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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두 사람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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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가능하면, 김영하 작가의 신간 <오직 두 사람>을 읽는 것을 미뤄두려고 했다. 그 계기가 된 소설은 <살인자의 기억법>이었다. <살인자의 기억법>은 그 이전 김영하 작가의 소설들과는 달랐다. 나는 이미 <살인자의 기억법>를 읽으면서, 김영하 작가의 패기와 열정이 그의 글에서 사그라들고 있음을 느꼈다. 물론 그는 여전히 글을 잘 쓴다. 그러나 그의 글에서 펄떡이는 맥박은 더 이상 느껴지지 않는다. <오직 두 사람>이 발매된 올해로 김영하 작가의 나이는 50세(1968년생)이다. 그리고 그는 이미 한국 소설판에서는 잘 알려진 소설가이다. 그의 소설에서 패기가 빠져나간 것은 나이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일지도 모른다. 여하튼 김영하 작가의 소설을 아끼는 사람으로서 그의 글에서 더 이상 불꽃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은 아쉬운 일이다. 물론 열정이 사그라드는 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할 수 없는 일이다. 김영하 작가의 열정이 사그라든 마음자리에 어떤 무엇이 자리를 잡을까 고대한다.

<오직 두 사람>이란 제목의 이 책은 7편의 단편소설로 이뤄져 있는데, <옥수수와 나>는 건너뛰었다. 이전에 다른 지면을 통해 읽었기 때문이다. 단편들 중에서 곱씹게 되는 작품은 <오직 두 사람>과 <아이를 찾습니다>이다. 사람들은 무수한 상처와 집착 속에 살아간다. 그 트라우마만 없으면 더 행복할 것 같지만,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어쩌면 살아있는 사람에게는 상처와 집착이 피할 수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특별히 그 상처와 집착이 가족과 관계된 것이라면 거기서 심적으로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울 수도 있다. 거기다 불행을 벗어났다고 생각하는 순간 행복이 아닌 다른 불행이 찾아올 수도 있다. 그러나 비록 우리 앞에 또 다른 불행이 기다리고 있을지라도, 우리는 몸부림쳐 살아가야 한다.

단편 <오직 두 사람>에는, 3남매 중 장녀를 무척 사랑하는 딸바보 아빠가 나온다. 그 아빠가 사실은 큰딸에게만 집착하고 구속을 하는 사람이었다. 딸의 남자친구에 대해서도 사사건건 간섭하는 그 아빠가 죽어갈 때 큰딸은 해방의 웃음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빠가 죽자 큰딸은 의지하고 소통할 곳이 없었다. 아빠만 사라지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빠가 죽고 나니 도리어 자신이 아빠에게 중독되었던 것을 발견한다. 그녀는 자신의 유일한 응원군이었던 아빠 없이 남은 삶을 홀로서기해야만 할 것이다.

단편 ​<아이를 찾습니다>에서는 세 살 때 유괴된 아들로 인해 붕괴되는 가정이 나온다. 그러나 정작 유괴된 아이가 돌아왔을 때, 미쳐버린 엄마는 사고로 죽고, 돌아온 아이는 과거의 엄마(유괴범)를 그리워하며 집을 뛰쳐나가고 만다. 김영하 작가는 이 가족의 불행은 유괴에서 시작되었으며 출구는 찾을 수 없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그러나 작가의 글처럼 불행의 씨앗이 있다고 해서 모두 불행해지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그 불행의 씨앗은 우리 삶의 도처에 불안으로 잠재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그 상처를 가슴에 안고 웃으며 살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덧.

