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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잠에서 깨다 -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
정병호 지음 / 푸른숲 / 2025년 12월
평점 :
⛏️ 《긴 잠에서 깨다》 | 정병호 글·구술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발굴이 새긴 기억의 공공인류학
도서출판 푸른숲의 SNS에서 만난 책 소개를 봤을 때, 이전에 보았던 다큐멘터리 《조선인 여공의 노래》가 떠올랐다. 출간 소식을 접하자마자 꼭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막상 책을 펼치니 예상보다 훨씬 무겁지만 차분한 책이었다. 정병호 교수님이 작년에 작고하셨기에, 이 책은 그가 남긴 글과 현장을 함께한 제자들의 손을 거쳐 완성되었다.
책은 총 10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교수님이 일본에서 연구를 시작하게 된 계기와 프로젝트가 점차 깊어진 과정, 그리고 그 의미가 차분하게 담겨 있다. 1장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인류학자가 현장 연구 과정에서 경험하듯, 이 모든 일은 뜻하지 않은 만남에서 시작됐다”라는 문장은 책의 방향을 자연스럽게 보여 준다.
직설적인 표현을 피하는 일본 문화 속에서, 일본어에 능숙하지 않았던 교수님이 공손히 “한 달 동안 댁에서 신세를 지겠습니다”라고 말하던 장면에서는 도노히라 스님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떠올라 미소가 지어졌다. 어린이집 연구에서 출발해 일제 강제노동 희생자 유골 발굴로 이어진 과정은, 고고학이나 인류학 지식이 없어도 충분히 따라갈 수 있을 만큼 담담하게 서술된다.
훗카이도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여름에는 시원하고 겨울에는 설경이 아름다운 관광지라는 이미지가 있었지만, 책 속 훗카이도는 외지고 변방의 공간으로 그려진다. 아이누 민족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 처음 제대로 알게 되었는데, 훗카이도는 오랫동안 일본 중앙정부의 직접 통치 밖에 있었고, 아이누가 살아온 땅이었다. 메이지 정부 시기 ‘개척’이라는 이름 아래 국가적으로 편입되며 사실상 식민지화되었고, 그 과정에서 아이누의 삶과 문화는 크게 훼손되었다. 이 역사적 사실은 책을 읽지 않았다면 쉽게 알기 어려웠을 것이다.
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한국, 일본, 재일교포 대학생들이 발굴 현장에서 함께 노동하고 토론하는 장면이었다. 갈등과 오해가 생기기도 하지만, 공동 작업을 통해 관계가 재구성되는 서사는 ‘국가 간 화해’라는 추상적 담론보다 시민 차원의 연대와 책임이 어떻게 구현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책은 기억 투쟁의 주체를 국가가 아닌 시민과 연구자, 현장 참여자로 위치시키고 있다.
프로젝트 초기에 여러 후원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흥미롭다. ‘보해’라는 주류 회사가 소주를 챙겨 보내고, 보해가 훗카이도의 ‘닛카’와 자매결연 관계였던 덕분에 닛카에서도 위스키를 보내주었다는 일화가 특히 기억에 남는다. 고생하는 젊은이들에게 힘을 보태고 싶은 마음은 한국과 일본 모두에서 공통된 정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 잠에서 깨다》는 학술서이자 기록문학적 성격을 지닌다. 유골 발굴이라는 물리적 노동과 현장의 사소한 연대, 애도의 감각이 절제된 언어로 제시되며, 비극을 소비하지 않고 기억을 현재의 윤리적 과제로 끌어낸다.
이 책이 던지는 가장 중요한 질문은 명확하다. 과거의 폭력은 누가, 어떻게 기억해야 하는가? 그리고 그 기억은 현재 우리에게 어떤 책임을 요구하는가? 《긴 잠에서 깨다》는 국가 주도의 역사 서술이나 공식 사과의 한계를 넘어, 시민적 실천과 학문적 개입이 결합될 때 비로소 기억이 공공의 것이 될 수 있음을 보여 준다. 이러한 점에서 이 책은 일제 강제동원 연구뿐 아니라, 기억 연구와 공공인류학 전반에도 의미 있는 참고점이 된다.
*위 도서는 도서출판 푸른숲에서 도서를 제공받아
탐독 후 작성된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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