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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아이
츠지 히토나리 지음, 양윤옥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23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인생은 우주의 별만큼 바다의 모래알만큼, 또 뭐가 있을까? 지구에 있는 CO2의 분자수만큼 무한히 다양해 나는 다 알 수가 없다. 어느 곳 어디에서 어떻게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살고 있는지 나는 책을 통해서 힐끔 곁눈질하듯 볼 뿐이다. 소설을 통해서도 말이다.
이 책의 주인공은 렌지다. 부모의 보살핌은커녕 학대 속에 방치되어 출생 신고도 없이 세상에 덩그러니 떨어진 아이. 홀로 내던져진 아이는 안전하게 보호되어야 할 한밤중에도 세상에 드러나있다. 렌지가 있는 세상은 유흥가인 나카스 섬. 섬 밖은 렌지에게는 '외국'이다. 호적도 없어 서류상의 존재는 부정된다. 그러나 그는 나카스에 있다. 국적이 있다. 어린 렌지는 스스로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며 그 시간들을 살아간다.
렌지는 히가시 나카시마 다리에 자국 영토를 표하는 X를 그린뒤, 중앙 분리대에 서서 양팔을 펼치고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맑은 가을 하늘이지만 바람은 살갖을 때릴 만큼 강했다. 티셔츠가 바람을 머금어 둥그렇게 부풀고 바람의 손톱이 살갗을 할퀴었다. 다리 한복판까지 걸어가 그곳에서 눈을 감고 햇살을 느꼈다. 나한테는 나카스가 있다고 생각하면 전혀 고독하지 않았다. 집도 없다, 세계도 없다, 하지만 이렇게 풍성하고 멋있고 자유로운 나카스가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가벼워졌다.(p.96)
츠지 히토나리가 누구인지 모르고, 사실 나는 [네가 맛있는 하루를 보내면 좋겠어]라는 책을 읽고나서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얼마나 유명한 소설이며, 어떻게 영화로 만들어졌는지 모르지만 내가 읽은 책에서 느낀 작가는 '따뜻한 엄마 같은 아빠, 아빠 같은 엄마'였다. 그래서 작가의 눈이 그려낸 소설이 무척 궁금했다. 그리고 그 눈빛을, 내가 느끼기에, 이 책에서 렌지의 가족이 아닌 주변 사람들에게서 읽을 수 있었다.
어두운 길에서 렌지에게 맛있는 밥을 주는 사람들. 파출소 경찰 히비키, 외국인 삐끼 이시마, 고급 멘션을 렌지에게 빌려주는 괴짜 노숙인 겐타, 식당 주인 야스코, 마을 원로이자 축제 회장 다카하시, 나카스에서 사는 또 다른 여자아이 히사나, 요리사 헤이지, 함께 요리를 배우는 첫 동성 친구 쓰토무. 이렇게 선한 만남이 실제로 존재할 수 있을까 싶지만, 소설 안에서는 따뜻하게 넘쳐흐른다. 콜라도 주고, 밥을 해주고, 같이 요리를 한다. 따뜻한 온기가 순간순간 렌지에게 전해졌다.
렌지를 받아주고 안아주는 사람들이 있지만 여전히 어둡고 대단히 막막한 한밤 같은 렌지. 렌지는 스스로 생각한다. 나카스 섬을 지키자. 그것이 렌지를 서고 걷고 뛰게 만들었던 목표였다. '나카스가 내 세계예요.'(p.122) 여섯살 렌지의 말. '저는 호적을 취즉할 의사가 없습니다. 누군가 원해서 태어난 것도 아니니까요. 하지만 나카스에는 그런 저를 사랑해 준 사람들이 있습니다. 소년원에서 나가면 나카스로 돌아가 여태까지 해 왔던 대로 그곳 사람들과 나카스의 전통을 지키며 살고 싶은 마음뿐입니다.'(p.370) 소년이 된 렌지의 말.
이 책은 1부, 2부로 나뉘어져있다. 유흥가 섬 나카스에서 한밤 중에 뛰어다니는 어린 렌지의 이야기 1부. 중간에 큰 사건이 일어나 시간이 흐른 뒤, 16살이 된 렌지가 2부에 등장한다. 1부도 2부도 렌지를 뒤흔들고 그를 뿌리째 뽑을 듯한 큰 사건으로 마무리된다. '후끈한 열기와 나카스를 둘러싼 강의 습한 냄새, 열기를 품어 몸을 휘감고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무거운 공기가 가득하다. 이기적인 엄마, 도대체 정답을 알 수 없는 아빠의 존재. 안정감 있는 가족은 없지만 렌지를 성장시킨 그 긴 시간과 여정, 그리고 그 주변 사람들에 관한 성장소설을 살포시 추천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