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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보는 황금 가지 ㅣ 까치글방 111
제임스 프레이저 지음, 이경덕 옮김 / 까치 / 2001년 12월
평점 :
품절
프레이저의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를 읽었다. 프레이저는 동서양의 민속에관한 문헌고증을 통해 주술의 원리로써 공감주술을 이끌어 내고있다. 공감주술은 유사성에 의한 유감주술과 연속성에의한 감염주술로 나눌 수 있는데, 이같은 원리는 수사적 원리로서의 은유와 환유에 대응하고 있다. 따라서 문예학에서 신화비평에 근거할때 공감주술은 의미해석에 상당한 기여를 가능하게 한다. 물론 모든 텍스트를 신화비평적인 도식으로 해석해서는 안되겠지만 고전문헌이나 생태시나 낭만주의 풍의 시를 이해하는데는 어느정도의 유용성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림으로 보는 황금가지'는 23권의 '황금가지'를 메리더글라스와 세이빈 멕코맥이가 사진과 그림으 곁들여 정리한 편집본이다. 그래서 원본을 구해보지 못한 나로서는 어느정도의 오류와 곡해가 있는지 알 수 없지만 기본적인 프레이저의 가설과 논리를 이해하는데 별다른 장애는 없다고 해도 좋을것 같다. 그러나 원본의 중요성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는것을 명심해야겠다.
프레이저는 주술에서 종교로 종교에서 다시 과학으로 인류의 사고가 진화했다는 가설을 세우면서 주술적인 것을 미개한 것으로 규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규정이 주술에 대한 비난은 아니다. 그는 근원적 사고로서의 주술에대한 긍정적 기여를 무시하지 않는다. 그러나 주술이 하나의 상징체계로서(밀도없는 허술한 상징도 보이지만) 인류의 정신적 압박을 해방시켜온 연대기에 대해서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있는 듯하다. 주술의 해방적 기능은 종교의 본질적 속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주술이 현세적 압박에대한 현세적 대응이라면 종교는 현세적 압박을 내세적 신비주의(또는 낭만주의)로 대응하려는데서 그 차이를 알 수 있다. 이렇게 볼때 문학 또한 고도의 상징체계로서 우리삶의 강박적 폭압성을 해소하는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좋을것이다.
이탈리아의 네미라는 마을에서 전해지는 디아나 신전의 사제전승의 비밀을 밝히는 과정이 이책의 전반적 구성이다. 사제는 숲의 왕 또는 숲의 정령의 신으로 볼 수 있고, 이런 지위는 풍농과 관계하면서 공동체의 유지에 결정적 영향을 미치게 된다. 따라서 이들은 금기를 지키면서 그들의 힘을 강력히 유지해야하고 힘이 약해져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들은 신격화된 인간으로서 노화와 생명의 유한성이라는 한계를 가진다. 그들의 힘이 약해지면 흉작을 비롯한 공동체의 운명에 불길한 결과가 초래되기 때문에 젊음을 회복할 필요가 있고 그래서 그들은 죽음으로서 약화된 힘을 소멸하고 계승됨으로서 강력한 힘을 재생한다. 이런 죽음과 재생은 봄여름과 가을겨울이라는 자연의 이원적 주기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이런 되풀이되는 죽음은 속죄양으로서 해결되는데, 속죄양은 왕의 장자에서 사형수와같은 사람들로 다시 인형으로 대체되어가면서 그 잔혹성을 감추게 된다. 속죙야에대한 심도 있는 고찰은 르네 지라르에 의해 이루어 졌다. 폭력의 본래적 성격을 구명하고 우리사회의 수많은 폭력의 양태들을 이해하는데, 르네지라르의 '속죄양(어떤이는 희생이라고 번역했다)'은 많은 가르침을 줄것이다.
프레이저는 결론으로 왜 사제를 죽일때 황금가지를 사용해야하는지를 상세히 밝히고 있는데, 황금가지는 참나무 가지이고 이는 발데르 신화를 통해 그의미를 유추하는데, 황금가지는 숲의 왕이 가진 생명력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의 의문에서 시작된 프레이저의 여정은 몇가지의 중요한 가설들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보여 주었다. 우리의 학문도 자료정리의 차원과 함께 이 자료들을 분석해 들어감으로써 우리의 구체적 자료에서 도출된 일반 이론을 정립해 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