가족이라는 평화로워 보이는 풍경 안을 자세히 관찰하면 부부간, 부모 자식, 자식 상호 간의 상처와 미움을 발견할 수 있다. 가족이라는 가장 친밀한 관계 가운데는 이렇듯 종종 악마가 출몰한다. 아마 많은 사람들이 가장 큰마음의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은 가족일 것이다. 이지러진 가족으로부터의 상처는 삶을 굴절시키기도 한다. 특히 부모가 지속적이고 미묘한 가해자인 경우는 책임을 묻기도 힘들다. 때로 사람들은 왕래를 끊음으로써 질곡을 끊어보려 하지만, 정말 그 질곡을 끊으려면 마음으로부터 그 부모 혹은 부모가 만들어낸 과거를 용서하고 작별해야 한다. 더 건강한 삶을 살고 싶은 사람은 미래를 향해 몸부림치며 나가야 한다. 그냥 과거를 탓하며 주저앉아서는 답이 없다. 우리의 예상보다 앞으로 우리가 살아가야 할 날은 길다. 그리고 미래는 오래 지속된다. 허구와 거짓말인 소설에 죽자고 달려들어 심각한 서평을 적어보았다. 끝까지 읽어주신 것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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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거리를 둔다
소노 아야코 지음, 김욱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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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소노 아이코의 어린 시절은 아버지의 폭력 때문에 어두웠다고 한다. 결국에 부모는 이혼을 했고 그녀는 독신을 꿈꿨으나, 22세에 결혼을 했고 소설가로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장년기에 실명의 위기를 넘겼고, 가톨릭 신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알라딘의 100자 평을 보면 그녀가 인종차별주의자에 극우 성향이라는 의견이 있다.

이 책은 특별한 스토리가 없다. 자기계발서는 아니다. 그냥 에세이집이다. 가톨릭 신자의 신앙이 엿보이는 가벼운 명상록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 참고로 마틴이 가장 열광하고 좋아하는 에세이 작가는 무라카미 하루키와 이석원이고, 명성에 비해 가장 실망했던 작가는 장영희였다.

책에 대해 너무 기대하지 않기를 바란다. 그냥 지칠 때 마시는 에너지 충전용 아이스커피 한 잔이라 생각하면 좋을 듯하다. 표지가 참 예쁘다. 책은 자그마하고 얇다. 속도가 빠른 사람은 1시간 만에 읽어낼 분량이다. 아래 발췌문을 보고도 흥미가 없다면 사서 보는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그런데 빨리 읽어서는 절대 안되고 천천히 음미하면서 틈틈히 읽어야 되는 책이다. 마틴은 너무 빨리빨리 책장을 넘긴 것 같다.

가장 기억에 남는 내용은 독자들이 살아가면서 자기만이 잘 할 수 있는 부분을 키우라는 조언이다. 예를 들면 자수를 하나 하더라도 장인의 경지에 이르도록 노력하라는 것인데, 마틴도 소설 쓰기에 프로가 돼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다. 블로그 이웃님들도 각자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길 바란다. 저자는 그런 근성이 누굴 만나도 꿀리지 않는 자존감을 만들어준다고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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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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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위 때문일까? 감동은 없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책을 읽고 아무런 느낌이 없고 덥기만 하다. 김애란의 글이 이젠 너무 뻔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대다수의 독자들은 나와는 정반대로 생각하는 것 같다. 알라딘 100 자평도 그렇고, 네이버 블로그들의 서평도 그렇다. 마치 '아이돌'이라도 대하듯 온통 감동의 물결이다. 눈물을 흘렸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바깥은 여름>이란 제목은 더위가 한창인 지금 딱 들어맞는, 너무나 당연한 말이다. 그런데 왜 작가는 책에다가 이런 제목이 붙었을까?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어느 한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라는 작가의 말에서 제목의 작명 이유를 유추할 수 있다. <바깥은 여름>이라는 제목은 <바깥은 천국인데, 내 마음은 지옥이다>라고 해석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김애란 작가는 이야기를 통해 신파조의 눈물을 만들어내는데 익숙하다는 생각이 든다. 한결 건조해진 문체와 신파가 어우러져 묘한 슬픔을 자아낸다. 그리고 글이 경쾌한 느낌은 사라지고 탁한 느낌이 강해졌다. 다만 글의 호흡이 이전보다 늦추어져 읽기에 편한 것 같다. 그런 면에선 '김애란은 역시 김애란이다.'라는 감탄사가 나올만하다.

