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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으로부터,
정세랑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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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에 통계 같은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워낙 특수한 사례들이 많아서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헐거운 관찰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지켜본바 작가들이 이십 년에 한 번씩큰 변곡점을 그리지 않나 생각해왔습니다. 열 살 때 그리기 시작했으면 서른 살에 쉰 살에 일흔 살에, 스무 살에 그리기 시작했으면 마흔 살에 예순 살에 여든 살에••• 네, 여든살입니다. 농담이아니라 여든 살에도 변화는 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매일 그림을그리는 작가들이 있어요. 고된 행운인 셈이죠. 하여튼, 일종의 도약 지점 같은 것일까요? 그런 게 얼추 이십 년마다 찾아오는 걸 봅니다. 중간에 그만둬버린 사람으로서는 신기할 따름입니다. 별다른 노력도 없이 공짜로 그 멋진 변신을 변태를 목격하는 일은 저 - P229

저에게 짜릿한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을 잘 느끼는 사람이어서 지금껏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십 년에 한 번씩 오는 격변은 표현 능력의 도약일 수도 있고,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일 수도 있고, 갑자기 마음을 빼앗는 재료일수도 있고, 그때껏 발견하지 못했던 색일 수도 있고, 참신 끝의 득오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것에 대해서는 서구인들이 아주깜빡 죽습니다만...... (웃음)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의 이십 년을버텨내세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매일 그리되 관절을 아끼세요. 아, 지금 그 말에 웃는사람이 있고 심각해지는 사람이 있군요. 벌써 관절이 시큰거리는사람도 많지요? 관절은 타고나는 부분이 커서 막 써도 평생 쓰는경우가 있고 아껴 써도 남아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닳아 없어지지 마십시오.
이렇게 여러분의 출발을 부족한 제가 축하할 수 있어 기쁩니다만, 이십 년 후 여러분의 혁신적 변화를 제가 보지는 못할 것 같아그것만큼은 아쉽습니다. 이십 년 후에 스스로도 놀랄 다음 단계를맞닥뜨리게 되면 오늘 이날을 떠올려주십시오. 제 어설픈 말들이아니라 지금 여기 함께 있는 동료들을 기억하고 성취를 서로 알아봐주십시오. 불꽃놀이 같은 기쁨을 느끼십시오.
--XX미술학부 졸업 축사 녹화본(1995)에서 - P229

늘 철쭉이 흔하고 시시한 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봄이 와도쪽을 대단히 반기는 이는 없지 않나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산책을나갔다가 송이째 떨어져 있는 흰 철쭉을 보았고, 지나가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 꽃을 비추는 순간 그것이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흰색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빛날 준비가 되어 있어서 거의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흰색요. 그것을 칠십대에야 깨달았으니, 늦어도 엄청 늦은 거지요.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밤 산책에서 또 근사한 것을 발견하면 꼭 전하겠습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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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문학과지성 시인선 532
이영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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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도

흰 뿔을 달고 사람들이 걷는다.

사이렌이 울리는 섬.

나는 순례가 흩어지는 모습을 보고

누구의 울음인지 알 수 없는
양한 마리

공중에 발굽을 내디딘다.

찻잔이 식어간다.
두 손이 꽁꽁 얼고

나는 언젠가부터 울지 않는다.
늘 폭설이 내린다. - P78

우물의 시간

나는 잡고 있던 너의 손을 버리고 문밖으로 나왔지. 홀로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나뿐이었는데 함께 있을 때 나를 버릴 수 있는 사람은 둘이 된다.

신발을 벗고 우물을 들여다본다. 물속 깊은 그림자 속에 빠져들어 있으면 바닥이 되고 싶다. 불행은 물속으로녹아드니까. 자신의 그림자를 죽은 자 위에 놓아두면 안된다는 옛말은 보다 아름다운 세계를 감추려는 것일지도몰라. 우리는 잠에서 흘러나와 잠으로 가는 것이니까.

너는 천천히 다가와 벽돌을 쌓는다. 추위에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담고 벽은 금이 가겠지. 옛집에는 스스로 울수 있는 흙이 숨겨져 있다고 너는 병든 내게 말했다. 진흙을 개어 우물터를 쌓던 밤이 있었다. 부드러운 한밤 깊은 곳으로 우리는 갔다. 너는 나의 손을 잡고 함께 버려지고 있었다. - P79

