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디 혹은 애슐리
김성중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상속>
새로운 형태의 창작을 유려한 이미지로 표현했다. 작품은 다양한 인생의 경로를 거쳐온 습작생들과 소설가 선생님이 상호영향을 주고 받으며 작품이 빚어지는 걸 표현했다. 확실히 책 속의 두 밑줄을 통해 글을 쓰지 못하는 작가가 구원을 찾는 이미지는 퍽 감동적이라 하겠다.
소설수업이 본격적으로 유행한 게 정확히 언제부터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작가의 죽음이라든지 저작권 스캔들 같은 요소들과 엮어서 생각해보면 유의미한 함의의 발견이라 생각된다.
다만 그러한 이미지의 발굴과 잘 읽히는 문체 이외에 이 소설이 성취한 게 무엇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쉽게 답하기 어렵겠다.
공동 창작의 승화는 당신에게 얼마나 새로웠는지?


<정상인>
소위 ‘플라타너스’ 식의 운동권의 소시민화 담론 이후로 한층 더 발전한 의식을 보여주는 게 흥미로웠다. 여전히 답을 찾지는 못하지만 (불행히도 사회주의와 운동권은 쇄퇘하고 있으므로) 이 소설은 그 속에서 흡사 “굿바이 레닌” 식의 멜랑꼴리와 따뜻함(우정)을 추출해 낸다. 이 소설이 그리고 있는 그 우정과 유대가, 우울과 어둠을 견디기 위해 두꺼운 텍스트로 돌진하는 청춘의 모습이, 이미 부서지고 없어진 그것들이 그리워서 조금 울컥했다.
다만 그것이 잃어버린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끝나는 건 조금 약한 결말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시위 현장을 보면서 모종의 계승 의식을 표현하는 엔딩을 설정했지만 결국 서사만을 가지고 보면 허무한 결말이지 않나 생각한다. 그들에게서 조금 더 적극적인 가능성을 발견해 냈다면 더욱 의미가 크지 않았을까.


<해마와 편도체>
노와 소의 만남은 클리셰다. 성장기의 아이가 노인을 만나 위로를 받고 결국 그 노인의 죽음과 함께 성숙하게 된다는 이야기. 이 소설은 그 틀을 충실히 따른다. 그러나 하나 중대한 차이가 있다면 이 소설 특유의 시니컬함일 것이다. 보통 아이가 시니컬한 것을 그 아이의 상처로 생각하고 어른은 따뜻하게 품어주는 형태로 설정되기 마련인데, 이 소설에선 둘 다 아주 독설가이다. 그런 캐릭터의 설정이 무척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일이 전개되는 방식, 중고 거래를 통해 만나고, 광화문을 산책하는 것이 설득력이 있어서 생각해보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는 걸 잊고 읽었다.
다만 해마와 편도체를 제목으로 달고 있으며 뇌에 관한 언급들이 소설 중간중간 나옴에도 그것이 소설에서 수행하는 역할이 적은 것은 명백한 약점으로 보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어딘가 상상도 못 할 곳에, 수많은 순록 떼가 켄 리우 한국판 오리지널 단편집 1
켄 리우 지음, 장성주 옮김 / 황금가지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 가지 확실한 건 켄 리우가 절대 시시한 작가는 아니라는 사실이다. 



켄 리우의 소설은 절대 예상 가능한 방향으로 끝없이 들어가며 아주 미묘하게 가공된 표현의 차이를 맛보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그렇게 미묘하게 맛을 내고, 공백과 거리를 통해 별 것 없는 이야기를 있어보이게 만드는 건 사실 예전 소설의 방식이다. 카버나 줌파 라히리 같은 미니멀리스트의 방식. 그게 아직도 한국 단편에서는 주류를 이루고 있는데, 켄 리우를 보고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된다.
켄의 단편은 매섭게 선명하고 직설적이다. 알쏭달쏭한 의미를 찾기 위해 먹기 어려운 과일을 깔 때처럼 낑낑대지 않아도 된다. 그의 소설은 항상 핵심을 잘 보이는 곳에 전시하고 다른 미사여구나 군더더기 없이 바로 그 핵심에 관해 이야기한다. 이성과 과학, 분석이나 제도가 삶에서 만들어내는 부조리와 아이러니가 바로 그것이다. 과학과 논리로 뒷받침되는 소설은 현대 세계와 다를 바가 없고, 그 안의 인물들은 무섭게 현실적으로 과학과 논리 뒤에서 인간 삶의 문제를 끄집어 낸다.
이런 방식의 가장 큰 장점은 미사여구가 극단적으로 적기 때문에 주제에 직접적으로 기여하는 ‘살아있는’ 부분이 많아지고, 단편소설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반전의 반전의 반전’을 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의 소설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뻔히 보인다 싶으면 그 뻔히 본 지점까지 단숨에 달려가서는 한참을 더 달리며 주제를 심화시킨다. 각 소설을 보면 한 편 안에 들어가 있는 문제의식의 심도에 놀라게 된다. 이게 정말 한 단편의 심도라고?
하지만 그렇다고 켄 리우가 완벽한 작가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직접적으로 그를 테드 창과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테드 창의 단편 중에서도 걸작으로 뽑는 건 <지옥은 신의 부재>와 <네 인생의 이야기>인데, 그 둘에서 받은 깊은 울림을 리우의 단편에서 찾아보기는 다소 어려웠다. 어쩌면 그건스타일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굳이 나누자면 테드 창은 좀 더 정통 소설 쪽에 가까운 방식으로 소설을 쓴다. 주제가 좀 더 차분하게 내려앉아 있고 가장 결정적인 지점을 찾아 정확히 찔러온다. 반면 켄 리우는 조금 더 장르적인 작가다. 그가 실제로 정통 소설의 미학에 가치를 느끼는지 그렇지 못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적어도 그의 소설은 테드 창에 비해 전개에 온 힘을 쏟는 것으로 보인다. 그 때문에 확실히 소설은 다이나믹하고, 아마도 스스로의 아이덴티티라고 생각하는 듯한 오리엔탈한(혹은 중국적인?) 소재들이 거부감 없이 훌륭하게 우러나온다. 그러나 아직은 그의 소설 중에서 정말 깊은 울림을 받아 하루 종일 그 속에서 허우적거리게 하는 것은 없었다.


