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인 밤 모호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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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읽지 않았디만 그저 키냐르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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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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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독서는 방황이다.” 책 서두에서 옮긴이는 키냐르의 떠도는 그림자들을 인용하며 난해한 그의 글에서 길 잃는 즐거움을 느낄 것을 제안한다. 나는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길을 잃는 기분이었다. 논증하지도 서로 유기되지도 않는, 파편적인 글 사이를 헤매며 몇 개의 문장 앞에서 잠시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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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문학 언어는 두려울 정도로 발가벗은 언어다. 언어의 알몸 상태를 로기노스는 숭고함이라고 불렀다._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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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냐르는 이성적인 결과물을 거부하는 것 같다. 철학도, 정신분석도 모두 거부한다. (철학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 위기를 겪었다.) 그는 프로토 등 수사학자들을 경유해 현대 사상이 버린 서양의 전통사색적 수사학박해받은 한 전통의 기록을 정리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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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앎은 인간의 무지가 되었고, 존재는 추정이 되었고, 세상은 인간의 제작으로 변한다. 인간에게는 앎이라는 사실 자체가 제 유한성의 흔적이다.(중략) 무지(ignorantia)는 두 배로 박학(docta)하다. 무지가 무지하다는 걸 알고, 무지가 꾸며 낸다는 걸 알기에 그렇다. 박학한 무지에 관한 소론 1(Liber primus2장의 자랑스러운 표현은 이것이다. “진실의 명확성에 다가갈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박학한 무지의 뿌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_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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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앎이란 그저 무지이며 유한성의 흔적일 뿐이다. 키냐르는 무지가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박학한 무지를 지향한다. 진실의 명확성에 다가갈 수 없기에 그가 지향한 것은 이미지 탐구의 천착이지 않을까. “안내하는 별도 없으니 언어의 부재하는 별을 단호히 따라가야 한다.”(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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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건 여러 세기를 가로지르며 시간의 바닥에서 쏘아 올린 유일한 화살을 눈으로 찾는 일이다._p.54

저자에게나 독자에게나 책이 다시 덮이는 순간, 어둠은 책을 펼치기 전보다, 혹은 책을 쓰기 전보다 틀림없이 더 어두워진다._p.129

스탕달은 글쓰기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찢어진 상처들을 바로잡는 데 몰두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책들은 그런 누전 사고들이 낳는 경이로운 불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_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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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이미지들. 언어의 부재하는 별을 따라감. 더 깊은 어둠. 불꽃들. 시간의 바닥에서 쏘아 올린 유일한 화살. 결국, 헤매는 것.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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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이너
임국영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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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국영, 『헤드라이너』, (창비)(2023)

<무대 밑에서>
* 저항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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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 루피. 죽고 사는 일보다 더 끔찍한 건, 쓸모를 잃고 버림받는 거야.]_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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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이너』의 인물들은 ‘헤드라이너’가 되지 못한, 못할 존재다.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에서 “쓸모를 잃고 버림받는” 존재들에 가깝다. 그 ‘쓸모없음’에는 ‘저항’에 대한 열망이 있다. “무슨 저항이라는 단어만 붙으면 사족을 못 쓰던 놈”처럼 ‘사보타주’, ‘볼셰비키’, ‘우드스톡’ 등 과거의 기표를 끌고 온다. 하지만 ‘저항’도 보편적인 인정을 받아야 ‘저항’이 될 수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제대로 된 무대에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 이름만 거창할 뿐 그들의 저항은 ‘신화’가 될 수도, ‘폭거’가 될 수도 없다. 저항에도 쓸모와 쓸모없음의 논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 개인적인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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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 개인적인 신화는 그럴듯한 숭배 대상도 메시지도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마치 한번 죽고 다시 태어난 듯한 감각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남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을 테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어난 일에 감사했다._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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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항 자체가 결국 강력한 자본의 포섭력 앞에서 무너지는 것 아닐까 생각된다. 페스티벌이 록과는 관계없는 부스들이 늘어나고 “사각의 장소”였던 ‘BAR-K’가 손님들이 늘어난 것처럼 저항의 기표들은 자본의 논리를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이고 미미한 저항이 아닐까?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저항은 자본의 관심조차 받지 못할 정도다. 자본의 방심을 틈타 공격하는 것은 그렇게 “개인적인 신화”가 가진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

