놓고 있을 작가의 모습이 그림처럼 그려진다. "이불 밖은 위험해"라면서 잠자리에서 일어나기 싫은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다. 글을 쓰는 작가의 입장에선 드러내고 싶지 않은 부분일 텐데 솔직하게 표현하고 있다.
무엇보다 남편이 있는 것도 아니고 부모나 자식이 함께 살고 있는 것도 아니니, 나 혼자만의 방에서 얼마든지 자신을 구석구석 드러내도 불만을 말할 사람은 없으므로 내가 좋아하는 것을 맘껏 늘어놓고 기뻐할 따름이다. 요즘은 '보티첼리의 장미 찻잔'이라 부르는 예쁜 홍차 찻잔이 두 개 있어서 일본의 푸르스름한 차도 그 잔에 담아 마신다. (266쪽)
가족이 없이 혼자 살아가는 작가의 삶이 외로워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혼자이기에 주위 사람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살아갈 수 있다. 오히려 작가는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제약을 즐기고 있다.
엮은이 후기에서 편집자 하야키와 마리는 오랜 세월 모리 마리의 전집이나 단행본에 실리지 않은 원고를 모아서 음식을 주제로 한 첫 번째 작품을 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다음에 그의 두 번째, 세 번째 작품도 나올 수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기대가 된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 마리 모리라는 작가를 알지 못했다. 그는 '설국'을 쓴 가와바타 야스나라에 버금가는 관능미와 섬세함을 갖춘 작가라고 한다. 기회가 닿는다면 그가 쓴 소설을 읽어봐야겠다.
마리 모리, 그의 에세이는 지극히 평범해서 특별할 것도 없는 지루한 일상을 섬세하고 유려하게 묘사하고 있다. 음식과 연관된 그의 글을 읽으면서 필자는 작가의 식탁에 초대받은 손님이 되어서 그의 글을 맛보고 느낄 수 있었다. 누구든 그의 특별한 식탁에 초대받을 수 있다. 단 책을 펼치면 그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