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들의 당나귀 귀 - 페미니스트를 위한 대중문화 실전 가이드 을들의 당나귀 귀 1
손희정 외 지음, 한국여성노동자회 외 기획 / 후마니타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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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치는 아니었지만 달리기는 유난히 약한 종목이었다. 학창 시절 100미터 기록이 19초인가 그랬고, 오래 달리기 또한 잘 못했다. 1500미터 경주하면 끝까지 뛰는 것도 힘들었다. 아마 체력이 약했던 것이겠지. 그런데 중학생 때, 체육 시간에 이열 종대로 다 같이 오래 달리기 훈련을 하던 시기에, 갑자기 체육교사가 나를 그룹의 가장 선두에 세웠다. 선생님은 말했다. “잘 뛰는 애들이 앞에서 이끌어줘야 해.” 엥??? 나는 무척 당황했다. 나머지 한 명은 평소에도 워낙 잘 뛰던 친구였지만 나는 아닌데? 잘 못 뛰는데?

어쨌든 ‘거부’할 수는 없었기 때문에 그때부터 선두에 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죽기 살기로 뛰었다. 옆에 있는 잘 뛰는 친구에게 맞추기도 해야 하고, 지치거나 쳐지면 뒤에서 달리는 아이들에게 영향이 가는 데다가, 다 떠나서 앞에서 뛰는데 못 뛰면 ‘쪽팔리기’ 때문에. 자연히 달리기 훈련이 되었고 나중에 기록을 잴 때는 평소보다 훨씬 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자의에 의한 것도 아니었고, 미치도록 힘들었으며, 여전히 선생님이 왜 나를 선두에 세웠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에게 있어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것을 어렴풋이 깨닫게 해 준 경험이었다. 앞에 서보는 게 이렇게 중요하구나, 그런 경험들이 사람을 바꿀 수 있구나.

한 번이라도 반장이나 부반장 같은 ‘대표’를 맡아본 경험이 있으면 계속해서 같은 역할을 하게 되는 것 역시 같은 이치이다. 리더십은 타고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길러진다. 반장이라는 역할은 그룹을 대표하고, 의견을 조율하고, 많은 인원을 통솔하는 경험을 하게 해 주며 이런 과정에서 자신감, 협상능력, 카리스마를 향상시킨다. 그리고 이렇게 길러진 능력은 조금씩 더 많은 기회를 제공한다. 훗날 이런 경험을 반복적으로 한 아이와 그렇지 못한 아이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벌어지는 이유이다. 결국 자리가 자리를 만들고, 자리가 사람을 만드는 셈이다.

몇 년 전 ‘알쓸신잡’이 처음 방영을 시작했을 당시, 왜 출연진이 죄다 남성이냐는 볼멘 목소리가 나왔던 적이 있다. 그러면서 왜 지식인은 죄다 남성인지, 왜 예능프로의 멤버도 모두 다 남성 일색이냐는 비판도 나왔다. 이에 대해 사람들은 말했다. 여자들은 재미가 없잖아. 여자들 중에 유재석만큼 진행 잘하는 사람 있어? 정형돈만큼 재치 있는 사람 있어? 강호동만큼 카리스마 있는 사람 있어? 무한걸스 같은 거 만들어줬는데 재미없잖아. 망했잖아. 사람들이 안 보고 안 찾는 걸 어쩌라고. 여자들 중에 재미있게 썰 푸는 똑똑하고 호감 가는 지식인이 있어? 있으면 데려와 봐. 인물이 없는걸 우리더러 어떡하란 말야.

원칙적으로는 맞는 말이다. 예능이건, 코미디이건, 연기이건, 지식이건, 기본적으로는 남성들이 더 우세한 경우가 많다. 남성 연예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다양한 캐릭터, 웃음에 대한 예민한 감각, 몸을 사리지 않는 투혼을 여성들에게서는 발견하기 어렵다는 말에도 동의한다. 여성들 중에 ‘대중성’을 지닌 지식인이 쉽게 떠오르지 않는 것도 맞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들에게 한 번 묻고 싶다. ‘왜’ 여성들이 남성보다 재미가 없는지, ‘왜’ 여성 지식인 중에 남성만큼 눈에 띄는 사람이 없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느냐고 말이다.