-----------

문학을 사랑하는 우리는 선뜻입니다.

선뜻 인스타그램 : https://www.instagram.com/sunddeut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동네 103호 - 2020.여름
문학동네 편집부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인용 게임] : 이 소설은 소설적인 정동을 갖추고 있는 것은 맞으나 실제로 작동하는 부분은 굉장히 적다. 서술의 밀도가 낮은 것. 무엇보다도 이 소설에는 “어떻게”가 빠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문학동네 103호 - 2020.여름
문학동네 편집부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서장원 작가는 꾸준히 어떤 거리감을 쓰고 있다. 등단작에 붙은 심사평은 이 작품에 적용해도 거의 완전히 일치한다.
“당선작인 ‘해가 지기 전에’는 작가 스스로가 소설의 흐름을 적절히 제어하면서 차분하고 치밀하게 써내려간 수작이다… 그것을 적절히 처치할 방법이 없는 사람들이 해결을 미룬 채 작은 기쁨에 골몰하는 모습이 대비되며 이 시대의 서글픈 초상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성공적으로 연출해 냈다.” — 2020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평 중
제목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듯이 이 소설은 자리를 받지 못한 사람에 관해 썼다. 노영은 아픈 오빠만을 챙기는 부모의 우선순위에서 완전히 밀려났다. 요양원에 혼자 힘으로 입원한 그녀의 엄마는 그 지경이 되어서도 꿋꿋이 노영에게 관심이 없다. 그러니까 노영은 오빠를 원망했을 것이며 엄마에게는 사랑받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해서 슬펐겠다. 호주 유학 중 만난 줄리아와의 일화도 비슷한 느낌으로 정리될 수 있다. 모성에게 또다시 배신당한 것. 그러나 이번에 노영은 모성의 약점을 정확히 알고 있고, 복수심 가득한 암살자처럼 죽은 아들의 일기장을 훔쳐나온다. 그리고 소설의 현재에서 노영은 나에게 부탁해 엄마와 부루마블 게임을 시킨다. 노영이 슬그머니 빠졌지만 엄마는 그녀를 찾지 않는다. 그녀는 그런 사실을 이제는 선글라스를 끼듯이, 제스처를 취하듯이 담담하고 기계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쓰고보면 정말로 수작의 느낌이 들지만 사실 이 소설에 높은 점수를 주기는 어렵겠다. 작가 특유의 거리감각 때문이다. 위에서 정리한 것처럼 이 소설은 소설적인 정동을 갖추고 있는 것은 맞으나 실제로 위와 같이 작동하는 부분은 굉장히 적다. 서술의 밀도가 낮다는 말이다. 그게 꼭 문제인 것은 아니지만 간명하게 물 흐르듯 전반적인 서술이 심도를 전혀 형성하지 못한다는 건 문제가 있다. 예를 들어 “귀신”. 노영의 목소리가 플랫폼에서 들렸다는 나의 짧은 일화는 고작 노영이 스스로를 “귀신”이라고 발언하게 만드는 데 쓰이고 끝이다. 그런데 이 “귀신”은 소설의 심도에 전혀 기여하지 않는다. 오빠와의 과거를 보며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는 걸 굳이 정리해주는 것 뿐이다. “귀신”뿐 아니라 다양한 소재와 문장이 그렇게 의미없이 흘러 사라진다.
이 소설의 목적성에 관해 생각해볼 필요도 있다. 소설은 노영의 마음에 관해 썼다. 그녀가 어떻게 집에서 “귀신”이 되었고, “귀신”처럼 복수했으며, “귀신”처럼 성불에 다가서는 지에 관하여. 따라서 노영의 감정변화가 이 소설의 핵이어야만 한다. 그런데 우리는 (시간이 흘렀다는 명확한 사실을 제외하면) 노영이 어떻게 엄마에 대하여 용서 혹은 담담함 혹은 어떤 태도(이것을 정확하게 쓰지 못하는 이유는 소설에 제시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에 이르게 되었는지 전혀 알지 못한다. 엄마와 그녀 사이의 문제적 관계에 관해서는 쉽게 파악할 수 있다. 그것은 클리셰이기 때문에. 그러나 그 귀결은 오리무중이다. 아득하고 붕 뜬 이미지만이 남았다. 나와 노영의 (현재)관계가 노영과 어머니의 관계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만 같은 과거회상이 삽입되며 소설은 끝난다. 퍽 감상적인 장면이지만 그런 장면을 넣을 게 아니라 노영의 마음에 관해 써야 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말하자면 이 소설에는 “어떻게”가 빠져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창작과 비평 188호 - 2020.여름
창작과비평 편집부 지음 / 창비 / 2020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 : 고택과 족보처럼 중후한 언어로 페퍼로니를 얘기하는 매력은 다른 곳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흥미로운 미감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