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창작과 비평 188호 - 2020.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페퍼로니에는 뿌리가 없다. 애당초 동물로 만들어진 것이며 이탈리아가 원조인 음식이 우리나라에서 어떤 본을 찾을 수 있을 리가 없다.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라는 제목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소설 중에서도 나오지만 그건 “결국 아무 데서도 오지 않았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페퍼로니피자는 강선이 가장 좋아하는 음식으로, 그녀에게 어디서 왔냐고 묻는 한국 애들에게 돌려주는 대답이다.
문제의 페퍼로니 발언은 나와 강선, 오성이 뭐랄까 조화로운 시간을 보내는 중에 발생한다. 하지만 그 조화의 바탕에는 광주의 고택, 유서깊은 집안의 족보정리를 하러 나와 오성이 왔다는 맥락이 있다. 그리고 강선은 그 유서깊은 집안의 딸이다. 따라서 그녀가 뿌리없는 페퍼로니에서 왔다는 발언은 인구통계학적 관점에서 볼 때 온당치 못하다. 그녀는 뿌리가 확실하며 바로 나와 오성의 힘으로 더더욱 확실해지고 있으니까. 그러나 그녀 개인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은 뿌리가 없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확실한 건 어쩌면 내가 페퍼로니피자를 좋아한다는 사실 뿐인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페퍼로니는 훗날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오성이 바그다드에 갔을 때도 다시 한 번 반복된다. 한국군이 이라크 파병을 결정했기 때문에 국제 구호 단체에서 한국인은 빠져야만 했다. 돌아가는 길에 한 꼬마가 오성의 담배를 훔친다. 꼬마를 쫓던 오성은 어디서 왔냐는 꼬마의 질문에 대면하게 된다. 오성은 페퍼로니에서 왔다고 대답한다. 그건 한국과 자신을 구별하는 발언이다.
그러니까 페퍼로니에는 많은 게 압축되어 있는 것이다. 미국 생활에 대한 강선의 그리움, 스스로 이방인이라고 느끼는 감정, 스스로를 전통과 구별코자하는 태도, 천변에서의 나른한 태도. 총체적으로는 젊음의 상태라고 할 수 있겠다. 재미있게도 그런 페퍼로니는 소설에서 한 번도 우리라는 주어에 붙어서 발언되지 않는다. 페퍼로니에서 왔다고 발언하는 주체들은 모두 ‘나’다. 우리는 없다는 젊은 여교수의 발언과 오버랩 되는 지점이다. 치즈처럼 하나로 녹아 뭉그러지지 않고 개별적으로 피자 위에 올라가 있는 페퍼로니들처럼 하나의 페퍼로니에서는 한 명의 사람만이 올 수 있다. 전체적으로는 피자 위에 있지만 모두 짜고 시큼한 페퍼로니일 뿐인 젊음은 보이지 않는 피자 도우 위에서 살아가며 몸부림치고 있다.
소설에 심도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축에서 볼 때 이 소설은 정통하며 완성도가 높다고 평할 수 있을 것 같다. 풍부한 맥락과 이미지들이 잘 구워진 피자처럼 훌륭하게 만들어져 나왔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결말의 처리에서 드러나는데, 그건 엄마의 분량이 소설에서 너무 적다는 점이 아닐까 한다. “한동안 나를 쥐고 있던 죽음의 세계”라는 말을 마주했을 때는 순간적으로 조금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괜찮은 걸 짧게 생략하고 넘어간 것은 좋은 일이었지만 결말에서 모든 맥락을 조화시키려면 엄마에 관한 이야기가 중간중간 더 삽입되어 충실한 연결점을 확보해야 하는 것이 아니었나 싶기는 하다. 그럼에도 이건 사소한 약점일 뿐이다. 고택과 족보처럼 중후한 언어로 페퍼로니를 얘기하는 매력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로운 미감이었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westwise 2020-10-05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소설 공부를 하는 제게 도움 되는 리뷰가 많네요. 새 글도 자주 올려주시면 좋겠어요. 잘 읽었습니다.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한줄평 :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정치적 올바름, 페미니즘, 소수자에 관한 관심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만 사서 읽을 것. 소설의 깊이, 완성도, 새로운 생각 등을 기대한다면 사지 말 것.


