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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평점 :
1. 들어가며
아빠는 인쇄업, 엄마는 학원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부모님의 맞벌이로 나는 늘 엄마 학원에 있거나, 방치되기 일쑤였다. 부모님이 나를 사랑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돌볼 시간과 여유, 체력이 부족했다. 아이는 셋이었고, 시간은 부족했으며, 재정적으로 어려웠다. 그렇게 나는 1년의 시간을 친할머니댁에 맡겨졌다.
할머니댁에서의 1년의 시간이 마냥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연세가 많았기에 늘 나를 돌보는 것을 힘들어 하셨다. 나는 활발했고, 할머니는 나를 좇아다니는 것을, 밥먹이는 것을 힘들어하셨다. 그래서 가끔 고모가 와서 나를 고모집으로 데리고 갔다.
사촌오빠와 사촌 여동생이 있는 고모집은 그야말로 천국이었다. 일단 고모는 나를 무척 사랑해주었다. 졸업선물로 내가 그토록 하고 싶어했던 '교정'을 해줄만큼 나를 딸처럼 신경 써주고 사랑해주었다. 그래서 고모집에 갈 때면 나는 늘 행복했다. 고모네 집은 늘 따뜻했고, 내가 좋아하는 사촌 오빠와 동생이랑 같이 놀다보면 내가 가진 마음의 무거운 짐들이 사라지는 것만 같았다.
클레이 키건의 '맡겨진 소녀'를 읽으면서 어린 시절 생각이 났다. 그렇지만 꽤나 담담한 문체를 보면서 사랑과 다정함으 느끼지 못했던 소녀의 어린 시절이 안타까웠다. 가족에게 사랑을 느끼지 못했던 소녀가 맡겨진 이후에 타인으로부터 애정을 느낀 그 여름이 얼마나 따뜻하고 꿈같이 여겨졌을까. 마치 한 여름밤의 꿈처럼. '맡겨진 소녀'는 짧지만 그 속의 문장이 꽤나 정밀했다. 소녀의 눈으로 본 풍경과 그 특별한 여름은 눈에 보이는 것처럼 세밀하게, 그리고 담담하게 표현된다.
클레이 키건은 문학의 나라 아일랜드에서 주목받는 작가이다. 러시아의 문호 안톤 체호프, 같은 아일랜드 작가 윌리엄 트레버와 견주어지고 국제 문학계의 떠오르는 별로 소개되고 있다. 섬세하고 감동적인 필체로 유명한 키건은 24년의 활동 기간 동안 펴낸 단 4권의 책으로 전 세계 유명한 문학상을 휩쓸며 천재 소설가라는 평가를 받아왔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주목한 작가 클레이 키건은 2009년 데이비 번스 문학상을 수상한 작품 '맡겨진 소녀'를 국내에서 처음 번역 출간하게 되었다. 이 책은 아일랜드 교과과정에 줄곧 포함되어 모두가 읽는 소설로 자리 잡았다. 또한 이 책을 원작으로 <말없는 소녀>로 제작되어 올해 5월 31일 국내 개봉을 앞두고 있다.
2. 맡겨진 소녀 줄거리, 등장인물
맡겨진 소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맡겨진 소녀는' 1981년 아일랜드 시골 지역을 배경으로 한다. 이야기는 어머니의 출산을 앞두고 여름 몇 달 동안 얼굴도 잘 모르는 친척 집에 맡겨지는 어린 소녀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출산을 앞두고 다섯째를 임신한 어머니는 집안일과 밭일까지 하느라 굉장히 지쳐 있었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았기에 한명이라도 식비를 줄이기 위해 아버지는 소녀를 킨셀라 부부 친척 집에 맡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만 아이가 없는 킨셀라 부부는 제대로 된 보살핌과 사랑을 받지 못했던 소녀를 정성껏 돌본다. 킨셀라 아주머니는 소녀가 머무르던 첫날 밤 침대에 오줌을 싸도 모른체 해주고 '습한 방에 재운 자기 잘못'이라고 덮어준다. 아저씨는 바깥일을 하고 들어오면 자연스럽게 식사 준비를 같이 하고 소녀에게 내일 우편함까지 달리기를 시키며 시간을 재줄 정도로 시간을 함께 보낸다. 이는 아버지의 무심한 행동과 정말 차이가 났다.
그렇게 소녀는 킨셀라 부부의 돌봄과 관심 속에 깨끗한 모습을 갖추고, 제대로 대답하는 법, 책 읽는 법을 배우며 따뜻한 시간을 보낸다. 처음으로 시내에 가서 제대로 된 옷을 산 날, 아이는 동네 초상집에서 킨셀라 부부의 아이가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곧이어 건강한 남동생이 태어나 집으로 돌아가게 된다. 킨셀라 부부가 소녀를 데려다주고 돌아서는 그때 소녀는 킨셀라 아저씨를 안으며 경고하듯이 '아빠'라고 부른다.
주요 등장 인물은 다음과 같다.