단편들 중에 가장 마음에 드는 소설은 <노찬성과 에반>이다. 찬성은 할머니와 단둘이 사는데, 어느 날 집으로 개를 끌고 와서 에반이라고 이름 짓고 기르게 된다. 그런데 이 노견은 동물병원에서 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는다. 찬성은 에반의 안락사를 위해 전단지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은다. 하지만 이래저래 돈을 쓰다 보니 에반을 위해 안락사 주사를 살 돈이 모자란다. 그런데 어느 날 집에 돌아오니 에반이 보이지 않는다... 슬픈 이야기지만 아름답다. 동화로 읽어도 좋을 작품이다.

<침묵의 미래>는 작심하고 상을 타기 위해 쓴 소설 같다. 읽기도 힘들고 감동도 없는 관념소설이다. 그녀는 이 단편소설로 이상문학상을 거머쥐었다. 나머지 단편들은 다른 작가들에 의해서도 자주 활용된 소재를 사용하고 있어, 빛나는 김애란 작가의 글 솜씨에도 불구하고 나에겐 진부했다. <입동>은 어린이집 차에 치여 숨진 아이를 잊지 못하는 엄마의 심정과 이웃들의 호기심이 담겨있다. <건너편>은 노량진 공무원 시험 준비하며 만난 남녀가 한 명만 합격하면서 벌어지는 이별 이야기다. <풍경의 쓸모>는 어린 시절 엄마와 자식을 버리고 떠난 아버지와 교수 승진을 앞둔 아들에 관한 이야기다. <가리는 손>은 다문화 가정 이야긴데 특이하게 아빠가 외국인이다. 아빠가 자기 나라로 돌아간 후 남겨진 엄마와 아이의 이야기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는 남편을 사별하고 영국 사촌 언니 댁에 간 주인공의 심적 치유 과정을 그린 이야기다.

김애란 작가의 소설집을 읽다가, 문득 1999년 씨랜드 참사 때(수련원에서 화재사고로 19명의 유치원생과 4명의 교사가 숨졌다) 자신의 아이가 죽은 것에 항의해 뉴질랜드로 이민 간 부부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들은 하느님을 원망하며 종교도 버렸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세월호 참사 때 모 언론사가 그 부부를 어렵사리 인터뷰했다. 이럴 때는 언론사의 하이에나 근성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기어코 언론사는 부부가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자신의 죽은 아이가 생각나서 날마다 울며 술을 마신다는 말을 끌어냈다. 아물던 상처를 덧내고 만 것이다. 그 부부의 아픔이야 당하지 않은 사람은 헤아리기 힘들지만, 그 아픔 때문에 뉴질랜드로 이민까지 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죽음과 이별에 대해서는 애도의 기간이 필요하다. 그 슬픔을 가슴에서 다 퍼내기 위해 울음의 시간이 필요하다. 당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나만 고통당하고 나만 괴로운 것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그것으로 인해 방문을 싹 닫아거는 것은 문제가 된다. 언젠가는 그 슬픔을 끝내야 하며 스스로를 치유해야 한다. 눈물을 닦고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다시 사람들 곁으로 나서야 한다. 옳고 그름을 떠나, 사람은 혼자 살 수 없다. 하다못해 반려견이라도 곁에 있어야 한다. 무정한 세상을 탓해 보았자, 세상은 여전히 제 갈 길로 바삐 달려갈 뿐이다. 결국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자신뿐이다. 남을 탓하고 원망하는 것은 소용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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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자나무 숲
권여선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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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할 책은 권여선의 <비자나무 숲>라는 단편집입니다. 권여선 작가의 책은 저에겐 두 번짼데요. 처음 읽은 <안녕, 주정뱅이>가 마음에 쏙 들어서, 권여선의 다른 책을 여기저기 인터넷을 뒤지며 탐문했습니다. 그런데 <비자나무 숲>이 평이 좋더라고요.

좋은 소설입니다.

