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의 내력 호밀밭 소설선 소설의 바다 2
오선영 지음 / 호밀밭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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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주의자는 지독히 현실적인 것 앞에서 회피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사회의 부조리와 불합리를 배척하고 저항하지만, 그 너머 이상 세계에 얼른 도달하고 싶어 적나라한 세상과 마주하는 것을 마냥 불편해 한다. 하지만 지혜로운 이상주의자라면 더 나은 미래를 위해 현재를 붙잡으려 할 것이며, 지금이야말로 과거와 미래를 결정짓는 중요한 순간임을 알 것이다.

<<모두의 내력>>을 읽고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새벽에 눈이 떠져 마지막 여덟 번째 단편 <상자>를 읽고 작가 후기를 읽다가 잠이 들어 버렸다. 꿈 속에서 열아홉 엄마와 갓난 아기는 상자 속에서 웅크리고 있었고 나는 소리쳤다. “아기 아빠가 돌아오지 않을 거란 젊은 엄마의 예감은 틀렸어. 반드시 돌아와야 해. 그나마 그 상자는 엄마의 자궁처럼 아늑하지? 조금만 더 기다려!”

아침에 눈을 떠서 책 첫 장에 여덟 편의 단편 소설 제목을 적어 보았다. 사흘 동안 읽었던 이야기와 제목이 정확하게 기억났다. 이토록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다니 놀라웠다. 각 이야기 사이의 유사점이나 차이점을 찾아보며 잠시 작가 오선영의 눈을 가져 보기로 했다. 여덟 개의 이야기가 각각 다른 시기, 다른 지면에 수록되고 발표되었으나 한 가지 공통점이 보였다. 주인공 모두 하나같이 변두리에서 서성거리는 인물이었다.

벽화 마을에 사는 소녀는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해바라기 벽>에 갇혀 관광객들의 사진기 속 모델 노릇을 해야 한다. 가족과 사랑하는 이들은 저마다 <모두의 내력>을 가지고 있겠지만 대학생은 도저히 그 내력을 알 길이 없다. 구닥다리가 된 종이 <백과사전>은 업그레이드 될 줄 모르는 비정규직 딸과 그 아버지의 구차한 인생과 닮아 있다. 결혼 행진곡에 맞춰 행복이 찾아오면 좋으련만 신혼집을 구하는 것부터 찌질하기 그지없는 그들의 <밤의 행진>은 그렇게 시작된다.

소설 곳곳에 나오는 공간은 내게 익숙한 곳이었다. 부산에 살고 있는 작가는 부산 곳곳을 배경으로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그 마을, 그 다리, 그 산, 그 동은 이름만 들어도 잘 아는 곳이었다. 아, 이래서 이야기가 더 리얼하게 다가왔고 마음이 한없이 불편했구나 싶었다. 처음 만나는 소녀가, 내가 세 번이나 가 보았던 그 마을에서 그런 일을 겪었다고 상상하니 그것은 단지 상상으로 끝나지 않았다. 마치 내 이웃에서 벌어진 일을 목도하고 있는 듯 했다. 그러나 부산을 잘 몰라도 괜찮다. 이 이야기들은 비단 부산 사람들만이 겪는 이야기는 아닐테니 말이다.

“나는 종이 위에 검색된 단어의 뜻을 옮겨 적었다. 그리고는 아버지가 펴 놓은 책장 사이에 끼워 두었다. 백과사전의 쪽수가 한 쪽 더 늘어나는 순간이었다. 아버지의 백과사전은 태블릿 피씨(Tablet PC)의 뜻이 나와 있는, 초록색 커버의 유일한 보존판 백과사전이었다.”(150쪽)
인쇄소에서 찍어낸 이후, 전혀 바뀔 수 없을 거 같던 종이 백과사전도 최신 용어를 담고 업그레이드 되었다. 주변을 서성거리는 주인공들의 이야기가 단지 불편한 이야기로만 끝나지 않아 다행이다. 비록 지금은 보잘 것 없어 보이는 인생일지라도 그들도 언젠가 업그레이드 될 날이 오겠지.

지금도 현실을 살짝 건너뛰고 이상에 닿을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은 크다. 그런데 <<모두의 내력>>은 검지 손가락 하나를 세워서 좌우로 흔들며 “아니야, 그건 아니라구.” 하며 일침을 놓는다. “현실과 적나라하게 마주할 때야 비로소, 꿈꾸고 있는 이상이 성큼 다가올 수 있는 거야.” 이 말도 덧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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