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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니아 연대기
클라이브 스테이플즈 루이스 지음, 폴린 베인즈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시공주니어 / 2005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 전 합본밖에 읽지 않았습니다. 분권 세트는 안 읽어봤기에 분권과는 다소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등장인물
모두들 저마다의 개성을 가지고 나니아에 물들어가는, 혹은 처음부터 녹아 있는 그 모습에 무척 호감을 느꼈습니다. 게다가 캐릭터들이 대부분 진취적인 성격이라 읽는 내내 어떤 캐릭터의 우유부단함이나 주저함으로 짜증을 낼 일도 별로 없었구요. 주인공 아이들도 순수하고 착해서 사랑스러워요. 때문에 딱히 싫어하는 캐릭터는 없습니다. 하지만 악역으로 등장하는 인물들이 무조건 악하다고 할 수만은 없는 인물들인데 무조건 사악하게만 묘사하는 것에는 반감이 느껴지네요. 그것만 어느 정도 절제하면 좋았을텐데.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캐릭터는 에드먼드 페번시. 어렸을 땐 어느 정도 어딘가 어설픈 심술맞음이, 커서는 침착하고 사려 깊은 면이 제각각 마음에 들었습니다. 두 시절 다 나름대로의 매력이 있어요. 그렇지만 '사자와 옷장' 이후로는 다른 형제들에 비해 그다지 튀어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 조금은 아깝네요.
문체
어린이가 읽기 쉽도록 노력을 한 흔적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독자에게 직접 상상력을 불어넣어 주려는 그 친절한 어조가 마음에 들었습니다. 마치 '화롯가에서 무릎 위에 손자손녀를 않혀 놓고 이야기를 해 주는 할아버지' 같은 느낌을 주더군요. 저는 책을 보면서 그림을 그리듯이 인물과 주변 풍경을 상상하곤 하기에, 전반적으로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만… 배경 묘사와 인물의 성격 묘사는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인데 인물 묘사는 어째 그리 구체적이지 못한느낌이에요. (주인공 아이들 중에서는 외모가 가장 많이 언급되는 수잔도 기껏해야 '가족 중에서 가장 미인이다'라는 정도밖엔….) 이것 역시 어린아이들의 상상력을 배려해서 그런 것인지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흠으로 잡기 미묘한 부분이네요. 이쪽은 작가 자신의 재량과 의도에 달린 문제니까요. 여기에 대해서는 판단을 보류하겠습니다.
시점
전지적 작가 시점. 이 책 대부분의 등장인물이 아이들이나 동물들이니만큼 한 주인공에 중점을 두고 나니아의 세계를 구체적으로 서술하기란 어려운 일이겠지요. 적절한 선택이라고 봅니다.
플롯, 내적인 요소들에 대한 사건
'아슬란이라고 불리는 사자 모습의 창조주에 의해 나니아라는 나라에 소환된 아이들의 이야기'라고 줄거리를 압축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보는 내내 흥미로워요.오래 전 작품이라 전개가 다소 진부한 느낌은 있습니다만, '뻔히 예측 가능한데도 불구하고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희랍 신화에서 차용한 부분이 많아 익숙하고 알기 쉽기는 해도 신선하게 받아들이기는 어려운 세계관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흡입력이 높아요. 제가 느끼기에 가장 좋았던 점은 하나의 사건을 자질구레하고 지루하게 오래 끌지 않는다는 점이었어요. 중요한 사건도 길게 처리하는 편은 아닙니다만, 중요하지 않은 사건은 즉시 해결하고 넘깁니다. 군더더기 없는 빠른 진행이 시원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때문에 한 번 읽으면 한 부가 끝날 때까지 그 자리에서 다 읽을 수 있을 정도예요. 때문에 회고해보면 주인공들과 함께 긴 이야기를 쭉 거쳐왔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길다고 느껴지지 않아요. 거기에다 따로 따로 보면 개개로 분리할 수 있는 작품들이 거대한 하나로 이어지는 정밀한 자리 놓기, 루이스의 아름다운 상상력 등, 이렇듯 한 편의 동화로는 손색 없는 작품입니다만….