열대야

한 바퀴 동네를 돌고 오면 가족은 줄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한다. 여름에는 우는 법을 잊은 고양이가 돌아오고나는 꿈결인 듯 마당에 주저앉아 만져지지 않는 발을 만져보았다. 어느 순간부터 새로운 가족이 생겼는데, 너무잘 아는 얼굴, 어린 외삼촌이 나무에 걸터앉아 무서워서울고 있다. 내려가고 싶은데 나무는 조금씩 꿈 밖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집이란 이곳에존재하지 않을지도 몰라, 병원 침대에서 외삼촌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나는 한여름 밤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가족이었던 누군가가 폐허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고 있다. 오래된 집은 파손되고 부서져 있다. 부서진 틈에 대고깊은 한숨을 몰아쉬며 죽은 고양이가 말했다. 얼마나 다행이니. 누구나 자라면 우는 법을 잊는대. 나는 잡히지 않는 백발이 마당에 흩어지는 것을 보았다. 꿈 밖에서는 아무도 이곳으로 돌아오고 싶어 하지 않는다. 나는 운동화를 신고 무너진 담장을 뛰어넘었다. 여름 바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먼저 죽은 삼촌은 나무에서 계속 자랐다. 우는 나무가 현실로 걸어 나갔다. - P85

폭염

수염이 없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옛이야기를 노인이 되어서야 들었습니다. 아침마다 떨리는 손으로 수염을 깎으면서, 그는 새로운 꿈을 꾸게 되었어요. 다시 태어난다면, 첫번째로 기도를 하겠습니다. 다시 태어나지 않게 해주십시오. 스스로 울 수 있는 순간부터 그는길에서 울고 있습니다. 우리는 울면서 태어나는데, 두번째 기도를 하려고 합니다. 다시는 울지 않게 해주십시오.
그는 수염을 깎고 인공눈물을 넣고 두 손을 모아 흐릿한시야를 가늠해봅니다. 어지러운 햇빛이 쏟아지네요. 비밀이 있다면, 세번째 기도를 할 수 있을까요. 매일매일 골목길의 잎들을 쓸어내고 건물의 유리창을 닦으면서 바깥으로 던져진 시간을 확인합니다. 인간이 서서 걷기 시작하면서 손이 자유로워졌다고 합니다. 왜 이곳의 꽃은 항상 쓰레기 더미 위에서 피어날까요. 목련 나무 아래 놓인쓰레기를 버리며 생각합니다. 슬픈 기도가 두 손에서 흘러나오는 이 한낮은 너무 뜨겁다고.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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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컬 나이트
조예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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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억울함이 밀려들었다. 삶을 계산할 수는 없겠지만, 이 정도로 손해 보는 장사를 할 줄은 몰랐다. 이 나이를먹도록 아직까지 이런 격정의 감정이 남아 있다는 데에 또놀랐다. 이건 단순한 외로움하고는 다른 문제였다. 아니, 외로움이긴 하지만 좀 더, 좀 더 뭐랄까………… 결말에 관한 문제였다. 아무도 자신과 같은 결말을 원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 누군가가 상상하는 최악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열심히살았는데 어째서? 끝까지 보살핌을 받고 떠난 남편보다 못할 게 뭔가. 결국운이다. 운은 사람을 가리지 않아. 세상은불공평하지. 하지만 어차피 멋대로 돌아가는 게 세상의 이치고 운이라면, 나에게만 이렇게 가혹할 이유도 없는 것 아닌가. - P35

그 방은 나에게 거대한 미련 덩어리처럼 보였다. 미련이라는 감정이 기이한 형태의 중력으로 작용하는 공간. 나는 은성이 정이 많은 성격일 거라고 추측했다. 정이 너무 많아서 넘쳐흐를 지경이라 버려야 할 물건따위에도 정을 붙여버리는 것이다. 정이 많다는 건 오랜 시간 쌓아온 나의 데이터를 보았을 때, 멍청하다는 뜻과 동일했다. -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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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모든 날들을 사진처럼 다 떠올리는 거지?
어떤 왜곡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네. 그건 정말 부러워."
"인간은 어떤 식으로 떠올리지?"
"슬픈 거부터."
한 글자씩 혀로 뭉개는 듯한 느린 말투.
"내가 잘못했던 것들을 내 마음을 아프게 하는 상대방의 모습을." - P29

"나를 위험한 존재라 생각한다면 왜 동행을 제안하지?"
"내가 가려는 곳은 고작 바다니까."
하지만 ‘고작‘이라는 단어를 붙이기에 바다는사막만큼이나 무자비하고 사납다. 사막과 바다는어떤 것도 토해내지 않고 끊임없이 집어삼킨다는점에서 닮았고, 한쪽은 고요하지만 한쪽은 거칠다는 점에서 다르다. 바다를 이길 수 있는 건 사막뿐 - P33

