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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나,


완독하는 데 족히 두 달이 걸렸다. 몇 페이지에 한 번, 더러는 한 페이지에 몇 번씩 눈물이 떨어진 까닭이다. 눈물 때문에 평소처럼 전철 안이나 버스에서 짬짬이 읽을 수 없었다. 눈물 때문이 아니더라도 쉽게 읽지는 못할 책이었다.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읽어내는 수밖에 없는 기록이었고, 활자를 읽는다기보다 활자 너머 육성을 감각하며 고통에 감응하는 독서였다.

두 달 남짓한 기간 동안 나는 재확인했다. 나를, 4월 16일 이후로 내가 정말로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너무 늦은 변화였다는 자책이 주먹이 되고 발길질이 되어 날아왔다. 도처에 부당한 고통이 산재해 있는데, 나와 가까운 일이 아니고 보기 괴롭다는 이유로 애써 고개 돌리며 방관자처럼 굴어온 과거가 부끄럽고 죄스러웠다. 어차피 한국은 이렇게 생겨먹은 국가라고 그럴싸한 체념의 포즈를 취하면서 절망했다고 떠들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얼마나 쉬운 절망이었나, 얼마나 쉬운 합리화였나. 

어쨌거나 나는 살았다. 살아서 닥치고 있었다.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배가 가라앉는 것을 보았다. 배 안에는 어쩌면 내가 바로 엊그제에도 마주쳤을지 모르는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내가 오늘 마주친 아이의 친구이거나 가족이었을지 모르는 아이들이 타고 있었다. 나중에야 정확히 알았지만 고등학교 시절 내게 경제를 가르쳤던 고등학교 선생님도 그 배에 타고 있었다. 좋아하는 선생님은 아니었다. 졸업한 지 오래되었고, 소식은커녕 다른 학교로 옮기신 줄도 몰랐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한 아홉 명의 실종자 가운데 그 분 이름이 있었다. 좋아하지 않았기에 오히려 기억하고 있던 이름과 얼굴을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몰랐다. 선생님도 아마 모르셨겠지.
​그 배에 탄 사람 누구도 이런 지금이 올 줄은 몰랐을 것이다. 설마 내가 이런 미래의 당사자가 될 줄은.
​다음 차례는 누굴까. 과거부터 존재해온 많은 사건들처럼 진상이 은닉된 채 시간이 흐르면 분명 다음 차례가 돌아올 텐데. 그 당사자가 내가 아니고, 내 가족이 아니고, 내 이웃이 아니고, 나와 같은 사람이 아닐 수는 없을 텐데. 그게 누구든 모두와 다르지 않은 하나의 생명이고 우주일 텐데. 수천 수만의 우주가 사라진 과거, 계속 우주를 사라지게 만드는 세상에서 눈 돌리고 등 돌린 이 누구인가.

나, 나다.
도대체 이 죗값을 어떻게 치러야 하나. 막막하고 먹먹하다. 전처럼 모른 척 고개 돌리며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는 게, 다행스럽고 고통스럽다. 버겁고 두렵다. 그러나 이제 다시는 고개 돌리고 싶지 않다. 우주를 잃고 싶지 않다. 그러니 섣불리 절망하지 않겠다. 이까짓 내가 미약하고 보잘것없을지라도 지금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도록 노력하겠다. 말하고 쓰고 행동하며 나, 계속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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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부족이 있다. 세 부족의 이름은 소라, 나나, 나기. 세 부족은 두 세계로부터 태어났다. 두 세계의 이름은 애자와 순자. 소라와 나나는 애자에게서, 나기는 순자에게서 나왔다. 두 세계는 하나의 집을 나눠 쓰는 이웃으로 만난다. 지하실 중앙에 양쪽으로 트인 벽을 세워, 벽 이쪽과 저쪽에서 하나의 현관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집. 구조가 기묘하여 무어라 설명한들 어떻게 그런 집이 있느냐는 소리만 듣는 이 공간에서 세 부족은 함께 자라난다. 소설은 이 셋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그 이름만 보아도 사랑으로 가득한 여자인 애자가 보는 인생은 허망하다. 덧없고 무의미하다. 그저 열심히 살던 남편 금주가 돌연 공장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죽었다. 애쓰며 살다가 어느 순간 영문 모르고 죽는 것이 인생이라면 살면서 애쓸 일은 하나도 없다. 애자는 소라와 나나를 돌보지 않는다. 이런 애자를 두고 어미로서는 몹쓸 지경이지만 사람으로서는 안됐다고 여기는 순자가 있다. 여자이기보다 어미인 순자는 제 아들인 나기의 도시락을 쌀 때, 소라와 나나 몫까지 만들어 현관 신발장 위에 둔다. 셋은 한 뿌리에서 양분을 받고 자란 열매처럼 성장한 뒤에도 자연스레 세계를 공유하며 지내는데, 어느 날 나나가 임신을 하면서 셋의 세계는 외부와 충돌한다.
 
