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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 예술 과학 철학, 그리고 인간
케네스 클라크 지음, 이연식 옮김 / 소요서가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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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네스 클라크. 『문명』.이연식 역. 소요서가, 2024.

저자 케네스 클라크는 문명이란 무엇인지 처음부터 명확히 정의하지 않는다. 단지 존 러스킨의 말을 인용한다.

“위대한 민족은 자신의 역사를 세 가지 책으로 보여준다. 즉 행동의 책, 언어의 책, 예술의 책에 담아 보여준다. 각각의 책은 다른 두 권의 책을 읽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다. 그러나세 권의 책 가운데 가장 신뢰할 수 있는 것은 마지막 책이다.”_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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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크는 그의 말에 동의하면서도 문명의 역사가 예술의 역사와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그럼에도 예술을 통해 문명의 진보를 살펴보고자 한다(예술이 사회를 대변한다고 보지는 않는다. 그는 천재를 믿는다). 가령 역사가들은 정치사적인 관점에서 10세기를 야만의 시대라고 보는데, 클라크는 이에 대해 반대한다. 바로 당시 예술의 생산량이 어마어마했기 때문이다.

“로타르나 대머리왕 샤를 같은 군주와 귀족 후원자들은 보석 박힌 표지를 갖춘 사본을 여럿 주문해 선물로 다른 군주나 유력한 성직자들에게 보냈습니다. 이런 아름다운 물건이 설득 수단으로 존중받았던 시대가 완전히 야만스러웠을 리 없습니다.”_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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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클라크는 예술과 과학, 철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며 서구 유럽의 문명이 어떻게 진보했는지 쉽게 이야기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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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케네스 클라크의 관점은 오늘날 서구 유럽 중심적, 남성 중심적, 엘리트 중심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다른 언어는 알지 못하기에 서구 유럽을 문명으로 한정 짓고

그렇다고 그의 저술을 완전히 무시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클라크의 시각에서 문명사가 정리되며 이에 대한 비판이 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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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상적인 내용

“이 대목이 르네상스 문명의 약점을 보여줍니다. 이만큼 노골적이지는 않지만, 또 한 가지 약점은 르네상스 문명이 소수의 사람들에게 의존했다는 점입니다. 공화국 시절 피렌체에서도 르네상스는 비교적 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영향을 기쳤고, 우르비노와 만토바와 같은 곳에서는 대부분 궁정에 국한되어 있었습니다.”_p.115

“에라스뮈스는 베네치아의 유명한 인쇄업자로서 정교한 보급판 서적 출판의 개척자인 알두스 마누티우스를 통해 자신의 저작을 출판하는 데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앞 장에서는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인간 정신이 전개된 양상을 살펴보았지만, 이번 장에서는 언어가 인간 정신을 확산시킨 양상을 주로 다루려 합니다. 인쇄술의 발명이 이를 가능케 했습니다.”_p.205

(각각의 정신적인 진보를 살펴보는 데 있어 매체의 변화를 지적한다는 점이 흥미롭다. 그렇다면 미래에 오늘날을 바라볼 때 우리의 지적 활동을 살펴볼 수 있는 주요 매체는 무엇일까. 그나저나 알두스 마누티우스를 다룬 책이 있던데 이것도 보고 싶어졌다.)

“모든 종류의 인간과 그들이 놓인 온갖 상황에 연민을 품으며 인간의 다양성에 대해 관대하다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것처럼 문명화된 삶의 특질이라면 렘브란트는 문명에 대한 위대한 예언자의 한 사람이었습니다,”_p.274

“자산이 풍족하다는 건 문명에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참으로 희한하게도 거대한 부는 오히려 해가 됩니다. 결국 호화로움은 인간성을 해치는 것이며 어떤 면에서는 규제할 줄 아는 센스가 이른바 좋은 취향의 필요조건인 것 같습니다.”_p.337

