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다시 만날 세계
황모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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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아무것도 안 좋아하는 사람이 아빠처럼 말한다.
선호가 생기면 애정이 생기고 애정이 생기면 고집스러워진다. 고집을 부리면 타협할 수 없는 일이 늘어난다. 그러니 어떤 것에 마음이 끌린다는 건 그 자체로 까다로워지는 일이다. 아빠를 보며 고집 없는 포용력은 무관심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 P11

훈우가 무서운 나무늘보인 이유도 알게 됐다. 한 치도 움직이지 않는 그 애의 곧은 등에 미래에 대한 불안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사람 사이의 간격이란 참 오묘했다. 약간거리를 좁혔을 뿐인데 보이는 게 확 달라졌다. 평소라면 대충 얼버무리던 속내를 어떻게든 표현해보려 시도하자 모호하게 느끼던 거리감까지 오밀조밀 좁혀졌다. 어제까지 알던사람이 또 한 번 달라 보였다. 인간은 도대체 몇 개의 층위를품고 사는 걸까. 가까이에서 지켜보는 타인을 통해 인생을한 겹 더 덧입는 기분이 들었다. - P24

"마음 편히 가져. 요즘엔 큰 수술도 아니라잖아. 세상 진짜좋아졌다니까."
세상이 나아졌다는 말은 왜 내겐 공허하게만 들릴까. 전보단 나아졌다는 말을 들을 때면 최선책이 영원히 유보된 곳에방치된 기분이었다. 세상은 아이들이 사라지기 전부터 기묘한 모순투성이였다. 출제자의 기분에 따라답안이 바뀌는 문제 같았다. 어떤 분야의 기술이 좋아진대도 어떤 일들은 계속 과거 속에 내던져졌다.
희뿌연 밤이었다. 끝없이 탁해 보이는 구름을 올려다보았다. 그래도 구름 너머에는 별빛이 빛나고 있겠지. 지금 여기서 보이지 않는다고 부정할 순 없겠지. 오늘은 도저히 느껴지지 않지만 분명히 존재할 별빛 아래에서 나는 세상이 좋아진다는 게 뭘까 생각했다. 변한 세상은 끔찍했다. 마음 편히머물 내 세계는 어디에도 없었다. - P109

"이제 어떻게 하지?"
"그 사람들은 얼마든지 여길 버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린 달라. 이곳은 우리가 다시 만난 세계야. 이제 이곳을 우리세계로 만들자."
나는 은별이를 바라봤다.
"끔찍한 일들을 완전히 과거로 만들자. 여기가 우리의 원래 세계가 될 거야."
은별이가 웃으며 가볍게 주먹을 쥐어 보였다.
"다 불러 모아 복수하자."
은별이 말이 마치 웹툰 주인공 대사 같았다. 조금은 약하고 소심해 어딘가 허술해 보이지만 지구를 구하는 주인공.
우리는 각자 조사해온 명단을 펼쳤다. - P209

은별이처럼 끔찍한 미래를 과거에 알린 사람이 있었고, 은별이 엄마나 우리 부모님처럼 미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사람들이 있었다. 모두 이어져 있었다. 그렇게 믿었고 앞으로도믿을 거였다. 엄마처럼 먼저 떠난 사람들의 이야기까지 물려받았다. ‘우리‘는 이토록 간절하게 다 같이 살고 있다.
여성의 몸을 두고 일어나는 일에 아무도 관심 없다는 건거짓말이었다. 내 몸을 두고 세계는 줄곧 투쟁 중이었다.
우리가 지워진 이 나라에서이제는 아무도 잊히지 말자.
우리가 끝낼 때까지. - P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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