아기 아빠인 모세가 나나와 나기의 관계를 의심하듯 외부에서 보면 셋의 관계는 셋이 자라난 집과 다르지 않다. 상상이 가지 않아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싶은 형상과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흔히 존재를 부정한다. 말이 안 된다, 어떻게 그런 것이 있느냐고. 이 말은 타당할까. 아니다.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늘 거기 있지만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고통처럼.
 
타인의 고통을 잊는 사람이 있다. 오롯이 자기 고통에 골몰하느라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한다. 당장 내가 아프고, 내가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다른 고통에 눈감는다. 점차 내 것이 아닌 고통을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제대로 생각해야 한다.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잊어서는 안 될 당연한 사실마저 잊고 만다.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프다. 이것을 잊으면 사람은 ‘괴물’이 된다고 소설은 나나의 입을 빌어 말한다.
 
나나가 이런 대사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임신이다. 애자에게 물려받은 성분 탓에 전심전력하는 사랑을 경계하는 나나와 엄마(애자)가 되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인 소라. 두 자매는 나나의 임신으로 크게 당황하지만 그와 동시에 외부와 부딪히며 ‘소중한 타자’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나는 아기를 혼자 낳아 기르기로 결심하고, 소라는 나나를 지키기 위해 이모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인간은 하찮다. 죽고 나면 그뿐인 일생. 세계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무의미에 가까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는 존재 또한 인간. 보잘것없을지라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족장이자 부족민으로서 스스로를 이끄는 일인 부족. 나기가 ‘소라, 나나, 나기’를 저마다 하나의 부족이라 칭하며 탁자에 물방울 세 개를 찍자, 이를 본 소라가 “너무 조그맣다, 왜 이렇게 조그매.” 하며 물방울에 물방울을 보태듯이 인간은 하찮음을 하찮음으로 연대한다. 그리하여 물방울의 경계가 무너지면 조금 더 큰 하나의 물방울로 합체하여 서로를 품는다.
 
그럼에도 인간이 덧없고 무의미하다면, 묻는다. 무의미한 존재는 나쁜 존재인가? 전혀 소중하지 않은 존재인가? 도무지 그렇지가 않다고, 오히려 그래서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소설은 말한다. 그토록 하찮고 허망한데도 즐거워하고 슬퍼하면서 버티어가고 있으니까. 하찮기에 하찮음을 알아보며 위로할 수 있으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모체(母體)로부터 태어나 거대한 세계 속에서 죽어간다. 이 소설은 그것의 덧없음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담담히 선언한다.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그 담백한 선언이 도리어 인간의 마음을 진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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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해보겠습니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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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부족이 있다. 세 부족의 이름은 소라, 나나, 나기. 세 부족은 두 세계로부터 태어났다. 두 세계의 이름은 애자와 순자. 소라와 나나는 애자에게서, 나기는 순자에게서 나왔다. 두 세계는 하나의 집을 나눠 쓰는 이웃으로 만난다. 지하실 중앙에 양쪽으로 트인 벽을 세워, 벽 이쪽과 저쪽에서 하나의 현관과 화장실을 공유하는 집. 구조가 기묘하여 무어라 설명한들 어떻게 그런 집이 있느냐는 소리만 듣는 이 공간에서 세 부족은 함께 자라난다. 소설은 이 셋의 시점으로 서술된다.