“온전한 몰입. 이것이 바로 자연에 대한 사랑이 이토록 오랫동안 종교로 받아들여져 왔던 궁극적인 이유입니다. 그것은 인간이 온전한 세상 속에서 정체성을 잃고 더욱 강렬한 존재의식을 획득하는 수단인 것입니다.”_p.389

“현대의 가장 예민한 지식인들이 부인하는 여러 믿음을 나는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 나는 질서가 무질서보다 좋고 창조가 파괴보다 좋다고 믿습니다. 나는 폭력이 아니라 온건함을, 복수가 아니라 관용을 좋아합니다. 또한 나는 대체로 지식이 무지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이념보다 인간적인 연민이 더 가치가 있다고 믿습니다. 최근 과학은 눈부시게 발전했지만 과거 2천 년 동안 인간에게는 그다지 큰 변화는 없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여전히 역사에서 배우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믿음입니다.”_p.467

(출판사로부터 책을 무료로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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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인 밤 모호
파스칼 키냐르 지음, 류재화 옮김 / 난다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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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읽지 않았디만 그저 키냐르를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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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파스칼 키냐르 지음, 백선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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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칼 키냐르, 파스칼 키냐르의 수사학

 

독서는 방황이다.” 책 서두에서 옮긴이는 키냐르의 떠도는 그림자들을 인용하며 난해한 그의 글에서 길 잃는 즐거움을 느낄 것을 제안한다. 나는 책장을 넘기면 넘길수록 길을 잃는 기분이었다. 논증하지도 서로 유기되지도 않는, 파편적인 글 사이를 헤매며 몇 개의 문장 앞에서 잠시 서성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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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문학 언어는 두려울 정도로 발가벗은 언어다. 언어의 알몸 상태를 로기노스는 숭고함이라고 불렀다._p.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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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냐르는 이성적인 결과물을 거부하는 것 같다. 철학도, 정신분석도 모두 거부한다. (철학은 이미 제1차 세계대전에 위기를 겪었다.) 그는 프로토 등 수사학자들을 경유해 현대 사상이 버린 서양의 전통사색적 수사학박해받은 한 전통의 기록을 정리하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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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모든 앎은 인간의 무지가 되었고, 존재는 추정이 되었고, 세상은 인간의 제작으로 변한다. 인간에게는 앎이라는 사실 자체가 제 유한성의 흔적이다.(중략) 무지(ignorantia)는 두 배로 박학(docta)하다. 무지가 무지하다는 걸 알고, 무지가 꾸며 낸다는 걸 알기에 그렇다. 박학한 무지에 관한 소론 1(Liber primus2장의 자랑스러운 표현은 이것이다. “진실의 명확성에 다가갈 수 없는 가운데 나는 박학한 무지의 뿌리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_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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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앎이란 그저 무지이며 유한성의 흔적일 뿐이다. 키냐르는 무지가 무지하다는 것을 아는 박학한 무지를 지향한다. 진실의 명확성에 다가갈 수 없기에 그가 지향한 것은 이미지 탐구의 천착이지 않을까. “안내하는 별도 없으니 언어의 부재하는 별을 단호히 따라가야 한다.”(p.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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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다는 건 여러 세기를 가로지르며 시간의 바닥에서 쏘아 올린 유일한 화살을 눈으로 찾는 일이다._p.54

저자에게나 독자에게나 책이 다시 덮이는 순간, 어둠은 책을 펼치기 전보다, 혹은 책을 쓰기 전보다 틀림없이 더 어두워진다._p.129

스탕달은 글쓰기가 시간과 공간 속에서 찢어진 상처들을 바로잡는 데 몰두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책들은 그런 누전 사고들이 낳는 경이로운 불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_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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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이미지들. 언어의 부재하는 별을 따라감. 더 깊은 어둠. 불꽃들. 시간의 바닥에서 쏘아 올린 유일한 화살. 결국, 헤매는 것.

