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나인경 지음 / 허블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까맣게 잊고 지내던 혹은 잊은 줄 알았던 순간이 불현듯 떠오를 때가 있다. 콧속을 파고드는 등나무꽃 향기에서 기시감을 느낄 때, 손에 닿은 미지근한 약숫물이 누군가의 체온과 비슷할 때, 전혀 다른 사람 입에서 예전에 들었던 것과 비슷한 말을 들었을 때.


아, 맞아.

그때도 이 향기가 났는데.

그 애 손이 땀으로 촉촉했는데.

그 말에 내 마음이 조각조각 부서졌는데.


여태 내 안에 있는지조차 몰랐던 기억의 편린이 울컥 의식 표면으로 떠올라 물밀듯 들이닥친다. 갑작스레 밀려든 기억은 마냥 달갑지만은 않아서 때론 외면하고 싶기도 하지만, 어떤 기억에 대해서든 결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그 기억이 아로새겨진 그때 그곳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내 몸으로 직접 감각한 풍경과 소리, 체온과 마음이 어디로도 떠나지 않은 채 바로 그 순간에 붙박여 있다는 깨달음. 깊은 호수 같은 무의식에 잠겨 있어 아득했을 뿐 사라지지 않은 기억이 내가 떠올리지 못할 때에도 내 안에 상주하고 있다. 몸소 느꼈기에 몸속에 담긴 온전한 내 것. 그것이야말로 나라는 사람을 다른 사람과 구별할 수 있는 증거이지 않을까. 에드워드 애슈턴의 『미키7』에 등장하는 익스펜더블 미키7과 미키8이 같은 기억을 이식받은 육체로 같은 공간에 존재할지라도 각기 다른 개체로서 살아갔듯이.


이 소설에 등장하는 안과 정한은 자신을 자신이게 하는 기억이 자의적, 타의적으로 결락된 인물이다. 둘은 구멍 난 부분을 제 힘으로 메울 수 없기에,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불안정한 자아가 끊임없이 외부를 향해 신호를 송신한다. 공통의 기억을 가진 저 아닌 사람을, 제 자신을 자신으로 존재하게 해준 사랑의 상대를 찾아 도시의 무성한 소문 사이를 헤맨다. 필사적으로 머릿속 목소리를 듣고, 말을 걸고, 흔적을 복기하여 마침내 호수 표면으로 떠오른다. 표면에 이는 물살과 허공을 부유하는 공기와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진동과 흔들리는 소리를 비로소 감각한다. 그렇게 안은 안이 되고, 정한은 정한이 된다.


그러므로 “모든 것을 완성하는 마지막 한 조각”은 뇌와 컴퓨터 인터페이스의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ID칩으론 맞출 수 없다. 우리가 우리 몸으로 느낀 바로 그 순간, 순식간에 흘러가 버리기에 도리어 변질할 수 없는 찰나의 기억이야말로 모든 것을 완성하는 영원의 한 조각이다.

기억에도 저마다의 역할이 있다면 안에 대한 기억은 정한의 외부와 내부, 두 세계를 연결하고 상호작용을 가능케 하는 채널과 같은 역할을 했다. 안을 통하지 않는다면 정한을 둘러싼 세상은 현실감각이 제거된 이미지의 무한한 연속일 뿐이었다. - P31

"사람에게는 자신만의 고유한 기억이 필요해. 당연한 이야기인지도 모르지만 그래야 시작할 수 있어.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이야기를 말이야. 그게 단 한 장면에 지나지 않을지라도." - P88

사람들의 입을 오르내리며 수차례 가공을 거친 블루진프로젝트는 더 이상 정한이 아는 그것이 아니었다. 사실과 거짓은 끊임없이 뒤섞이고 그 속에서 또 다른 이야기들이 만들어졌다. - P147

"시나리오는 모든 게 결정된 세상이야. 결정된 일 외엔 어떤 것도 받아들여지지 않지. 그 밖의 모든 건 형태를 갖기도 전에 오류로 잡혀서 사라져 버려. 그러니까 여긴, 실은 아무것도 없는 곳인 거야. 텅 빈 공간." - P272

