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 명작동화 속에 숨어 있는 반전의 세계사
박신영 지음 / 바틀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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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가 7살이 되면서 명작동화나 전래동화도 읽어주기 시작했는데, 지금 보면 어이없는 내용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엊그제 읽어준 방귀대장 며느리 이야기는 이랬다.

옛날 옛날 한 마을에 어떤 근면 성실하고 착한 처녀가 살고 있었는데, 유일한 흠이 방귀를 너무 격하게 뀌는 것이었다. 그랬던 처녀는 시집 못 가면 어쩌나 하는 부모님의 걱정에도 불구, 어찌어찌 연이 닿아 시집을 가게 되었고, 시부모를 잘 모시고 남편을 잘 보필하고 집안일을 열심히 하며 잘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며느리는 식구들이 모두 집을 비운 틈을 타서 시원하게 방귀를 뀌었는데 마침 외출에서 돌아오던 시부모와 남편이 그 광경을 보았다. 남편은 놀라서 그대로 줄행랑치고 시부모는 친정으로 돌아가라며 며느리를 소박 맞혔다. 그렇게 소박 맞고 훌쩍훌쩍 우는 며느리를 친정으로 데려다주던 시아버지는 어떤 높은 나무에 달린 열매를 보며 맛있겠다 라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은 며느리는 시아버지를 위해 나무에 가서 방귀를 뀌어서 열매를 떨어뜨렸다. 열매를 맛있게 먹은 시아버지는 그 마음에 감동하여 며느리를 다시 집으로 데리고 돌아갔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는 내용이다. 방귀 좀 시끄럽게 뀐다고(물론 나무에 달린 열매를 방귀로 떨어뜨릴 정도면 무슨 손오공의 에네르기파 수준인 것 같긴 하지만) ‘소박’ 맞히는 것도 어이없지만 그랬다가 자기 먹고 싶은 거 갖다 줬다고 다시 집으로 데려가는 것은 더 황당하다. 물론 부인이 고작 방귀 한 번 뀌었다고 놀라서 내뺀 다음 돌아오지 않는 남편이란 작자가 가장 어처구니없지만. 다 읽고 난 다음 대체 무슨 이 따위 이야기가 있어? 하고 바로 치워버렸다. 그렇다고 이 이야기를 오늘날의 기준으로 PC하니 아니니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어디까지나 ‘전래’ 동화이므로. 이런 이상한 이야기가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사실 이 방귀 뀌다 소박맞은 며느리의 이야기는, 그만큼 처지가 불안정했던 과거 여성의 지위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며느리라는 지위는 아무리 근면 성실하게 시부모와 남편을 모신다고 한들, ‘가족’의 일원으로 편입되는 것이 아니라 시부모의 한마디에 언제든 ‘반품’될 수 있는 운명이었던 것이다. ‘소박’이라는 말이 존재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또한 말 한마디 없이 그대로 내빼는 남편의 모습은 부모의 의견에 어떠한 반박도 비판도 할 수 없었던 당대의 부모 자식 관계를 유추하게 만든다. 직업이나 배우자 선택 등의 인생의 진로에 있어서 자유의사가 별로 없었으니 책임감 있는 인생을 살기도 어려웠을 것이고,

이처럼 전래동화나 명작동화 등 오랜 세월 구전되어 내려온 이야기들에는 알게 모르게 당대의 사회상이 담겨 있다. 물론 이야기가 전하고자 했던, 소박맞아도 끝까지 시부모에게 효심을 다하면 복이 온다 or 아무리 하찮고 쓸모없어 보이는 재주라도 다 쓸데가 있다, 등의 교훈은 오늘날에는 더 이상 유효하지 않으므로 이야기 속에 담긴 주제를 그대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동화 자체를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해석해서 비판하고 사고하는 것은 매우 유의미한 과정이 될 수 있다.