나(소녀) : 이름도, 몇번째 자녀인지도 나오지 않지만 대부분의 이야기는 '나'의 눈을 통해 서술된다. 손가락에 때가 끼고, 얼굴과 머리도 지저분했을정도로 돌봄을 받지 못했지만 킨셀라 부부의 돌봄과 사랑으로 정서적인 변화를 겪는다.
댄(아빠) : 자녀에게 무심하고 거친 성격의 소유자
메리(엄마) : 다섯째를 임신했고 밭일과 집안일을 하느라 상당히 지쳐있다. 남편과 마찬가지로 무심한 편, 그리고 의심이 많은 듯하다.
킨셀라 아주머니와 존 아저씨 : 경제적 여유는 있지만 아들을 불의의 사고로 잃었다. 일면식도 없는 친척집에 맡겨진 소녀를 안타까워하고 그들만의 방식으로 돌봄과 사랑을 전한다.
3. 여백의 미가 돋보이는 소설, 소녀의 감정선의 변화를 관찰하는 재미가 있는 소설
'맡겨진 소설'은 단서를 많이 주지 않는다. 소녀가 몇살인지, 몇번째 자녀인지, 어떤 감정인지 명확한 말로 설명하지 않는다. 단지 소녀의 생각과 말을 통해 '추측'하게 만든다. 소설 곳곳에 빈 공간을 남겨둠으로써 독자가 상상하게끔 만든다. 여백의 미가 돋보인달까. '이 소녀는 왜 이런 생각을 하는 걸까, 지금 어떤 생각인 걸까. 왜 이런 표현을 하는 건가 하는' 등의 그런 생각들 말이다.
사실 이런 생각은 어른의 시각으로 본 결과가 아닐까. 이 글의 화자가 대략 몇 살쯤 아이인지를 인지하고 읽어야지 이해가 된다. 어쩌면 여백의 미라는 건 어른의 시각으로 보았기 때문은 아닌지라는 생각을 했다. 어떤 말을 해야할 지 적확한 말을 찾지 못하는 학령기 전의 아이라면 아이의 행동과 말이 이해가 된다. 저자는 철저히 어린이에 빙의된 것처럼, 어린이의 시선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아빠가 나를 여기 두고 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들지만 내가 아는 세상으로 다시 데려가면 좋겠다는 마음도 든다. 이제 나는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다. 17쪽.
처음의 낯섦을 아이는 '곤란함'으로 표현한다. 평소의 나로 있을 수도 없고, 또 다른 나로 변할 수도 없는 곤란한 처지. 그래서 아이는 낯설은 그 느낌 때문인지 첫날부터 오줌을 싼다. 다행히 그것을 자신의 탓으로 전환해준 킨셀라 아주머니 덕에 무안해지지 않았지만 말이다.
아주머니의 손은 엄마 손 같은데 거기엔 또 다른것, 내가 한 번도 느껴본 적이 없어서 뭐라고 불러야 할 지 모르겠는 것도 있다. 나는 정말 적당한 말을 찾을 수가 없지만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24-25쪽.
소녀가 왔을 때 소녀의 몸을 구석구석 씻겨주는 아주머니의 손에서 소녀는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을 느낀다. 그것이 '따뜻함인지, 다정함'인지 알 수 없는 이유는 '전에 한번도 느껴 본 적이 없는 감정' 이기 때문이다. 손에 끼인 때, 집시같은 몰골만 보아도 소녀가 얼마나 애정어린 관심과 돌봄을 받지 못했는지, 알 수 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간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이 편안함이 끝나기를 - 축축한 침대에서 잠을 깨거나 무슨 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 - 계속 기다리지만 하루하루가 그 전날과 거의 비슷하게 흘러간다.45쪽.
소녀는 '무슨 실수를 하거나,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려서' 혼나거나 쫓겨날 것 같은 두려움, 불안을 늘 안고 살지만 킨셀라 부부네에서의 생활은 단조롭고 평화로웠다. 경계를 풀지 않고 '불안'을 늘 안고 있는 아이에게 킨셀라 부분은 완전히 살갑지는 않지만 그들만의 방식으로 아이의 마음을 조금씩 열어간다. 몸을 씻겨주고, 식사를 함께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아이를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 다음 머그잔을 물에 담갔다가 입으로 가져온다.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나는 머그잔을 다시 물에 넣었다가 햇빛과 일직선이 되도록 들어 올린다. 나는 물을 여섯 잔이나 마시면서 부끄러운 일도 비밀도 없는 이곳이 당분간 내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30쪽.
양동이에 비친 깨끗한 물을 보자 아이는 감정의 변화를 보인다. 그리고 그 물을 마신다. 6번이나. 그 물의 맛은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맛'이다. 소녀는 그 물의 맛을 왜 '아빠 맛'으로 표현했을까. 아빠가 부재한 맛이 나는 물은 6번이나 들이킬만큼 편안했던건 아닐까. 그리고 소녀는 킨셀라 부부네 집이 당분간 자신의 집이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비밀도, 부끄러운 일도 없는 이 곳'이 말이다. 소녀의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나'는 종일 아주머니를 도와 집안일을 한다. 소녀는 아주머니를 돕고, 아저씨와는 우편물을 가지러 달려가는 연습도 한다. 일상 속에서 소녀가 느끼는 잔잔한 행복이 느껴졌다.
