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에게 아버지는 어떤 존재인가? 아버지에게 아들은 어떤 의미인가? 국내에서도 '가시고기'나 '아버지' 같은 문학작품으로 또 영화로 대중에게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이에 공감했고 과연 이 시대의 아버지 상은 도대체 어떤 것이고 잃어버린 가장의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 지 사회적 이슈로 회자된 바 있다. 아버지는 언제나 이중적인 의미로 다가오곤 한다. 왜냐 하면, 엄한 아버지의 가부장적이고 전통적인 이미지와 친구처럼 가깝고 친근한 이미지가 이중적으로 투영되어 복합적인 대상으로 지각되는 것이다.

한 아버지가 아들에 대해 끝없는 신뢰와 사랑을 가지고 평생토록 친구처럼 연인처럼 일관되게 편지로 부정(父情)을 전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보통은 자기 자녀에게는 좀처럼 인내심을 발휘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특히 일관된 태도를 유지하기가 어렵다. 관심이라는 이유로 지나칠 정도로 간섭하고 사랑의 이름으로 분별 없는 태도를 가지기 쉽다. 교육학자들은 한사코 부모가 변해야 하고 부모가 일관된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세상의 허다한 부모들이 바로 그 점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해서 가장의 권위 혹은 지도력이 무너져 내리고 가정 교육이 실패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 한 아버지가 계시다. 그 자신이 다소 특별한 사람으로 중국에서 개화 초기에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 온 지식인이었으며 일찍이 자식의 음악적 재능을 간파하고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자녀 교육에 헌신한 사람이다. 번역가이자 사상가로서 자신의 소신을 평생 지킨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면서도 자식 앞에 한없이 부드럽고 관용하는 모습이 한국의 아버지와 다르지 않다. 비록 사회주의에 사상적 배경을 두고 자본주의에 대해 비판적이었고 기독교에 대해 부정적인 고집 센 모습도 보여주지만 이역만리에 유학보낸 아들을 위해 사흘이 멀다하고 마치 밥상머리에서 아들을 다독이고 훈계하는 모습처럼 친근하게 접근하는 모습은 가히 존경스럽다.

반대로 아들의 모습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아버지가 아들에게 보낸 100여 통의 편지를 통해 간접적으로 그려지는 아들의 태도는 아버지에 비하면 매우 소극적으로 비쳐진다. 아버지는 아들이 편지를 자주 보내주지 않는 것에 때로는 서운해하기도 하고 가끔 노골적으로 야단을 치기도 한다. 그러나, 언제나 아버지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아들의 음악적 성장을 위해 함께 음악을 듣고 음악을 연구하며 세심한 면까지 토론한다. 아들이 곁에 있는 것처럼 연습할 때 손가락의 움직임이나 자세에 대해 그렇게 자세히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엄청난 관심과 사랑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대쪽같았던 아버지의 모습도 늙어가면서 차차 약해지고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연 아들은 어떻게 느꼈을까. 조국이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면서 사랑하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사상적 시비에 휘말려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것을 수천 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으면서 어떤 느낌으로 받아들였을까?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수십년이 흐른 뒤에 아들 부총은 조국으로 돌아와 음악대학의 강단에 선다. 아버지가 가르쳐준 조국애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자식에게 부모는 거울과 같다. 부모는 자식에게서 마치 물위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듯한 동질감에 때론 기뻐하고 당혹해 하며 자식은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존경했거나 비난했던 부모의 모습을 자신에게서 발견하고 당황하며 뉘우친다. 부뢰가 자식에게 보낸 수백통의 편지 속에 담겨진 아버지의 사랑은 오늘 날에도 변함 없이 이메일과 전화를 통해 자식들에게 쏟아져 내리고 있을 것이다. 이제 옛날처럼 손으로 편지지에 써서 우표를 붙이고 우체통에 던져 넣는 낭만과 기다림의 미학은 발견하기 어렵다 해도 디지털 시대에도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은 유효하다. 자녀들은 아버지를 통해 세상에 태어나고 어머니를 통해 양육되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자녀에게 푯대가 된다. 그러나 흔들리는 푯대는 더 이상 푯대가 아니다.

이제서야 소개되는 부뢰의 편지가 우리에게 던져주는 메시지는 흔들리지 않는 사랑의 푯대에 다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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