 

(본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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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이너
임국영 지음 / 창비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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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국영, 『헤드라이너』, (창비)(2023)

<무대 밑에서>
* 저항의 쓸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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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들어 루피. 죽고 사는 일보다 더 끔찍한 건, 쓸모를 잃고 버림받는 거야.]_p.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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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드라이너』의 인물들은 ‘헤드라이너’가 되지 못한, 못할 존재다. 오히려 자본주의 세계에서 “쓸모를 잃고 버림받는” 존재들에 가깝다. 그 ‘쓸모없음’에는 ‘저항’에 대한 열망이 있다. “무슨 저항이라는 단어만 붙으면 사족을 못 쓰던 놈”처럼 ‘사보타주’, ‘볼셰비키’, ‘우드스톡’ 등 과거의 기표를 끌고 온다. 하지만 ‘저항’도 보편적인 인정을 받아야 ‘저항’이 될 수 있다. 작품 속 인물들은 제대로 된 무대에 가까이 가지도 못한다. 이름만 거창할 뿐 그들의 저항은 ‘신화’가 될 수도, ‘폭거’가 될 수도 없다. 저항에도 쓸모와 쓸모없음의 논리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 개인적인 신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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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의 개인적인 신화는 그럴듯한 숭배 대상도 메시지도 없었다. 그러나 무슨 의미인지는 몰라도 이해할 수 있는 말이 존재하는 것처럼 존은 무엇인가를 깨달았다. 마치 한번 죽고 다시 태어난 듯한 감각이었다. 그게 어떤 의미인지 남은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도 설명할 수 없을 테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태어난 일에 감사했다._p.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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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저항 자체가 결국 강력한 자본의 포섭력 앞에서 무너지는 것 아닐까 생각된다. 페스티벌이 록과는 관계없는 부스들이 늘어나고 “사각의 장소”였던 ‘BAR-K’가 손님들이 늘어난 것처럼 저항의 기표들은 자본의 논리를 따르게 된다. 그렇다면 진정한 신화가 될 수 있는 것은 일시적이고 미미한 저항이 아닐까? 무의미하고 쓸모없는 저항은 자본의 관심조차 받지 못할 정도다. 자본의 방심을 틈타 공격하는 것은 그렇게 “개인적인 신화”가 가진 가능성일지도 모르겠다.

* 소설 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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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 컴, 이지 고.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항복의 말을 외쳤다. 제 소설을, 소설 같은 걸 누가 보겠습니까. 진심입니다._p.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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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소설도 이처럼 미미한 저항이 아닐까 생각했다. 공원의 시스템을 폭로하면서 상급자들 앞에서 소설의 무의미함을 피력하고(「비둘기, 공원의 비둘기」,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를 죽이지 못하면서(「태의 열매」) 오히려 아버지와 신격화하고 “성장과 무관한 성장소설”을 만들기도 한다.(「악당에 관하여」) 소설은 개인적인 저항의 이야기에 주목하면서 메타적인 저항을 수행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토바이의 묘’에 처박힐 수도 있겠지만.

소설을 읽으며 인물들의 행동과 말에서 폭력성과 남성성에 거부감이 들었다. 앞서 인물들의 미미한 저항이 갖는 가능성을 이야기했지만, 한편으로는 저항의 이면 또한 존재한다. 작가는 이를 사실적으로 그리면서 기존 저항의 기표가 가진 남성성과 폭력성에 대한 반성을 보여주고자 한 것 아닐까?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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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
테리 이글턴 지음, 정영목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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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 『비극』(을유문화사)(2023)

