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사탕 내리는 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국내에서 <냉정과 열정사이>로 유명한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 별사탕 내리는 밤.

나또한 에쿠니 소설을 처음 접한 건 냉정과 열정사이었다. 요즘엔 한국 소설에서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것 같지만,

그 당시엔 감성적이고 담백한 문체와 개성있고 독특한 캐릭터들의 향연이 매력적으로 다가와 한동안 그녀의 작품들을 계속 읽어댔던 기억이 난다.

최근엔 변함없는 그녀의 그런 작품에 무료함을 느끼고 한동안 멀리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계절이 변하는 찬라의 고독감에 가장 생각나는 작가인지라, 매년 한번씩은 찾는 작가임에는 변함없다.

 

부에노스아이레스 근교의 일본인 마을에서 나고 자란 사와코와 미카엘라 자매는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자신들의 뿌리, 일본을 생각하면서 땅에 별사탕을 묻었다.

별사탕을 묻으면 그게 일본 밤하늘에 흩어져서 별이 된다고 상상하면서.

자신들이 있는 곳에서 보이는 별은 일본에 사는 아이가 묻은 별사탕이라 생각하면서.

그녀들의 이런 생각은 어린이다운 생각이었을까, 상상력이 풍부한 거였을까? 나의 어린시절을 잠시 떠올려 봤다.

어린 시절 서로의 연인을 공유하기로한 자매는, 말도 안돼! 싶다가도 한 편으로는 왜 그랬는지 이해도 가는 그 이상한 약속을 오랫동안 유지했다.

그러다 일본 유학 중에 만난 다쓰야라는 매력적인 남자를 사랑하게 되지만, 사와코는 처음으로 이 남자를 공유하지 않겠다 선언하고 그와 결혼해 일본에 정착한다. 미카엘라는 곧 형부가 될 그 남자에게 여러번 유혹의 손길을 내밀었지만 그것이 사랑인지, 언니에 대한 배신감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아이를 임신하고 갑작스럽게 아르헨티나로 귀국해 딸을 낳아 키운다. 그렇게 자매는 20년을 떨어져 각자의 삶을 살았지만, 사와코는 손편지로 계속 미카엘라에게 닿아 있으려 노력했다.

어느날 사와코는 다쓰야에게 이혼서류 한 장을 남긴 채 연하의 남자 다부치와 아르헨티나로

떠나고 딸 아젤란과 평범하게 생활하던 미카엘라는 그런 언니를, 알 수 없는 기쁨이 밀려오는 자신을, 모두 이해할 수 없어 혼란스럽다.

<별사탕 내리는 밤>은 이 두자매와 그녀들을 사랑하는 남자들, 그리고 딸 아젤렌을 중심으로 이야기가 펼쳐진다.

참 어이없는 내용인듯 한데 그녀들의 이야기를 가만 듣고 있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빠져들어 나도 별사탕 하나 땅에 묻어볼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어 웃음이 난다.   


p.47

시선 끝은 천장이지만 미카엘라는 천장을 보고 있진 않다. 보이는데도 보고 있지 않은 그 상태를 미카엘라는 즐긴다. 요가에 몰두하노라면 자신이 2차원 공간을 헤매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바닥도 벽도 천장도 뿌연 색채와 형태에 지나지 않고, 숨 쉬는 것이라곤

자신의 육체뿐이며 자신의 팔과 다리와 머리만이 유일하게 신뢰할 수 있는 현실이라는 듯한.

처음에는 몸매 유지를 위해 시작한 취미 생활이었는데 지금은 요가가 미카엘라의 일부-그것도 아주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p. 121

아젤렌은 미카엘라의 아침 식단이 차와 그래놀라바뿐인 것을 보고 화난 엄마 같은 얼굴을 한다.

"그게 다야?"

"충분해. 나는 연비가 적게 드는 친환경 자동차 같은 사람이니까."

p. 158

이곳에서 이토록 오랫동안 살아왔는데 사람의 감정 이외에 내게 남은 거라곤 정말 아무것도 없다. 사람의 감정을 제외하면 사물은 어쩐지 무서울 정도로 간단하게 정리된다.

p.160

잡지만 읽는 미카엘라와 달리 아젤렌은 독서가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고, 미카엘라는 걸음을 멈추고 먼발치에서 딸을 바라보며 기억을 떠올린다.