역시 성인의 눈으로 보면 이래저래 걸리는 점이 있을 수 있겠지요. 개인적으로 가장 마음에 걸렸던 부분은 '캐스피언 왕자'에서 등장했던 검은 난쟁이 니카브릭의 죽음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그와 그의 종족이 민족중심주의에 빠진 모습을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가 본질적으로 악한 인물이라고는 잘라 말할 수 없을 텐데 하얀 마녀의 세력 축에 영합하려고 했다는 이유로 꼭 그렇게까지 부정적으로만 묘사해야 했을까… 싶어서 좀 씁쓸했습니다. 두 번째로 아쉬운 것은 아슬란의 역할입니다. 동화로서는 아이들 스스로 난관을 해결하는 쪽이 바람직하겠습니다만, 아슬란은 나올 기회가 있을 때마다 어김없이 나타나서 홀로 모든 일을 해결하곤 홀연히 사라지더군요. 가면 갈수록 '왕 중의 왕', '창조주', '전지전능한 자'보다는 '조력자'나 '조커'에 가깝게 느껴지던데요. 이렇다 보니 몇 권 분량을 보다 보면 패턴이 보여서 흥미가 반감됩니다. 유감스러운 부분이에요.
이것 말고 작가의 기독교적 사상의 영향으로 인한 이분법적 선악대립의 측면이 강하다는 의견이 많던데, 이에 대해서는 동의합니다만, 무교인 저로서는 견해가 다른 부분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을 뿐이지 역력히 거부감을 느낄 정도는 아니었기 때문에 무난히 읽어내려갈 수 있었습니다. 오히려 그보다 방해가 된 건, 영국 문화를 이해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구절들이 가끔 있어서 고개를 갸웃거린 부분이 몇 개 있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면 사냥개 대회 등) 그렇지만 원래부터가 영국 어린이들을 위해 만들어진 작품이기 때문에 딱히 흠 잡고 싶은 부분은 아니네요.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깊이 신경쓰지 않으려고 노력하지만 않는다면 무난히 읽을 만해요. 기독교적이니 톨킨과 비교된다느니 하는 평론을 신경쓰면 이 작품을 제대로 감상할 수 없습니다. 이 작품은 어디까지나 동화이고, 동화는 동화로서 보는 게 가장 좋습니다. 그렇다고 동화로서 보기에는 몇몇 거슬리는 사상이 있어서 걱정스러운 면이 어느 정도 있긴 합니다만… 이 작품을 스스로 찾아보거나 누군가에게 선물할 정도의 연령대에 속한 사람이라면 뭘 받아들이고 뭘 걸러야 하는지는 스스로가 잘 알 거라고 생각해요.
책의 외적인 요소
책 상태는 훌륭합니다. 1059페이지에 달하는 분량인데도 불구하고 제본 상태가 잘 되어 있고, 보기만 해도 움찔할 만한 두께에 비해 가독성이 뛰어난 편입니다. 그래서 겉으로 보기엔 압박감이 느껴져도 막상 보고 나서 시계를 보면 생각보다 시간이 얼마 안 걸렸다는 점에 놀라게 되지요. 삽화가 생각보다 적었고 흑백이었다는 점이 조금 아쉽지만, 그러면 분량이 더 늘어나고 단가가 더 뛰겠지요? 어쩔 수 없지요. 책 자체 부록에 대해서는 만족. 다만 지도가 상상보다 작았다는 걸 제외하면. 단지 흠이라고 할 수 없는 흠이라면, 순수한 분량만도 "이걸 언제 다 봐!" 이런 소리가 나올 지경으로 많은데 양장본이라서 무겁기 그지없다는 점이지요. (현재 제 집에 있는 책들 중 사전류를 제외하면 가장 두꺼운 책이에요.) 휴대하고 다니기에는 무리가 따라요. 그렇지만 어차피 한 번 보게 되면 이야기가 끝날 때까지 빠져들게 되는 책이니까 휴일날 오후 집에 놓고 천천히 읽는 편이 좋지 않을까요?
총평
아쉬운 점이 약간씩 눈에 띄긴 하지만 훌륭한 작품임은 틀림없습니다. 판타지를 좋아하는 분이라면 꼭 한 번 읽어보시는 것이 좋을 겁니다. 재미 면에서도 국내 3류 양산작에 비할 바가 못 되요. 최근에 본 것들 중 '이 책을 위해 시간을 소비한 것이 결코 아깝지 않아.'라고 생각한 몇 안 되는 작품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