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노동자의 모험 -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
배명은 외 지음 / 구픽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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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픽의 여섯 번째 엔솔로지 ‘어느 노동자의 모험’ 구픽서포터즈로 책을 제공받아 읽어보았습니다. 2023년 도서전에서 본 포스터가 강렬해서, 출간을 기다려 왔던 책이기도 합니다. 특히 전작에서도 노동문제를 다루셨던 작가님들의 이름이 보여서 신뢰감이 더 높아졌지요. 물론 구픽 출판사의 엔솔로지 중에 기대감을 만족시키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고요.
<수상한 한의원>의 배명은 작가님 작품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는 박봉에 시달리는 저승의 삼도천 뱃사공 경수가 노동쟁의의 프락치로 몰린 최태수를 삼도천에서 건져 올리면서 일어나는 이야기입니다. 저승에서도 박봉에 시달리는 것도 서러운데, 죽고 나서도 갑질에 폭언을 해대는 망자들을 상대하는 건 보는 것만으로도 묵은 트라우마가 자극되는 기분이 되기도 합니다. 생존을 위해서 타협하기도 하고, 정당하지 않은 요구에 응하기도 하는 경수의 심리가 사실적입니다.
<뿌리 없는 별들>의 은림 작가님 작품 ‘카스테라’는 읽는 내내 SPC를 떠올릴수 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좋아하는 빵을 만들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이루기에도 쉽지 않은 환경에서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다치는 걸 외면할 수 밖에 없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뜻하고 달콤한 빵을 구워내고자 하는 주인공을 응원하고 싶지요. 해피엔딩이어야만 한다고 기도하며 읽게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유미의 연인>, ‘지신사의 훈김’의 이서영 작가님 작품 ‘노조 상근자가 여주 인생 파탄 내는 악녀로 빙의함’은, 사회문제를 끊임없이 작품으로 다뤄오신 작가님의 내공에 감탄하게 되는 이야기였습니다. 이서영 작가님은, 이책의 표지와 제목을 보자마자, 참가 작가진에 대해서 알기 전부터 바로 떠올린 분이었어요. <유미의 연인>에서의 많은 작품이 그렇고, 여러 잡지나 엔솔로지 등에서 계속해서 노동문제를 다루고 계시니까요. 로맨스 판타지에 노조 상근자가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약자인 미성년노동계급소녀에게 빙의된다는 설정부터, 주변의 인물이 변화해 가는 과정까지 모두 현실적이고 생생합니다. 마지막의 작은 반전에 살짝 기분 좋은 뒤통수를 맞기도 했지만, 주인공들이 원작과 다르게 고달프지만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길 바라게 됩니다. 아, 이 이야기는 장편으로 더 보고 싶은 이야기이기도 했어요. 인물들이 정말 매력적입니다. <프록코트의 청년을 조련하는 방법>(웃음) 주인공으로 태어난 클레어는 물론이고 1인칭 서술자인 메리, 대척자인 아이린과 조연들 모두가, 더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을 것 같이 생생하거든요.
<책에서 나오다>에 ‘R.U.R: 혁신적 만능 로봇’를 수록하신 구슬 작가님 작품 ‘슈퍼 로봇 특별 수당’은 <로숨의 유니버셜 로봇>을 다시 쓴 전작에서 다루었던, 청소노동자의 시선에서 작품이 전개됩니다. 누구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취급하는 노령의 청소노동자인 서진이 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딸 율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깨닫는 부분이 가슴이 아픕니다. 책장을 넘기기가 어려웠어요. 한참 먹먹하게 페이지에 멈춰 있었습니다.
<좀비낭군가>에 ‘제발 조금만 천천히’를 수록하신 전효원 작가님 작품 ‘살처분’은 조류독감에 감염된 농장의 살처분을 담당하는 회사와, 기계 오작동으로 인한 사망사건을 풀어가는 경찰의 시점에서 이주노동자 문제 등을 다루는 글입니다. ‘제발 조금만 천천히’에서는 좀비 상황과 이상 종교 문제를 함께 다루었고, 이번 글에서는 혼인 이주 문제와 이주 노동자 문제를 다룹니다. 젊고 예쁘기 때문에 ‘뭐 연애하려고 그런 건 아니’면서도 혼자 있는 상황을 노려 뭔가를 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의 접근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라린, 사고로 죽은 남편과 시동생의 죽음까지도 자신의 탓이라고 공격하는 시모를 모시고 살아가는 혼인이주여성. 자신이 피해자면서도 더 곤란해질 걸 알아서 피해사실조차 말하지 못한 강소장. 등장인물의 서사가 하나하나 현실적입니다.
첫 글인 ‘삼도천 뱃사공 파업 연대기’의 민수는 어머니가 혼인 이주 여성인 한국인이지만 죽어서도 ‘외국인’ 취급을 받고 ‘살처분’의 ‘부 응옥 란’은 혼인 이주 여성으로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에 팔을 걷고 나서는 강한 여성이죠. 엔솔로지의 시작과 마무리에 적절한 배치라고 생각합니다.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이고 작가들의 개성도 강하지만 하나로 묶기에 적절한, 멋진 작품집을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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