친구들과 숨바꼭질을 하며 놀 때조차 책을 쥐고 있어서 미카엘라는 내심 이 애가 친구들과 잘 지낼 수 있을까 걱정하곤 했다. 반도네온을 만나면서부터 딸의 독서벽은 수그러드는 듯 보였다. 하지만 최근 들어 다시 도진 데다 역사며 종교, 철학을 둘러싼 난해해 보이는 책-미카엘라가 보기에 아직 어린 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책- 만 읽었다.

p.293

언니와 자신은 옛날부터 완전히 딴판이었다고 미카엘라는 생각한다. 카리나가 잘하는 것-공부,독서,요리,재봉, 어른들과 예사로 이야기 하는 것- 을 미카엘라는 하나같이 잘 못했고, 미카엘라가 잘하는 몇 안 되는 것-달리기, 친구들과 수다 떨기, 다이어트, 온종일 tv만 보며 빈둥되는 것-은 카리나가 질색하는 것들뿐이었다.


내가 문학 작품을 읽을 땐 작품에 따라 플롯을 중심, 또는 인물 중심으로 읽는다. 물론 스토리와 캐릭터 모두 잔상이 오래 남을 만큼 훌륭한 작품들도 많지만, 주인공이 했던 사소한 말과 행동은 또렷하게 기억하지만 사건과 결말의 내용이 생각 나지 않을때도 있고 반대로 대략적인 스토리와 결말 장면만 기억날 때가 있는데, 이건 작품에서 내가 더 중점적으로 매력을 느꼈거나 흥미롭게 생각했다는 차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에쿠니가오리의 소설에서 기억에 남는 건 캐릭터들이다.

읽다 메모해놓거나 포스팃을 붙여논 부분들을 보면 내가 주인공들에게 빠졌다는 걸 알 수 있으니까.. 요가를 좋아하고 다이어트를 하고 집안일을 하면서 생각하는 그런 소소한 장면들이 마음에 들어올 때가 많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색다른 생각들을 하는 것이, 남편을 사랑하지만 남편만큼 사랑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 다부치에게 가고, 자신은 형부를 사랑하고, 자유롭게 살려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딸은 평범하게 살기 원하고, 아니 평범하다 믿고, 자신의 할아버지 뻘의 유부남과 불륜을 하며 제대로된 남자/제대로된 사랑이라 진심으로 믿는.. 그런 이 책의 스토리보다 인물들의 행동 자체보다, 그들의 일상과 가치관에 더 빠져든다. ---- 이렇게 보면 그녀의 소설에선 특히 스토리와 인물을 구별하는게 큰 의미가 없어보이지만.


p.217

인생이란 레고와 같은 거니까, 견고하게 완성했다 싶어도 까짓것 금세 다르게 만들 수 있은까.

그 말을 기억하는 까닭은 레고라는 비유가 너무나 다부치다워서 우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르게 만들려면 우선 부서뜨려야만 해. 사와코 말에 다부치는 웃으며, 간단해요, 라고 말했다. 부수는 건 간단해요, 아깝다는 생각만 안 하면 되는 거죠.

p.419

사와코는 지금껏 젊은 사람이 부럽다고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젊다는 건 어리다는 것이고, 젊음을 잃을까 겁내는 것을 꼴사납게 여겼다. 하지만 지금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잎만큼 위태로운, 자신이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하는 벌거벗은 소녀처럼 무방비한 조카를 보고 있자니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치의 의심도 없이 한 남자가 자신의 전부라고 믿을 수 있다니 이 얼마나 좋은 일인가. 아젤렌은 심지어 완벽한 애정이나 완벽한 관계 같은 것도 존재한다고 믿을 것이다. 그런 젊음을 부러워한다는 건 가슴 저밀 만한 일이었다. 슬픔으로 그리고 아마도 위로와 동정으로.


가끔 해설집을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추리소설에서 이해 안가는 사건해결의 열쇠라든가, 옮긴이가 따로 언급하지 않은 중요정보라도 궁금하지만 무엇보다 이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이 이야기를 시작했을까. 뭔소린지 모르겠어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건데! 식의 비꼼이 아니라 정말 순수하게 작가의 생각이 궁금할 때다.

어떤 작가는 작품이 자신의 손을 벗어나 책으로 나오면 그 후에 자신의 생각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도 하지만,독자들 입장에서 서로 다른 생각을 공유하는 것도 즐겁지만, 작가는 이 글을 쓰면서 어떤 생각을 했을까.. 궁금해는 것도 사실이니까.

감성적 글로 대표되는 에쿠니 가오리는 <별사탕 내리는 밤>으로 사람들에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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