 

그 이름만 보아도 사랑으로 가득한 여자인 애자가 보는 인생은 허망하다. 덧없고 무의미하다. 그저 열심히 살던 남편 금주가 돌연 공장 톱니바퀴에 말려들어 죽었다. 애쓰며 살다가 어느 순간 영문 모르고 죽는 것이 인생이라면 살면서 애쓸 일은 하나도 없다. 애자는 소라와 나나를 돌보지 않는다. 이런 애자를 두고 어미로서는 몹쓸 지경이지만 사람으로서는 안됐다고 여기는 순자가 있다. 여자이기보다 어미인 순자는 제 아들인 나기의 도시락을 쌀 때, 소라와 나나 몫까지 만들어 현관 신발장 위에 둔다. 셋은 한 뿌리에서 양분을 받고 자란 열매처럼 성장한 뒤에도 자연스레 세계를 공유하며 지내는데, 어느 날 나나가 임신을 하면서 셋의 세계는 외부와 충돌한다.

 

아기 아빠인 모세가 나나와 나기의 관계를 의심하듯 외부에서 보면 셋의 관계는 셋이 자라난 집과 다르지 않다. 상상이 가지 않아서,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다 싶은 형상과 맞닥뜨리면 사람들은 흔히 존재를 부정한다. 말이 안 된다, 어떻게 그런 것이 있느냐고. 이 말은 타당할까. 아니다.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니까 그렇게 느껴질 뿐이다. 늘 거기 있지만 애써 들여다보지 않으면 이해하지 못하는 타인의 고통처럼.

 

타인의 고통을 잊는 사람이 있다. 오롯이 자기 고통에 골몰하느라 내가 이렇게 아플 수 있으면 남도 이렇게 아플 수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망각한다. 당장 내가 아프고, 내가 살기 바쁘다는 이유로 자연스레 다른 고통에 눈감는다. 점차 내 것이 아닌 고통을 상상하기 어려워진다. 그렇기에 우리는 제대로 생각해야 한다. 제대로 생각하지 않으면 잊어서는 안 될 당연한 사실마저 잊고 만다. 내가 아프면 남도 아프다. 이것을 잊으면 사람은 괴물이 된다고 소설은 나나의 입을 빌어 말한다.

 

나나가 이런 대사를 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 임신이다. 애자에게 물려받은 성분 탓에 전심전력하는 사랑을 경계하는 나나와 엄마(애자)가 되는 일 없이 어디까지나 소라로 일생을 끝낼 작정인 소라. 두 자매는 나나의 임신으로 크게 당황하지만 그와 동시에 외부와 부딪히며 소중한 타자를 생각하기에 이른다. 나나는 아기를 혼자 낳아 기르기로 결심하고, 소라는 나나를 지키기 위해 이모가 되기로 마음먹는다.

 

물론 인간은 하찮다. 죽고 나면 그뿐인 일생. 세계의 입장에서는 누구나 무의미에 가까운 존재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하찮음으로 어떻게든 살아가는 존재 또한 인간. 보잘것없을지라도 세상에 단 하나뿐인 족장이자 부족민으로서 스스로를 이끄는 일인 부족. 나기가 소라, 나나, 나기를 저마다 하나의 부족이라 칭하며 탁자에 물방울 세 개를 찍자, 이를 본 소라가 너무 조그맣다, 왜 이렇게 조그매.” 하며 물방울에 물방울을 보태듯이 인간은 하찮음을 하찮음으로 연대한다. 그리하여 물방울의 경계가 무너지면 조금 더 큰 하나의 물방울로 합체하여 서로를 품는다.

 

그럼에도 인간이 덧없고 무의미하다면, 묻는다. 무의미한 존재는 나쁜 존재인가? 전혀 소중하지 않은 존재인가? 도무지 그렇지가 않다고, 오히려 그래서 사랑스러운 존재라고 소설은 말한다. 그토록 하찮고 허망한데도 즐거워하고 슬퍼하면서 버티어가고 있으니까. 하찮기에 하찮음을 알아보며 위로할 수 있으니까.

 

인간이라면 누구나 예외 없이 모체(母體)로부터 태어나 거대한 세계 속에서 죽어간다. 이 소설은 그것의 덧없음을 부정하거나 회피하지 않고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그리고 담담히 선언한다. “계속해보겠습니다.”라고. 그 담백한 선언이 도리어 인간의 마음을 진하게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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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쿠스틱 라이프 6 어쿠스틱 라이프 6
난다 글 그림 / 애니북스 / 201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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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부터 5권까지도 그랬지만 6권도 깨알 재미! 믿고 보는 어쿠스틱 라이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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