박신영 작가의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는 이와 같은 의문에서 출발한 책이다. 명작 동화의 이면에 숨어 있는 역사적 배경을 파악하고, 그런 이야기가 구전되어 올 수 있었던 사회적 맥락을 오늘날의 시각으로 재해석한다. 표제가 된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 챕터는 말 그대로 왜 그렇게 옛날 동화에는 백마 탄 왕자들이 넘쳐났는지에 대한 역사적 설명이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백설공주에서 독사과를 먹고 잠들었던 공주를 발견한 왕자라든가, 잠자는 숲 속의 공주에서 물레 바늘에 찔려 길고 긴 잠에 빠진 공주를 발견한 왕자들, 지금 생각해보니 다 어디서 갑툭튀했나 싶다.

알고 보니 중세시대에는 장자에게 왕위며 재산이며 모든 것을 몰빵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그렇게 되면 자연스레 둘째 왕자나 셋째 왕자는 먹고살 길이 막막해지게 되고, 그럴 때 살아남을 수 있는 방안은 보통 세 가지였다고 한다. 성직자가 되거나, 혹은 전쟁에서 공을 세워 영주가 되거나, 마지막으로 이웃 나라의 공주와 결혼을 하여 그 나라의 왕이 되거나. 아들이 없는 국가의 경우 보통 공주의 남편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므로 자기 나라에서 먹고살 길이 없었던 둘째 셋째 왕자들은 말을 타고 여기저기 떠돌며 신부감을 찾아다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동화에 나오는 왕자들, “그들은 정의감이 넘쳐서 용과 마법사를 무찌르러 다니는 낭만적인 모험가들이 아니었다. 편력기사 생활을 하며 일거리와 부자 처갓집을 찾고 있는 떠돌이들이었”(19쪽) 던 것이다.

이 이야기를 알게 되면 더 이상 자신을 구원해줄 멋지고 부유한 남성을 기다리는 여성에게 “백마 탄 왕자님 기다리느냐”며 조롱조로 시전되곤 하던 물음은 유효하지 않게 된다. 실상 백마 탄 왕자는 구원자가 아니었으며 여성이야말로 왕자에게 있어 구원자가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젯밤 아이와 함께 읽었던 백설공주에 나온 왕자는 죽어서 누워있는 백설공주를 보며 시체라도 상관없다며 데려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그 진의를 매우 의심하게 된다. 공주의 시체를 공주 아빠한테 가지고 가서 무슨 보상이라도 바란 것이 아니었는지 하면서. 사실 상식적으로도 말이 안 되는 이야기 아닌가. 죽어도 상관없으니 데려가겠다니.

책은 이 외에도 <빨간 모자>, <피리 부는 사나이>, <빨간 머리 앤>, <빨간 구두> 등 우리에게 친숙한 동화부터 <로빈 후드>, <베니스의 상인>, <노트르담의 꼽추>, <돈 키호테>, <드라큘라> 등 동화를 넘어 고전 명작의 반열에 속한다고 할 수 있는 유명한 이야기들을 통해 역사적 사건들을 의미 있게 풀어낸다. 개인적으로 역사책을 그다지 좋아하진 않는 편이지만, 어린 시절 열심히 읽었던 동화들을 다시 만나는 기쁨에 유머감각과 스토리텔링 능력이 탁월한 문장들이 더해져 아주 즐겁고 유쾌하게 읽었다.

주제별로 나뉘는 에피소드 형식이라 역사서임에도 부담스럽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이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 책이지만, 다음의 독자에게는 더욱 흥미롭게 다가올 듯하다.

1.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 : 역사적 배경과 동화가 연결되는 것을 보며 감탄하게 됨.
2. 어린 시절 명작동화를 재미있게 읽었던 사람 : 명작동화를 오늘날의 시선으로 다시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
3. 중학생 이하의 자녀를 키우는 부모님들 : 아이에게 유명한 동화를 읽어주며 알쓸신잡의 지식을 뽐낼 수 있음.
4. (중,고,대)학생들 : 권장도서인 동화와 명작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비판적 시각을 배울 수 있음. 역사공부는 덤.

딱 한 가지 아쉬운 부분은 “백마 탄 왕자들은 왜 그렇게 떠돌아다닐까”는 책 제목이다. 물론 흥미로운 물음이지만, 이 책이 다루는 진지한 주제의식과 역사와 문학에 대한 깊은 내공을 제목이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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