먼저 <비자나무 숲>이라는 소설책의 외피는 보랏빛 풍으로 조금 은밀하고 비밀스러운 분위기였는데, 내피는 제목 그대로 연두색 파스텔톤입니다. 표지를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시원합니다. 권여선 작가의 소설은 신경숙 작가처럼 질감 있는 유채화풍의 소설이 아닙니다. 공지영 작가처럼 웃프고 경쾌한 어투도 아닙니다. 굳이 갔다 붙이자면 조곤조곤한 박완서 작가와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소설집에 실린 권여선 작가의 단편들은 좋았습니다. 일곱 편 중에 단 한 편만 빼고요.

저한테 미운 털이 박힌 단편은 맨 앞에 나오는 <팔도기획>이라는 소설입니다. 이 단편에는 '현재 사무실 안에 있는 네 명의 위치는, 홍을 꼭짓점으로 하고 정과 나와 윤을 밑변으로 하는 직각삼각형을 이루고 있었다.'(19p)라는 식의 표현이 몇 번 나옵니다. 저는 수학적 이야기는 듣기만 해도 거북해서 소설을 읽는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익숙한 사람들의 마음을 다 아는 체하지만, 가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 드러날 때가 있습니다. <은반지>는 두 할머니의 어긋난 기억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길모퉁이>는 헤어샵이 배경인데, 전문적인 용어가 나와 더 빨려 듭니다.

<은반지>, <길모퉁이>도 좋은 작품이지만, 이 단편집의 압권은 <끝내 가보지 못한 비자나무 숲>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단편은 한 여자가 이미 죽은 남자친구의 어머니, 동생과 만나 제주에서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잠깐 주인공이 조는 사이에 차가 뒤집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하지만 그것은 주인공이 가끔 겪는 환각일 수도 있습니다. 과연 그녀는 비자나무 숲에 가지 못했을까요?

<소녀의 기도>는 자극적입니다. 이 단편보다 더 퇴폐적이고 노골적인 비행 청소년의 이야기를 접하고 싶은 분은 김영하 작가의 장편<너의 목소리가 들려>를 권합니다. <꽃잎 속의 응달>은 국어국문과 대학원을 졸업한 작가의 자전적 단편이라는 생각이 됩니다. <진짜 진짜 좋아해>는 저에겐 그냥 그런 연애 이야기로 읽힙니다.

아픈 이야기가 많지만, 권여선의 글은 시원합니다. 은근 뜨뜻해지는 6월의 더위를 식혀줄 바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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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 해방에서 한국전쟁까지 다시 쓰는 한국현대사 1
박세길 지음 / 돌베개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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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민중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것은 현실이 아닌 욕심이고 바램일 뿐이다. 역사는 결국 민중의 뜻대로 되는 기계가 아니다. 이미 낡아버린 노동자. 농민이 역사를 움직인다는 민중사관을 거부한다. 민중사관은 태생적으로 박정희 군사독재에 반대하기 위해 싹이 튼 것이다. 그리고 민중사관은 공산주의 역사관과 유사성을 보인다. 개발독재가 끝장난 지금 민중사관도 시효가 만료되었다. 지난 한반도의 역사는 외부 강대국간의 힘 대결의 연속이었음을 말해준다. 그리고 이제 노동자, 농민 단체도 다양한 이익집단의 하나가 되었다고 말하고 싶다. 자유민주주의는 혼란과 우여곡절이 많은 체제이지만, 남한은 이제까지 잘 성장해왔고 앞으로는 다원주의 사회로 잘 성장해 갈 것이라고 믿는다.

민중사관의 입장에 서면 도저히 남한의 풍요와 북한의 퇴락을 설명할 수 없다. 북한은 성장을 멈춘 고목이고, 남한은 쑥쑥 자라오르는 아름드리나무가 되었다. 남한의 백성들은 역사상 예가 없는 풍요와 자유를 누리고 있고 반면 북한은 시간이 멈춘 나라처럼 지지부진하다. 북한은 말만 공산주의이지 실제는 권력이 소수에게 집중된 독재사회이다. 독재 사회는 정체될 수밖에 없다. 그에 비하면 권력을 다양한 집단이 나누어 가지는 자유민주주의는 숨 쉴 여지가 많은 체제이다.

