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에 통계 같은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워낙 특수한 사례들이 많아서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부분은 헐거운 관찰에서 비롯된 것에 불과할 테지만, 지켜본바 작가들이 이십 년에 한 번씩큰 변곡점을 그리지 않나 생각해왔습니다. 열 살 때 그리기 시작했으면 서른 살에 쉰 살에 일흔 살에, 스무 살에 그리기 시작했으면 마흔 살에 예순 살에 여든 살에••• 네, 여든살입니다. 농담이아니라 여든 살에도 변화는 옵니다. 나이와 상관없이 매일 그림을그리는 작가들이 있어요. 고된 행운인 셈이죠. 하여튼, 일종의 도약 지점 같은 것일까요? 그런 게 얼추 이십 년마다 찾아오는 걸 봅니다. 중간에 그만둬버린 사람으로서는 신기할 따름입니다. 별다른 노력도 없이 공짜로 그 멋진 변신을 변태를 목격하는 일은 저 - P229
저에게 짜릿한 기쁨이었습니다. 기쁨을 잘 느끼는 사람이어서 지금껏 살아남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이십 년에 한 번씩 오는 격변은 표현 능력의 도약일 수도 있고,새로운 주제로의 전환일 수도 있고, 갑자기 마음을 빼앗는 재료일수도 있고, 그때껏 발견하지 못했던 색일 수도 있고, 참신 끝의 득오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마지막 것에 대해서는 서구인들이 아주깜빡 죽습니다만...... (웃음) 그러니 여러분, 앞으로의 이십 년을버텨내세요. 쉬운 일은 아닐 테지만 모퉁이가 찾아오면 과감히 회전하세요. 매일 그리되 관절을 아끼세요. 아, 지금 그 말에 웃는사람이 있고 심각해지는 사람이 있군요. 벌써 관절이 시큰거리는사람도 많지요? 관절은 타고나는 부분이 커서 막 써도 평생 쓰는경우가 있고 아껴 써도 남아나지 않는 경우가 있어 불공평합니다. 하지만 어쩌겠습니까? 모든 면에서 닳아 없어지지 마십시오. 이렇게 여러분의 출발을 부족한 제가 축하할 수 있어 기쁩니다만, 이십 년 후 여러분의 혁신적 변화를 제가 보지는 못할 것 같아그것만큼은 아쉽습니다. 이십 년 후에 스스로도 놀랄 다음 단계를맞닥뜨리게 되면 오늘 이날을 떠올려주십시오. 제 어설픈 말들이아니라 지금 여기 함께 있는 동료들을 기억하고 성취를 서로 알아봐주십시오. 불꽃놀이 같은 기쁨을 느끼십시오. --XX미술학부 졸업 축사 녹화본(1995)에서 - P229
늘 철쭉이 흔하고 시시한 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봄이 와도쪽을 대단히 반기는 이는 없지 않나요? 그런데 어느 날 밤 산책을나갔다가 송이째 떨어져 있는 흰 철쭉을 보았고, 지나가던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그 꽃을 비추는 순간 그것이 살면서 본 가장 아름다운 흰색이란 걸 깨달았습니다. 빛날 준비가 되어 있어서 거의스스로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그런 흰색요. 그것을 칠십대에야 깨달았으니, 늦어도 엄청 늦은 거지요. 여전히 깨닫지 못한 게 너무 많다는 생각이 듭니다. 어떤 날은바람 한 줄기만 불어도 태어나길 잘했다 싶고, 어떤 날은 묵은 괴로움 때문에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싶습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그런 고민을 하겠지요. 철쭉은 그런 것 따위 아랑곳하지 않을 겁니다. 오로지 빛에만 집중하는 상태에 있지 않을까. 도무지 짐작할 수 없는 철쭉의 마음을 짐작해봅니다. 바깥의 빛이 있고 안의 빛이 있을 터입니다. 밤 산책에서 또 근사한 것을 발견하면 꼭 전하겠습니다. - P2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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