문제는 기회다. 일단 여성들에게는 남성만큼 충분한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경험이 없으니 미숙할 수밖에 없고 그러다 보면 실수를 하게 된다. 게다가 어렵게 주어진 기회에서 단 한 번이라도 실수를 해선 안 된다. 그러다 보니 긴장을 하고 긴장을 하다 보니 다시 실수 연발. 결국 망하고 만다. 그런 지점은 남성 역시 마찬가지라고 항변할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다. 둘은 상당히 다르다. 똑같이 바닥부터 시작하더라도 주어지는 기회와 파이가 현격하게 차이가 난다. 경험치가 쌓이다 보면 자연스레 익숙해지고, 익숙함은 여유를 주고, 여유는 능력을 올려주며, 올라간 능력은 새로운 경험을 불러오기에 결국 훗날 엄청난 차이를 만들어내게 된다.

유재석이 처음부터 오늘날의 원숙미 넘치는 진행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처음에 찌질하고, 재미없고, 무능한 캐릭터였다. 그러나 무모한 도전이라는 작은 기회가 찾아왔고, 유재석은 성실하게 그 기회를 살렸으며, 결국 오늘날의 국민 엠씨로 성장했다. 만약 당시 유재석과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찌질한 여성 코미디언이 그런 프로그램을 맡았다고 생각해보자. 그리고 해당 프로그램의 초반 인기는 무모한 도전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해 보자. 그 프로그램이 끝까지 살아남아 결국 무한도전이 되고, 프로그램의 멤버들이 유재석, 노홍철, 정형돈, 하하, 정준하 수준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아니라고 본다. 기회 줬잖아! 별로잖아! 땡! 이러고 곧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변경되었을 확률이 높다. 비단 대중문화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한국여성노동자협회에서 펴내고 손희정이 엮은 <을들의 당나귀 귀>는 이처럼 대중문화 곳곳에 퍼진 여성주의 담론을 다루는 책이다. 한국여성노동자협회에서 만드는 ‘을들의 당나귀 귀’라는 팟캐스트 프로그램 중, 다시 의미 있었던 14개의 에피소드를 선별하여 책으로 엮은 것인데,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 듣는 것을 싫어해서 팟캐스트도 듣지 않고, 비슷한 이유로 인터뷰집이나 대담집도 잘 보지 않는 편임에도 불구하고 몹시 재미있게 읽었다.

‘딸바보’ 남성 캐릭터라든지, 개저씨가 되는 것이 싫어 ‘아재’ 임을 내세우는 남성이라든지, 김숙과 송은이가 오늘날 살아남았던 이유에서부터 걸그룹과 드라마 속 여성 캐릭터의 변화, 성매매, 여성 슈퍼 히어로가 남성들과 얼마나 다른지 등등, 일단 소재 자체가 매우 재미있고, ‘당나귀 귀’라는 이름에 걸맞게 그간 한국 예능을 보면서 고구마 먹은 듯 답답했다거나, 대중문화를 접하면서 의문을 품었던 지점, 욕하고 싶었던 것을 누군가 시원하게 해소해주는 느낌을 받았다. 대담집인 만큼 대화문으로 되어 있어서 읽는 것도 굉장히 수월했고.

모든 챕터가 인상 깊지만, 그중에서도 영화 <비밀은 없다>를 다룬 에피소드가 기억에 남는다. 대담자들은 <비밀은 없다>의 주인공 ‘연홍’이 했던 ‘생각하자, 생각하자, 생각하자’라는 대사가 너무나 인상적이었다고 말한다. 본래 ‘멍청했던’ 연홍은 딸의 죽음을 계기로 각성하지만, 그 각성으로 인해 흥분하고 미쳐 날뛰는 대신, ‘생각’하고, 궁극적으로 ‘승리’한다. 여성들은 성차별 문제에 대해 분노하는 동시에, 그 이상으로 더 많이 ‘생각’ 해야 한다.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생각해야 한다.

많은 사람에게 추천하고 싶고, 특히나 여성들은 반드시 읽었으면 하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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