"삶의 목적을 위해 인간들이 만들어낸 낭설럼 들린다."
"그럴지도 모르지."
내 말이 비아냥거림처럼 느껴졌을 텐데 지카가 순순히 인정한다.
"목격자의 진술이 없다는 말은 반대로 해석하면 확실하게 없다고 할 수도 없는 거잖아?"
"인간은 헛된 희망을 품는군."
"완벽한 희망을 품어야 하나?"
"그게 말이 되는 문장이기는 하고?" - P38

"인간이 왜 사막을 무서워하는 줄 아나?"
버진이 내 말과 전혀 상관없는 말을 꺼낸다. 하지만 회피처럼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내가 알고 있는 적당한 지식을 이야기한다.
"생명 유지에 사막은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기때문이지. 물도, 먹이도 없으니까."
"조용해서야."
말을 마친 버진이 옅은 웃음을 머금으며 입을다문다. 주변이 한순간에 적막해진다. 하지만 이곳이 조용하다고 느끼는 건 인간 감각의 한계일뿐, 실제로는 아닐 터였다. 인간의 청각기관이 감지할 수 없는 소리가 사방에서 쉬지 않고 불어닥치고 있으리라.  - P59

그러다 어느 날은 울었고, 어느 날은 잃어버린 서로를 찾는 연습을 했으며 어느 날은 이별을 담담히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랑은 그 행위를 납득하지 못하는 나를 구태여 설득하진 않았다. 그렇지만 랑은 나를 설득했어야했다. 자꾸 생각하면 강해진다던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그 방법을 알려줬어야 했다. 그렇게 랑은, 자신이 죽은 후에 내가 무얼 해야 하는지 알려줬어야 했다. - P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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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황모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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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아무것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아빠처럼 말한다.
선호가 생기면 애정이 생기고 애정이 생기면 고집스러워진다. 고집을 부리면 타협할 수 없는 일이 늘어난다. 그러니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린다는 건 그 자체로 까다로워지는 일이다. 아빠를 보며 고집 없는 포용력은 무관심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 P11

훈우가 무서운 나무늘보인 이유도 알게 됐다.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그 애의 곧은 등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사람 사이의 간격이란 참 오묘했다. 약간거리를 좁혔을 뿐인데 보이는 게 확 달라졌다. 평소라면 대충 얼버무리던 속내를 어떻게든 표현해보려 시도하자 모호하게 느끼던 거리감까지 오밀조밀 좁혀졌다. 어제까지 알던사람이 또 한 번 달라 보였다. 인간은 도대체 몇 개의 층위를품고 사는 걸까.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통해 인생을한 겹 더 덧입는 기분이 들었다. - P24

"마음 편히 가져. 요즘엔 큰 수술도 아니라잖아. 세상 진짜좋아졌다니까."
세상이 나아졌다는 말은 왜 내겐 공허하게만 들릴까. 전보단 나아졌다는 말을 들을 때면 최선책이 영원히 유보된 곳에방치된 기분이었다. 세상은 아이들이 사라지기 전부터 기묘한 모순투성이였다. 출제자의 기분에 따라답안이 바뀌는 문제 같았다. 어떤 분야의 기술이 좋아진대도 어떤 일들은 계속 과거 속에 내던져졌다.
희뿌연 밤이었다. 끝없이 탁해 보이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구름 너머에는 별빛이 빛나고 있겠지. 지금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고 부정할 순 없겠지. 오늘은 도저히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할 별빛 아래에서 나는 세상이 좋아진다는 게 뭘까 생각했다. 변한 세상은 끔찍했다. 마음 편히머물 내 세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 P109

"이제 어떻게 하지?"
"그 사람들은 얼마든지 여길 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린 달라. 이곳은 우리가 다시 만난 세계야. 이제 이곳을 우리세계로 만들자."
나는 은별이를 바라봤다.
"끔찍한 일들을 완전히 과거로 만들자. 여기가 우리의 원래 세계가 될 거야."
은별이가 웃으며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다 불러 모아 복수하자."
은별이 말이 마치 웹툰 주인공 대사 같았다. 조금은 약하고 소심해 어딘가 허술해 보이지만 지구를 구하는 주인공.
우리는 각자 조사해온 명단을 펼쳤다. - P209

은별이처럼 끔찍한 미래를 과거에 알린 사람이 있었고, 은별이 엄마나 우리 부모님처럼 미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믿었고 앞으로도믿을 거였다. 엄마처럼 먼저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물려받았다. ‘우리‘는 이토록 간절하게 다 같이 살고 있다.
여성의 몸을 두고 일어나는 일에 아무도 관심 없다는 건거짓말이었다. 내 몸을 두고 세계는 줄곧 투쟁 중이었다.
우리가 지워진 이 나라에서이제는 아무도 잊히지 말자.
우리가 끝낼 때까지.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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