바람이 닿은 호수의 표면에 작은 물살이 일었다. 세상의 크고 작은 소리들이 한꺼번에 흘러들었다. 허공을 부유하는 습한 공기, 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미세한 진동, 가로수의 잎이 흔들리며 서로를 스치는 소리까지도. 안은 눈물을 닦아 냈다. 저 멀리 누군가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따금 속력을 높인 차들이 지나가는 대로 너머에서, 혹은 연구동과 맞닿은 호수의 건너편에서, 거듭 덧대어진 그 모든 풍경 속에서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한 사람을 바라보았다. - P37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도시의 소문과 영원의 말
나인경 지음 / 허블 / 2025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정해진 시나리오를 강제하는 거대 시스템 속에서 우리는 어떻게 우리로 남을 수 있을까, 아무개를 단 한 사람으로 만드는 사랑 안팎의 감각과 연결될 수 없다면 과연 무엇으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 앓기, 읽기, 쓰기, 살기
메이 지음 / 복복서가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가 나이기에 앓는 아픔을 사느라 몸속에 고인 말들, 통증이 가실 때에야 책상으로 돌아와 몸 밖으로 내보낼 수 있었던 문장들이 빚어낸 보석. 사무치게 반짝이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6)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그만둘 수 없는 마음 - 10년 차 청소부, 진로 고민은 영원히
김가지(김예지) 지음 / 책폴 / 202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진로 고민’이라고 하면 자연스레 학업이나 직업 같은 업(業)의 문제부터 떠올리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사실 진로라는 단어는 ‘나아갈 진(進)’에 ‘길 로(路)’가 결합한 한자어로서, 앞으로 나아갈 길 자체를 의미하는 광범위한 말이다.


이 책에서도 진로 고민이라는 문제를 비단 ‘일 이야기’로만 풀어내지 않는다. 직업의 의미를 고민하는 것으로 시작해서 직업에 대한 태도를 고찰하고, 자기다운 일의 방향을 모색하고, 자신이 선택한 일을 삶의 한 조각으로 받아들이는 과정을 솔직담백하게 풀어놓는다.


자신이 나아갈 길을 고민하는 일이란 결국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는 일이나 다름없기에, 해도 해도 끝이 없고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나’라는 사람은 이 세상에 오직 한 명뿐이기 때문이다. 나같은 사람은 나밖에 없다. ‘나답게’ 살고 싶다면 무엇을 그만두고 시작하고 계속할지 스스로 선택해야만 한다.


그만둘 수 없는 마음은 그래서 중요하다. 이 마음을 인지하지 못하면 자신이 진정으로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어떤 가치가 자신에게 가장 중요한지 알 길이 없다. 물론 그것을 안다고 해서 세상일이 자기 뜻대로 굴러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부득이하고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조차 우리는 자신이 뭘 그만두고 싶은지 깨달을 수 있다. 이 상황에서 벗어나 나아가고자 하는 방향을 구체화하면서 더 자기다운 삶의 형태를 알아볼 수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다움’은 그만둘 수 없는 마음의 영역에서 온다, 라고. 


그만둬 버리면 내가 나로 살아갈 수 없는 것, 그걸 빼 버리면 내 삶의 이야기가 성립되지 않는 것. 다시 말해 본질은, 그만둘 수 없는 마음과 맞닿아 있다. 그러니 작가가 고민 끝에 기존 필명(코피루왁)의 사용을 그만두고, 현재 필명(김가지)을 쓰기로 한 선택도 충분히 이해가 간다. 본질이 지향하는 길로 나아가기 위해 새로운 이름을 지어 “이게 나!”라고 선언하는 모습이 반짝반짝 빛난다.


작가가 필명을 새로 지었듯 새로운 직업을 발명하는 사람도 있다.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위해 세상에 없던 새로운 길을 개척하고 신개념을 만드는 사람들. 획일화된 삶의 기준을 끊임없이 강요하는 이 세상에서 정의 내리기 어렵거나 생소하거나 획기적인 일을 하며 “이게 나야! 그만둘 수 없어!”라고 선언하는 사람들. 그들이 마음에 품은 ‘그만둘 수 없음’은 외부적 요인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못 그만두는 견딤이 아니다. 그만둘 수 없을 만큼 자신에게 소중하기에 그만두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래서일까? 책 제목이 ‘그만둘 수 없는 마음’이라는 점이 더욱 마음에 와 닿았다. ‘그만두지 않는 마음’이라고 할 수도 있었을 텐데, 꿋꿋이 전자를 택했다는 것이 퍽 좋았다. 세상이 어떻게 생겨 먹었든 “아, 나는 이런 사람이래도! 나답게 살게 좀 냅둬요! 그만둘 마음 없다고요!”라고 호쾌하게 외치는 느낌이라 나도 덩달아 배짱이 두둑해진다.


이토록 명랑하고 애틋한 에세이를 만나 기쁘다. 질풍노도의 10대, 20대를 지나 “언제나 나로 잘 살아갈 미래의 나”에게 제 삶의 방향을 담담히 일러주는 30대의 김예지, 청소부 아닌 김예지, 작가 김가지가 그려낼 다음 여정의 이야기도 무척 기대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12쪽
"당신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그런 고리타분한 소릴 하고 있어? 지영아, 너 얌전히 있지 마! 나대! 막 나대! 알았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처음 처음 | 이전 이전 | 1 | 2 | 3 |다음 다음 | 마지막 마지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