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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여성들, 부자유한 시대에 너무나 비범했던
박무영.김경미.조혜란 지음 / 돌베개 / 2004년 7월
평점 :
이 책의 표지는 검은 바탕에 자개의 기법같이 은각화된 초충의 그림들,
그리고 호젓하게 앉은 태의 한 조선 여인이었다.
호젓한 그녀의 앉은 태에는, 조선 중엽에서 개화기에 이르는
시공을 초월한 조선 여성들의 삶이 정연하고도 정답게 읽혀졌다.
이 책은 양장본에 고급 종이로 되어 있지 않다. 그것이 마음에 든다.
내 개인적으로 너무나 좋아하는 재생용지같은 가볍고 성근 종이의 책이다.
그 성근 종이 책 안에는 요즘 내가 준비하는 시나리오의 소중한 모티브가 되어줄
조선 여성들의 삶, 사랑, 슬픔, 죽음이 담겨져 있었다.
먼저 책을 받은 후 가장 먼저 읽은 것은 남장을 하고 금강산을 구경한 김금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 책 중에 가장 나에게 많은 영감을 선사한 조선의 여성이다.
자신이 포기할 수 없는 내적 열망을 스스로 자각하고
그 한계를 깨닫게 되는 김금원의 모습은 21세기의 지금, 한성, 한양이 아닌
서울 시민으로 살아가고 있는 나 역시도 함께 느낄 수 밖에 없는 동질의 현실 인식이었다.
이 책은, 인문적 지식의 폭을 넓혀히고자 하는 지적 충격보다는 , 한 인간, 한 여성의 삶과 죽음이
고스란하게 필사본의 손때와 눈물때와 비바람의 풍화가 함께 담겨져
그 질감이 선연한, '삶의 기록'에 큰 비중이 있다.
나직하고도 정갈하게 조선의 여성들 이야기를 펼치는 세 저자의 음성 역시
이 책에 담긴 여성들의 높던 자기 자존감, 자아 실현 의지, 빛나는 생의 유연성 만큼이나
확연하고 담대하며 정감있다.
여기 담긴 여성들의 삶은, 나보다 먼저 이 땅을 살다간 앞 선 여성들이 걸어간 자취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구름처럼 흐르고 비처럼 곧장 마르는 덧없음이 아니라,
구비 구비 세가 험한 바다와 산맥으로의 탐험처럼, 걸어가고 난 뒤의 길 위에
반드시 선연한, 앞 서 걸어간 자의 용기와 노력과 좌절과 극복의 절절함이었다.
길은 한 사람의 발길로 만들어지지 않듯,
이 책에 언급된 그리고 미처 언급되지 못한 여성들의 삶과 삶이 걸어간 자취가
놓이고 놓여져, 오늘에까지 끊이지 않고 길로서 닦여지고 남겨지지 않았나 싶었다.
한 획 한 획 지은 싯구와 그림과 수와 책 외에도, 또한 그녀들은 지금의 우리를
낳은 어머니요 할머니였던 것이다.
내 삶도 끝이 다 하고 나면 이 책의 여성들처럼 한 시대를 살다간 한 여성으로
남겨 질 수 있을까, 내가 처했던 어려움에 내가 취한 선택이, 나의 다음에 올 여
성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을까 생각하니, 지금 내리는 소소한 나의 인생 여정 하
나 하나 제대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혼을 선택하고 그 택한 결혼에서의 갈등에 대처하고
아이를 낳고 아이를 잃고
남편을 잃고 부모를 잃고
시를 포기 하고 시를 포기 하지 못하고
사람들의 관심을 그리워하고 사람들의 이목을 개의치 않고
늙고 죽어가는
나보다 앞서 간 여성들의 선택과 갈등들이
지금의 나에게도 되물림 되어온 깊고 아늑한 어머니의 명경처럼 울림 큰 금언으로 다가온다.
내가 지금 가진 이 깊은 명경 하나를, 나의 다음에도 나의 딸들에게 물려 주고 싶은 마음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