<비극적인 삶과 거짓말의 존중>
* 비극의 죽음
조지 스타이너는 『비극의 죽음』에서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진정한 비극적인 정신은 근대적인 것의 탄생과 함께 소멸했다고 본다. 이글턴은 스타이너와 같이 비극의 죽음을 선언한 이들에게 단순히 비극은 죽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다면 비극은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스타이너의 비극은 엘리트주의적이고, 영적이고, 절대적이고, 돌이킬 수 없고, 보편적이고, 운명의 문제다. 하지만 이글턴은 이런 정의가 “꽁꽁 싸인 채 고통으로부터 격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라고 지적한다. 또 그는 인간의 실존적인 문제와 부조리를 비극으로 보는 듯하다.
* 부조리의 극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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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매케이브가 근친상간에 내포된 “정체성의 상실 또는 불확실성”과 관련하여 말하듯이 “전통적인 친족 어휘의 혼란은 바벨로의 퇴행, 이해할 수 있는 가치들의 혼란을 수반한다.” 롤랑 바르트는 근친상간을 “어휘의 놀라움”이라고 묘사하는데, 이는 근대의 고전적인 절제된 표현 가운데 하나로 꼽을 만하다. (중략) 이런 의미에서 오이디푸스와 스핑크스는 서로 적대자일 뿐 아니라 거울 이미지기도 하다._p.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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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그 부조리란 무엇일까? 『오이디푸스』의 근친상간(아들이자 남편, 어머니이자 아내)과 산술(세 갈림길에서 라이오스를 살해한 이는 몇 명인가)의 문제에서 알 수 있듯이 “하나에 둘이 들어가 있는 문제”다. 또 “인간 행동의 원천은 다양하고 모호하다.” 그렇다면 우리의 행동은 어디까지이며, 우리의 고통은 어떻게 파생된 것인지 알 수 없다. 비극은 오이디푸스가 스스로 눈을 멀게 한다. 아무것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그는 “더 큰 존재가 되는 데 성공한다.”
* 스핑크스와 오이디푸스, 비극과 관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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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은 기반 없는 인간 실존의 본질이 자기 자신과 대면할 수 있는 장소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은 자신이 놓인 세계―자기 발 밑에 굳은 땅이 있다고 가정하는 세계―보다 더, 또 동시에 덜 현실적이다._p.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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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은 결국 허구의 이야기일 텐데, 우리가 사는 세계 또한 진실한 것은 아니다. “연극은”, 테리 이글턴은 말한다(이 책의 인용문은 꼭 이렇게 끊긴다), “환각 제곱”으로서 “허위의식”의 “본질에 관해 사유할 수 있다.” “환상은 현실의 대안이 아니라 우리가 현실을 생각하는 틀 자체다.”
나는 앞서 언급된 『오이디푸스』의 스핑크스를 마주한 오이디푸스를 떠올렸다. 스핑크스는 인간의 머리를 했지만 여러 동물을 합쳐놓은 듯한 기괴한 모습이다. 인간을 닮았지만 괴물인 스핑크스를 마주한 오이디푸스가, 인간의 삶을 닮았지만 허구인 비극을 보는 관객의 모습과도 같다고 생각했다. 관객은 비극의 수수께끼에서 현실의 수수께끼를 발견하는 것일까?
* 비극의 존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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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경우 모두 고난과 영웅적 저항을 통해서만 어떤 인정사정 봐주지 않는 힘들의 물러서지 않는 현존을 느끼면서, 동시에 우리 자신이 그것과 정신적으로 동등하거나 심지어 우위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런 의미에서, 예술 작품의 형식적 구조에서도 그렇듯이, 속박이나 필연은 자유의 근거이지 그 반대가 아니다._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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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리 이글턴은 비극을 통해 인간이 부조리에 뛰어드는 것에서 자유를 느낄 수 있음을 알 수 있다고 말한다.(카뮈와 여러 작가가 생각난다) 모든 인간은 부조리를 겪으며 살 수밖에 없는데, 그는 기존의 논의가 비극의 범위와 다양성을 축소해 “위로할 수 없는 사람들을 마땅히 그래야 할 만큼 존중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글턴이 그렇게 비극의 죽음을 부정하고 비극에 관한 논의를 재정립한 이유가 결국 고통받는 사람 때문이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고통이 위로 불가능한 것일지라도 비극은 고통받는 인간을 존중한다. 책을 읽으며 나는 비극이 굉장히 현실적인 (아폴론적이라는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고 느꼈다. 부조리에 맞선 체념을 인정하고도 존중하는 문학.
비극이 읽고 싶다고, 늦게나마 생각했다.

(본 게시물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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