* 소설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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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컴, 이지 고.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항복의 말을 외쳤다. 제 소설을, 소설 같은 걸 누가 보겠습니까. 진심입니다._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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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도 이처럼 미미한 저항이 아닐까 생각했다. 공원의 시스템을 폭로하면서 상급자들 앞에서 소설의 무의미함을 피력하고(「비둘기, 공원의 비둘기」,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면서(「태의 열매」) 오히려 아버지와 신격화하고 “성장과 무관한 성장소설”을 만들기도 한다.(「악당에 관하여」) 소설은 개인적인 저항의 이야기에 주목하면서 메타적인 저항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토바이의 묘’에 처박힐 수도 있겠지만.

소설을 읽으며 인물들의 행동과 말에서 폭력성과 남성성에 거부감이 들었다. 앞서 인물들의 미미한 저항이 갖는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저항의 이면 또한 존재한다. 작가는 이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기존 저항의 기표가 가진 남성성과 폭력성에 대한 반성을 보여주고자 한 것 아닐까?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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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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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비극』(을유문화사)(2023)

<비극적인 삶과 거짓말의 존중>
* 비극의 죽음
조지 스타이너는 『비극의 죽음』에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정한 비극적인 정신은 근대적인 것의 탄생과 함께 소멸했다고 본다. 이글턴은 스타이너와 같이 비극의 죽음을 선언한 이들에게 단순히 비극은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비극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스타이너의 비극은 엘리트주의적이고, 영적이고, 절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고, 보편적이고, 운명의 문제다. 하지만 이글턴은 이런 정의가 “꽁꽁 싸인 채 고통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한다. 또 그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와 부조리를 비극으로 보는 듯하다.
* 부조리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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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매케이브가 근친상간에 내포된 “정체성의 상실 또는 불확실성”과 관련하여 말하듯이 “전통적인 친족 어휘의 혼란은 바벨로의 퇴행, 이해할 수 있는 가치들의 혼란을 수반한다.” 롤랑 바르트는 근친상간을 “어휘의 놀라움”이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근대의 고전적인 절제된 표현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하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는 서로 적대자일 뿐 아니라 거울 이미지기도 하다._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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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부조리란 무엇일까? 『오이디푸스』의 근친상간(아들이자 남편, 어머니이자 아내)과 산술(세 갈림길에서 라이오스를 살해한 이는 몇 명인가)의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에 둘이 들어가 있는 문제”다. 또 “인간 행동의 원천은 다양하고 모호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은 어디까지이며, 우리의 고통은 어떻게 파생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비극은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멀게 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더 큰 존재가 되는 데 성공한다.”
*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비극과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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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기반 없는 인간 실존의 본질이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장소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자신이 놓인 세계―자기 발 밑에 굳은 땅이 있다고 가정하는 세계―보다 더, 또 동시에 덜 현실적이다._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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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결국 허구의 이야기일 텐데, 우리가 사는 세계 또한 진실한 것은 아니다. “연극은”, 테리 이글턴은 말한다(이 책의 인용문은 꼭 이렇게 끊긴다), “환각 제곱”으로서 “허위의식”의 “본질에 관해 사유할 수 있다.” “환상은 현실의 대안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생각하는 틀 자체다.”
나는 앞서 언급된 『오이디푸스』의 스핑크스를 마주한 오이디푸스를 떠올렸다. 스핑크스는 인간의 머리를 했지만 여러 동물을 합쳐놓은 듯한 기괴한 모습이다. 인간을 닮았지만 괴물인 스핑크스를 마주한 오이디푸스가, 인간의 삶을 닮았지만 허구인 비극을 보는 관객의 모습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관객은 비극의 수수께끼에서 현실의 수수께끼를 발견하는 것일까?
* 비극의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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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경우 모두 고난과 영웅적 저항을 통해서만 어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힘들의 물러서지 않는 현존을 느끼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그것과 정신적으로 동등하거나 심지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의 형식적 구조에서도 그렇듯이, 속박이나 필연은 자유의 근거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_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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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은 비극을 통해 인간이 부조리에 뛰어드는 것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카뮈와 여러 작가가 생각난다) 모든 인간은 부조리를 겪으며 살 수밖에 없는데, 그는 기존의 논의가 비극의 범위와 다양성을 축소해 “위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글턴이 그렇게 비극의 죽음을 부정하고 비극에 관한 논의를 재정립한 이유가 결국 고통받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통이 위로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비극은 고통받는 인간을 존중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비극이 굉장히 현실적인 (아폴론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느꼈다. 부조리에 맞선 체념을 인정하고도 존중하는 문학.
비극이 읽고 싶다고, 늦게나마 생각했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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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센디어리스
권오경 지음, 김지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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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오경, 『인센디어리스』(문학과지성사)(2023)