<책 전체>

페미니즘에 관한 소설이 3편. 소수자에 관한 소설이 2편. 나머지 두 편은 수준 이하.

현대의 젊은 작가는 PC하지 않은 글을 쓰지 못한다고 주장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페미니즘, 퀴어가 잘 팔린다는 건 안다. 하지만 잘 팔리는 것이 유일한 목적인 문학을 하고 싶다면 적어도 제목이 젊은작가상이어서는 안 되지 않을까 한다.


<음복>

분명 평범한 '시월드' 서사에 중국 막장 드라마의 왕권 암투를 가지고 들어온 것은 흥미로운 시도였다.

그러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가 굉장히 명확한 가운데, 소설적 설득을 위해 동원된 설정이 너무 치졸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남편은 너무 멍청(순수)해서 집에서 일어나고 있는 미묘한 일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고, 여자만이 여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이해해줘야 한다는) 포장하려고 노력했지만 포장되지 못한 진영논리.

페미니즘을 설득하려 했던 것 같지만 그려져 있는 세계에서 제사의 무게는 한없이 가벼워 보인다.

남성을 거의 무정적 존재로 그리려는 시도 속에서 가부장제의 무게 또한 사라져버렸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작가의 전작 <신짜오, 신짜오>를 굉장히 의식하며 자기복제를 시도한 듯한 작품이었다.

선생님의 대사에서 더할 나위 없이 날 것으로 표현되는 작가의 주제의식, 어떻게든 페미니즘 문제에 한국의 역사적 아픔을 덧씌워보려고 용산참사를 가지고 들어오는 얄팍함.

소설의 형태를 띄고 있지만 교술장르라고 이름을 붙여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된다.



<그런 생활>

소설 속 주인공의 이름이 작가와 같다고 해서 무조건 메타소설이 되고 아방가르드가 되는 게 아니다.

별 의미 없는 자기 '지지고 볶는' 생활을 거의 그대로 써놓은 듯한 이 글은 소설이라기보다는 일기장이라고 부르는 게 더 합당해 보인다.



<다른 세계에서도>

문제적이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논문의 주제의식을 그대로 가져와서 소설의 껍데기를 입혀 놓았다.

소설은 그 주제의식을 가지고 간접적으로 고민하는 여성의 모습을 포착하고 있을 뿐이다.

논문의 주제는 소설 속 상황에서 그저 잘 풀려 있을 뿐, 심화되지도 확장되지도 않는다.

그냥 있어보이게 쓴 <Why?> 같다는 느낌.



<인지공간>

SF를 표방하고 있으나 가장 기초적인 설정에 오류가 너무 커서 어설픈 청소년 소설을 보는 기분이었다.

장기기억이 불가능한 소녀는 연구를 하는 게 불가능하다. 단기기억은 정말정말 짧기 때문이다.

이런 '기억'이라는 요소를 배제하면 소설은 열화판 <바벨의 도서관>일 뿐이다.

이 소설은 그저 정보, 주류사상에 접근하지 못하고 차별 당하고 잊혀지는 소녀의 이야이면서 하나도 맞지 않는 기억과 인지의 이야기, '저 너머'의 이야기나 하고 있다.



<연수>

그럴 듯한 그림을 보여준다.

나름 현대적인 감성에 맞는 성장소설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 소설이 <곰돌이 푸여서 다행이야>,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같은 그런 에세이류 베스트셀러와 다를 게 뭔가?

소설이라는 구조를 통해 어떤 의미와 진실에 닿는 지점은 전혀 없다. 다만 필력이 좋아서 읽는 맛은 좋다.



<우리의 환대>

이 작품집의 표제작은 차라리 이 작품이어야 했다.

소설적 거리 조절, 줄타기에 성공한 작품이고 그로 인해 유발되는 긴장이 좋았다.

그러나 현재로서는 작가의 등단작에 퀴어라는 테마를 덧씌웠다는 느낌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 제11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강화길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전반적으로 실망스럽다. 단적으로 말해서 [현대문학상]에서 대작이 아니었으며 평이 좋은 편도 아니었던 <음복>이 대상작이라는 게 이번 작품집의 태도를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소설적 완성도보다는 소위 말하는 프리미엄이 붙은 작가와 소재를 무비판적으로 가져왔다는 느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