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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ㅣ 색채 3부작
막상스 페르민 지음, 임선기 옮김 / 난다 / 2019년 1월
평점 :
<눈>은 프랑스 작가 막상스 페르민의 소설이다. 이 소설은 막상스 페르민이 내놓은 색채 3부작 중 첫 번째 이야기이다. 분명 소설인데 등장인물도 많지 않고 스토리도 단순하다. 책은 120여 페이지로 누구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세 읽을 수 있을 분량이다. <눈>은 소설이지만 문장이 간결하고 시적이다. 그래서 몽환적이면서도 투명한 색채의 이미지로 형상화된다. 그런데 이 책은 정말 이상하리만치 책장을 덮고 나서도 꽤 오랫동안 긴 여운을 남긴다.
작가는 진정한 시인이야말로 줄타기 곡예사의 예술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곡예사에게 있어 균형을 잡는 일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곡예사의 삶과 생명이 공중에 떠 있는 한 가닥의 줄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시를 쓰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작가는 시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이야말로 글이라는 팽팽한 줄 위에 한없이 머무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책을 읽으면서 소설 속 등장인물인 유코, 네에주, 소세키의 삶을 관통하는 중요한 삶의 가치는 과연 무엇이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본다. 그리고 그들이 그토록 원했던 삶의 가치들과 맞닿아 있는 예술의 의미에 대해서도. 그토록 눈(雪)과 하이쿠에 열정적이었던 유코, 곡예와 자신의 삶을 바꾸었던 네에주, 사랑의 아픔을 영원한 사랑으로 승화한 소세키. 그들은 빛의 부재를 통해 더욱 더 선명하게 드러나는 색채의 의미를 비로소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세상의 빛을 향해 자신의 몸을 기꺼이 내던진다.
눈은 한 편의 시다. 구름에서 떨어져내리는 가벼운 백색 송이들로 이루어진 시.
하늘의 입에서, 하느님의 손에서 오는 시이다.
그 시는 이름이 있다. 눈부신 흰빛의 이름.
눈. (8~9쪽)
처음 <눈>이라고 하는 소설을 만났을 때 받았던 첫 인상, 이 소설 속에서 눈(雪)이 가지는 속성과 이미지. 그것들과 하나로 맞닿아 있는 글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은 책장을 넘기면서 만나게 되는 감동적인 글귀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소설인 듯 시(詩)인 듯 모호하게 경계를 넘나드는 듯한 간결한 문장,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드는 행간의 여백, 그리고 투명해서 오히려 더 강렬하게 각인되는 색채의 이미지 또한 인상적이다. 거기에 눈으로 만들어진 줄 위에서 균형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이 더해져 비로소 소설은 완성된다. 이것이 바로 이 소설을 특별하게 만든다.
하얗게 내리는 눈을 또 보게 된다면 나는 아마도 이 소설을 떠올리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고 소설 속에서 소세키 선생이 했던 말을 한 동안 되뇌이게 될 지도 모르겠다.
- 흰빛은 색이 아니지. 그것은 색의 부재이지. 그리고 눈은 한 편의 시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