<믿음에 대하여>

믿음은 어떻게 시작하고 어떻게 끝날까.
불신에서 광신까지, 우리는 믿음의 스펙트럼에서 어떻게 이동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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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생각했어요. 윌을 만나기 전까지 나는 떠돌아다녔으니까요. 그가 나를 이 땅에 붙들어줬어요. 밤새도록 내게 붙어서._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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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윌’과 그의 연인인 ‘피비’, 그리고 종교 집단 ‘제자(弟子)’의 창시자 ‘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한국계 이민자인 피비는 어릴 적 자신이 운전하던 차에서 엄마가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난 후 죄책감을 안고 살아간다. 그러던 중 한 파티에서 대학생인 윌을 만나고 사랑에 빠진다. 방황하던 피비는 윌을 만나고 이 땅에 정착한 느낌을 받는다. 윌은 피비에게 연인으로서의 믿음을 넘어 미국이라는 땅에 대한 믿음을 준 것이다. 그녀의 방황에는 디아스포라로서의 외로움, 가족에서의 외로움 등이 교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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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하나님께 하는 기도라고는 한 가지뿐이었어요. 주님, 저 아파요. 하지만 이제는 나도 쓸모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하나님의 뜻은 곧 내게 내려진 은총이고, 나는 그것을 기뻐하겠어요. 믿음으로 행동한다면 두려워할 필요가 없어요._p.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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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언제부턴가 그녀는 믿음의 방향을 바꾼다. 피비는 존을 만나고 하나님을 만난다. 그녀는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서 말하는 사람으로 바뀌었다. 윌은 종교 모임에서 그녀에게서 듣지 못했던 과거 이야기를 듣는다. 더 이상 윌은 피비를 그곳에 정착시킨 사람이 아니었다. 믿음을 향한 그녀의 절실함은 고통을 뿌리로 한다. 사람은 무엇을(누구를) 어떻게 믿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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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너는 내가 이해하려고 노력조차 하지 않는다고 했지. 그래서 지금 난 노력하고 있어, 이렇게._p.12
하지만 네가 지금 그대로 지옥에서 살게 해줘야겠더라고. 누군가가 지옥에 박혀 있기르 ㄹ바라는 건 처음이야._p.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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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전반적으로 윌의 시점에서 전개되지만, 독자는 점점 피비에게로 고개를 향하게 된다. 윌은 그다지 좋은 사람이지 못했다. 그런데도 윌과 함께, 윌을 통해 피비를 상상할 뿐이다. 그것은 윌에게 지옥이다.

작가는 아시아인(사람, 커뮤니티 등), 여성, 성소수자, 낙태권 등을 이야기에 올려놓는다. 특히 현재 미국 사회의 최대 쟁점이 된(물론 한국에서도 꾸준히 제기된) 낙태권에 관한 서사가 눈에 띈다. 존이 창립한 종교 집단 ‘제자(弟子)’는 태아의 생명권을 중시하면서 임신중절수술을 시행하는 병원을 테러해 소녀 다섯 명을 죽이는 위선을 보여준다. 이 또한 인간의 믿음이 낳는 아이러니다.

『인센디어리스』는 인간 내부에서 발생하는 믿음을 천착한다. 윌이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았음에 알 수 없는 공허감을 느꼈던 것은 신(神)의 유무와 관계없이 믿음(信)이 인간에게 필수적이기 때문 아닐까.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책을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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