식민지 조선의 해방은 함석헌 선생의 말처럼 도둑같이 왔다. 아무도 그렇게 갑작스럽게 해방이 될지 몰랐다. 해방은 사실 미국과 소련이라는 두 강대국이 일본에 항복을 받으면서 가져온 선물이었다. 이른바 민중의 힘을 맹신하는 사람들은 해방과 더불어 한반도를 가만히 뒀다면 공산주의 국가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한반도의 역사는 진공상태, 힘의 공백으로 진행되지 않았다. 조선 백성은 자생적으로 해방을 쟁취하지 못했고, 미국과 소련은 2차 대전 이후 전 세계에서 힘겨루기를 하고 있었다. 공산주의는 달콤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공산주의는 길이 끊어져 낭떠러지로 이어진 길이었다. 물론 해방 당시에는 공산주의의 몰락을 예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많은 백성들이 공산주의에 혹 하였을 것이다. 먹고살기도 힘든 판에 자유를 약속하는 미국의 이념보다는 평등을 부르짖는 공산주의를 백성들은 더 원했는지 모른다.

자유로운 삶이 보장되기 위해서는 기초적인 의식주가 해결되어야 한다. 해방 당시에는 굶어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공산주의 이념에 따라 김일성을 중심으로 친일파를 제거하고 토지개혁을 일사천리로 해낸 북한은 당시로선 유토피아처럼 보였다. 거기에 비해 남한은 혼란과 반란의 연속이었다. 독재, 폭동, 반란이 이어지고 정치 지도자에 대한 암살이 이어졌다. 남한에는 일사분란함을 가르치는 이념이 없었으며, 백성에게 주어진 자유는 혼란만 거듭했다. 자유민주주의란 적어도 경제적 풍요가 보장된 후에 꽃피울 수 있는 이식된 이념이었다.

북한이 권력세습이 가능했던 것은 어쩌면 해방 직후 김일성이 권력기반을 튼튼하게 잘 닦아놓아서인지도 모른다. 실제로 1970년대 이전에는 북한이 남한보다 잘 살았다고 한다. 김일성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 김정일과 김정은이 권력을 이어왔다. 그러나 공산주의에는 미래가 없다. 소련과 동유럽의 붕괴, 중국의 개혁개방이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공산주의 체제는 붕괴하든가 개혁개방을 하든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왔다. 북한은 평등이라는 이념과 반미 구호로 가까스로 버티고 있다.

남한은 예나 지금이나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상과 정치집단이 존재한다. 자유주의란 거의 언제나 혼란스러운 것이다. 그러나 자유주의가 잘 정립된 미국과 서구는 다양한 주장들을 다원주의로 잘 포용하여 버티어왔다. 이 글을 읽는 분에게 묻고 싶다. 만약 지금 당신이 해방된 직후에 살게 된다면 평등의 공산주의 좌파를 선택할 것인가, 아니면 자유민주주의의 우파를 택할 것인가? 참고할 것은 중도나 샛길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해방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의 대결로 점철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좌우합작이라거나 통일이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출발에 앞서가던 북한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다. 남한은 지금은 번영의 꽃을 따먹고 있다. 하지만 남한은 좌와 우로 나뉘어 혼란스럽지 않은 적이 없다. 대한민국은 보이지 않는 미래를 향해 자유라는 한가지 신념으로 아슬아슬하게 시대를 건너왔다. 그 시작은 미약했을 수 있다. 그러나 자유 국가에 그만한 혼란은 불가피하다. 이념만으로 건설되는 국가는 없다. 이념은 언제나 말뿐이다. 현실은 역사관 대로 움직여주질 않는다. 남한의 지난 시절을 비판할 것은 비판하자. 그러나 칭찬할 일도 있지 않겠는가? 자신을 헐뜯기만 하는 자기학대적인 역사관을 고쳐 잡을 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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