그리고 결말 부분이 정말 인상적이었다. 바닷가에서 두 개처럼 보이던 불빛이 세 개가 된 것처럼, 맡겨진 소녀 '나'로 인해 킨셀라 부부는 어느새 세개의 불빛이 되었다. 불빛 암시처럼 결말 부분의 '나'의 외침은 킨셀라 부부와 한 가족을 이루고 싶은 '나'가 아빠에게 말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그 해석을 오롯이 독자에게 맡긴다. 맡겨진 소녀와 킨셀라 부부는 서로가 서로에게 구원이 되었던걸까. 자녀를 잃은 부부가 사랑없이 살아가는 아이를 잠시 돌보게 되면서 가족의 사랑을 다시 되찾아가는 그런 이야기였던걸까. 많은 부분을 상상하게 되는 소설이다.
"보렴, 저기 불빛이 두 개밖에 없었는데 이제 세 개가 됐구나."
내가 저 멀리 바다를 본다. 아까처럼 불빛 두 개가 깜빡이고 있지만 또 하나가, 두 불빛 사이에서 또 다른 불빛이 꾸준히 빛을 내며 깜빡인다...(중략).. 바로 그 때 아저씨가 두 팔로 나를 감싸더니 내가 아저씨 딸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끌어안는다.75쪽.
나는 차마 눈을 뜰 수가 없지만 그래도 억지로 뜬다. 킨셀라 아저씨의 어깨 너머 진입로를, 아저씨가 볼 수 없는 것을 뚫어져라 쳐다본다. 아저씨의 품에서 내려가서 나를 자상하게 보살펴 준 아주머니에게 절대로, 절대로 말하지 않겠다고 얘기하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지만, 더욱 심오한 무언가 때문에 나는 아저씨의 품에 안긴 채 꼭 잡고 놓지 않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98쪽.
4. 인상깊은 구절
우리 둘 다 말이 없다, 가끔 사람들이 행복하면 말을 안 하는 것처럼. 하지만 이 생각을 떠올리자마자 그 반대도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28쪽.
길을 따라 걸어가는데 공기에서 뭔가 더 어두운 것, 갑자기 들이닥쳐서 전부 바꿔놓을 무언가의 맛이 난다. 우리는 문과 창문이 활짝 열린 집들과 길고 펄럭이는 빨랫줄, 다른 집 진입로로 이어지는 자갈길을 지난다. 57쪽.
아저씨가 손을 잡자마자 나는 아빠가 한 번도 내 손을 잡아주지 않았음을 깨닫고, 이런 기분이 들지 않게 아저씨가 손을 놔줬으면 하는 마음도 든다. 힘든 기분이지만 걸어가다 보니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서의 내 삶과 여기에서의 내 삶의 차이를 가만히 내버려 둔다. 70쪽.
"넌 아무 말도 할 필요 없다" 아저씨가 말한다. "절대 할 필요 없는 일이라는 걸 꼭 기억해 두렴.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 73쪽.
"참 조용하네요, 얘는."
"해야 하는 말은 하지만 그 이상은 안 하죠. 이런 애들이 많으면 좋을 텐데요."아저씨가 말한다. 67쪽.
나는 그 자리에 선 채 불을 빤히 보면서 울지 않으려고 애쓴다. 울지 않으려고 애쓰는 건 정말 오랜만이고, 그래서 울음을 참는 게 세상에서 제일 힘든 일이라는 사실이 이제야 떠오른다. 80쪽.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차라리 빨리 가고 싶다. 얼른 끝내고 싶다. 나는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서 축축한 밭과 물이 뚝뚝 떨어지는 나무들, 언덕들을 내다본다. 처음 왔을 때보다 더 푸르러진 것 같다. 생각해 보니 침대에 오줌을 싸고 뭔가 깨뜨릴까봐 걱정했던 그때가 너무나 멀게 느껴진다. 81쪽.
심장이 가슴 속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져 있는 것 같다. 나는 내 마음을 전하는 전령이 된 것처럼 그것을 들고 신속하게 달리고 있다. 여러 가지 일들이 마음속을 스친다. 벽지에 그려진 남자아이, 구스베리, 양동이가 나를 아래로 잡아당기던 그 순간, 길 잃은 어린 암소, 젖은 매트리스, 세 번째 빛, 나는 내 여름을, 지금을, 그리고 대체로 지금 이 순간만을 생각한다. 96쪽.
5. 마치며
아이의 시선으로 본 아일랜드의 배경, 행동 묘사, 감정 표현 등이 참 잔잔한 여운을 주었다. 깊고 서정적인 장면들과 유년의 기쁨과 슬픔, 고독 등과 어우러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다. 짧은 스토리 속에서 잔잔한 배경 묘사와 절제된 언어로 내면을 표현해내는 부분이 참 인상적이었다. 이건 정말 책을 읽어봐야지 안다. 짧지만 강렬한 여운을 남기는 소설을 보고 싶다면 '맡겨진 소녀'를 추천한다.
<이 리뷰는 다산책방으로부터 도서를 지원받아 솔직하게 작성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