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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슬람 정육점 문지 푸른 문학
손홍규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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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슬람 정육점. 서평을 시작하기 전에 맨 처음 이 책을 집어 들었을 때를 떠올렸다. ‘어라?’하는 얼럴한 느낌을 줄만큼 이질적인 두 단어가 한 데 모여 시선을 끌었다. 표지부터 시작해 책날개와 매 페이지에 있는 글자들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읽어 내리는 버릇 탓에 본 소설을 읽기 전에도 이미 이 책이 성장 소설이라는 것을, 어떤 내용이 전개될지를 파악하고 있었지만 내게는 오히려 더 큰 기대감만을 안겨주었다. 
  

 이슬람교도 터키인인 하산 아저씨는 한국 산동네에서 정육점을 운영하고 있다. 가무잡잡한 피부에 부리부리한 눈, 항상 인상을 쓰는 듯, 어딘가 한 곳을 쏘아보는 듯 한 인상으로 한국에선 사람들이 움찔거리며 피하게 되는 그가 한 아이를 입양해 온다. 상처 많은 아이가 살게 된 산동네엔 안나 아주머니를 비롯해, 허름한 골목길 구석구석 여러 인생이 있다. 그 속에서 부대끼며 생활하는 사이, 아이는 상처를 치유 받게 된다. 이렇게 몇 문장으로 그 내용을 추려볼 수는 있지만 이 몇 개의 문장이 출판사에서 추려놓은 몇 마디의 문장과 다를 게 무엇이고, 무엇을 얼마나 담을 수 있을까. 아이의 상처를 어느 정도로 이해하면 좋을지, 어떻게 표현해 내었는지, 입양 후 아이의 성장을 어떤 서술로 보여주는지... 내내 품고 있던 물음에 답을 찾아가며 문장하나 하나를 꼭꼭 씹어 삼키듯이 책을 읽어보았다. 
 

 ‘내 몸에는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 말문을 열기 시작한 책의 첫마디였다. 강렬한 인상이었지만 책을 막 펼친 그때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정확히 말해 아이가 이 문장을 가슴에 새기게 되기까지 내면의 변화를 무엇 하나 알지 못했기에 섯불리 이해할 수 없었다.
 초반 부에 아이는 자신의 고아원 시절을 이야기 한다. 사람이 사람을 배우는 것은 타인을 통해서가 아닌 자신을 통해서라고 생각하며 들여다보는 스스로의 내면에서 아이는 고통밖에 배울 수가 없었다. 그럴수록 배고픔과 잠을 참는 것으로 제 몸에 고통을 주고, 내면의 고통에 비하면 몸의 고통 따윈 고통의 수단에 그치는 것이란 생각으로 그것들을 고통의 목록에서 추방시켰다는 식의 자해적인 의식으로 상처를 더욱 깊이 파고들기만 했다. 그런 아이를, 아무도 입양하려들지 않는 아이를 하산 아저씨가 입양해 온다. 아이가 살게 된 산동네에는 따뜻한 마음씨의 안나 아주머니의, 하산 아저씨의 품이 있고, 유정이, 야모스 아저씨, 맹랑한 녀석, 신부님... 아이가 마주하게 되는 여러 인생이 뒤섞여 있다. 어느 누구의 인생이 평범할 수 있겠냐 만은 그 곳 산동네 판자 지붕 집 골목들 사이에서 마주하는 인생들엔 깊은 상처하나 없는 인생이 없고, 터키인에 이슬람교도이면서 한국 땅에 정육점을 꾸리고 있는 하산아저씨의 그 인생처럼 정형화된 눈으론 절대 볼 수 없는 인생들뿐이다. 아이의 내면의 상처를 눈으로 볼 수 없듯이 그 상처에 새살이 차오르는 과정도 눈으로 좇을 수 없지만 아이가 부딪히고 마주하는 일상 이야기는 봄날의 햇살을 관조하는 기분을 갖게 했다. 결국 타인(하산 아저씨)을 향해 ‘제 말 들으셨어요? 사랑해요... 사랑한다구요.’ 라는 말을 건넬 수 있게 될 때까지. 하산 아저씨와 영원이 될 이별을 하고서도 하산 아저씨가 자신을 입양 했듯이 자신은 세계를 입양 할 것이라고 다짐하게 되기까지. 이 책의 맨 마지막 문장으로 다시 한 번 ‘내 몸에는 의붓아버지의 피가 흐른다.’ 라는 문장을 이 때에서야 이해한다고 조심스레 말해볼 수 있었다. 
 

 이 책에는 흉터에 대한 이야기가 자주 나온다. 아이는 제 몸에 난 무수한 상처가 타인에 의한 것인지, 부모에 의한 것인지, 스스로의 탓인지 모르지만 제 탓으로 돌리며 끌어안았었다. 누구에게 이해를 시키려고도 받으려고도 하지 않는 모습이 안쓰러울 정도로. 처음 산동네로 오던 날 안나 아주머니의 손길에 흉터 가득한 몸이 씻겨 지던 것이 시작이었다고 생각한다. 눈에 보이는 흉터 너머의 상처가 더 깊게 패여 나가길 멈추고 아물기 시작한 것은. 산동네에서 아이는 다른 이의 흉터를 보고, 그 너머의 상처를 보고 점차 생각한다. 타인과 진정으로 교감하게 되는 것은 상처와 상처를 통해서라고. 저마다의 가장 깊은 고통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이를 통해 배우는 것을 이제 이해하기 시작한 것일까? 싶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성장소설로 상처 많은 아이의 시선을 통해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시점에서 볼 때, 상처 가득한 아이의 시선과 몇 십 년 뒤의 어른이 된 아이가 이야기 하는 듯 한 날카로운 표현력이 한 데 만난 느낌이 인상 깊었단 것이다. 중학생 또래의 화자는 물론 제 안에 아직 치유중인 상처 때문에라도 그런 날카로운, 특이할 만한 시선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을 표현해 내는 언어는 아직 가지지 못할 것이라고 보는데, 실제 책 속의 언어선택과 서술은 너무나 잘 갈무리된 어른의 회상하는 어조와 같아서 깜짝 놀랐다. 책 내용과는 벗어나지만 비단 이 책의 화자를 제쳐두고도 아이 그리고 청소년의 시각은 때로 어른의 그것과 너무 다르고 경탄할 만한, 특이한 통찰력을 가지기도 하지만 아직 언어로선 능숙히 표현해 내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또, 몇 십 년 후 어른이 된 후에는 능숙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게 되어도 그 시절의 시각은 이미 많은 부분 부옇게 흐릿해져 잡아낼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생각한다. 이런 의미에서 서로의 시각 대에 가장 안타까운 두 사실이 만난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을 좀 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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