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글렌 굴드 - 피아니즘의 황홀경 ㅣ 현대 예술의 거장
피터 F. 오스트왈드 지음, 한경심 옮김 / 을유문화사 / 2025년 12월
평점 :
1957년 2월 28일,
두 젊은이가 캘리포이아의 한 무대에서 만났다. 피아니스트는 부유한 모피상의 외아들 ‘글렌 굴드’ 그리고 어린 시절 나치 치하의 베를린에서 살다가 힘들게 미국으로 망명해 온 정신과 의사이자 바이올리니스트 ‘피터 오스트왈드’이다. 그후로 그들의 우정은 글렌 굴드가 쉰의 나이(1982년10월)에 영원히 잠들때까지 20여년 동안 이어졌고, 오스트왈드는 1996년 이 책이 인쇄될 무렵 숨을 거뒀다. 그들은 의사와 환자로 만난 것이 아니다. 음악에 대한 생각을 공유하고 일상의 소소한 불평과 작은 자랑거리에 대한 전화와 편지를 주고 받던 친구사이였다.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와 오랜 세월 우정을 나눈 절친이었기에 오스트왈드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을 것이다.
20세기 가장 위대한 피아니스트 중의 한명으로 늘 거론되는 천재 피아니스트 글렌 굴드, 바흐를 깊이 분석한 거장으로 평가된다. 쉰살의 짧은 생을 살았지만 기록을 좋아하는 그가 남긴 방대한 자료(연주와 녹음, 작곡과 다큐멘터리, 생각을 적은 글, 영상자료, 편지글 등)덕분에 그의 평전은 여러번 출간되지만, 정신과 의사이자 상당한 수준의 아마추어 바이올리니스트였던 피터 오스트왈드의 글은 다른 평전들과 조금 다르다.
정신과 의사라는 직업적 영향도 있었겠지만, 글렌의 출생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시간에 따라 비교적 객관된 자료를 근거로 많은 일화를 담고 있다. 굴드의 아버지 버트, 어릴적 유일한 친구 폴포드, 사촌과 개인비서, 매니저와 동료 음악가와 말년에 녹음작업을 함께한 작업자들까지 글렌의 삶의 주변에 있던 인물들을 인터뷰하고, 다양한 자료조사를 통해 객관적 글을 쓰려 노력한 흔적이 곳곳에 보인다. 신화화 된 ‘거장’이 아닌 고통받은 예술가, 인간적 고뇌와 정신적인 면과 병적인 증세를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게 특징이다.
타인의 인정과 칭찬을 유독 좋아했던 천재피아니스트가 고작 31살의 젊은 나이에 무대를 떠나 녹음실로 숨어 들어가게 만든 무대공포증과 통제 불가능한 불안증, 평생 감기에 걸릴까봐 여름에도 코트를 입꼬 장갑을 껴게 만든 건강 염려증, 자신의 몸을 ‘악기를 연주하는 기계’처럼 완벽하게 관리해야 한다는 강박증, 그리고 평생 달고 다녀야 했던 심신상관적인 징후(Psychosomatic Ilness)까지 글렌을 괴롭혔고, 이는 수많은 약물 복용으로 이어졌다.
그런 글렌은 고독을 즐기기도 했고, 혼자 있기를 좋아했지만 유독 외로움을 타기도 했다. 절친들에게는 한밤중에도 전화를 걸어 몇 시간씩 자신의 생각을 일방적으로 쏟아내는 바람에 주변인들을 힘들게도 했다. 무대공포증과 대인기피 성향은 아버지가 만들어준 의자에 집착하게 했고, 굴드는 이 의자를 평생 들고 다니며 안장이 헤질때까지(결국 의자 골격만 남은 상태까지) 그 위에 앉아 연주를 했다. 굴드는 이 의자에 집착함으로써 정서적 안정을 찾은 것 같다.
책속 글렌 굴드를 만나는 동안 그의 심정을 헤아려 보려 했다.
완벽주의 어머니 때문에 실수에 대한 불안감과 결벽증이 함께 자랐을 어린 굴드의 마음을, 무대에서 연주를 하면 속옷이 젖을 정도로 몰입했던 십대의 굴드의 환희를, 온갖 병에 시달려 심신이 황폐해진 가운데서도 피아노 앞에 앉았을 중년의 굴드와 엉덩이가 불편하고 너무 낮아 등을 굽게 했을 아버지의 다 헤어진 의자를 버리지 못하고 녹음실에 앉았을 말년의 굴드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했다. 동경보다는 연민과 동정이 앞섰지만 그의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에 박수를 보낼 수 밖에 없었다. 짧았지만, 찬란했고 열정적 삶을 살았던 굴드는 누구도 원망치 않았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저 음악을 사랑했으며, 음악속에서 수많은 꿈을 소망했다. 배우를 꿈꾸기도 작곡가가 되기를 꿈꾸기도, 멋진 다큐멘터리 감독이 되길 꿈꾸었다.
글렌 굴드가 계신 천국에도 심코호숫가의 오두막이 있으리라, 그곳에 사랑하는 강아지 닉, 모차르트란 앵무새와 네 마리의 금붕어(바흐, 베토벤, 하이든, 쇼팽)와 그가 좋아했던 스타인웨이 모델 CD318 피아노가 그의 앞에 있으리라 믿는다. 이제 천재라는 짐을 내려놓고, 오스트왈드와 언어유희의 유머를 나누며, 그 곳에서 평안하게 맘껏 연주하시길 바란다. 우리가 여전히 당신의 음악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그 연주 속에서 위로 받고 있다는 것을 보고, 굽은 등을 펴고 미소짓고 있으리라 믿는다.
<골드베르크 변주곡> ‘아리아’를 듣는 겨울밤. 간간히 섞인 글렌 굴드의 흥얼거림이 오늘따라 천상에서 내는 소리로 들린다. 내일 아침에는 눈이 내려 앉아 있을 듯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