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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한 차별주의자 (30만부 기념 거울 에디션)
김지혜 지음 / 창비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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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미안하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다. 그런데 너 너무 예민한 것 아니냐?’

주변 사람에게 어떤 발언이 불쾌했음을 말하면 으레 듣는 말이었다. 그들이 특별한 악의를 가지고 한 말은 아니었다. 그래서 불편한 채로, 가끔은 ‘너무 예민한 사람’이 되어 그냥 넘어갔다. 그들의 말은 내 마음에 가시처럼 박혀 나를 콕콕 찔러댔지만. 이 책을 읽고 그들을 표현할 말을 찾았다. 그들은 선량한 차별주의자였다.

1장에서 작가가 언급하듯, 서는 곳이 바뀌면 풍경이 달라진다. 나는 이 문장을 이렇게 바꿔 보고 싶다. “그 자리에 서기 전까지는 보이지 않는 것이 있다.”

나 역시 몰랐던 것들이 있다. 특권을 누릴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약자의 위치로 떨어지고 나서야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한국인 남자와 연애할 때는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본 적이 없다. 학교에서 다른 친구들의 놀림과 관심을 받았지만 그것이 폭력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여자와 연애할 때는 상황이 달랐다. 둘이 사랑하는 건 알겠지만 보기 싫다는 말은 애교였다. 연인과 함께 있는 나의 사진을 몰래 찍어서 돌려보거나, 소리를 지르고 물총을 쏘는 일도 일어났다. 이 모든 것이 학교폭력이라고 호소했을 때, 어떤 선생님은 내가 동성애를 했기 때문에 피해와 가해의 관계가 뒤바뀔 수 있다며 만류하기도 했다.

외국인 남자와 연애할 때도 상황이 아주 다르지는 않았다. 지하철에서 손을 잡고 있었다고 당신에게 소리 지르는 사람을 만난 적 있는가? 주말 점심, 사람들로 북적이는 푸드코트에서 옆자리에 앉으라고 선뜻 제안을 드렸을 때, 나와 내 외국인 남자친구 옆에는 불편해서 앉을 수 없다는 거절을 당한 경험도 아마 없을 것이다.

지랄. 발작. 뗑깡. 써도 된다고 생각해 본 적은 없지만, 나에 대한 공격으로 느끼지는 않았었다. 뇌전증 진단을 받고 나서야 이 말이 환자 당사자에게는 굉장히 불쾌하게 다가오는구나, 하고 느꼈다. 하루에도 수십 차례 나를 비하하는 말을 듣는 것은 결코 편안한 일이 아니다. 지적했을 때도 돌아오는 것은 늘 예민한 사람 취급, 네 앞에서는 말도 편하게 못 한다는 비아냥이었다.

그냥 말, 웃자고 한 말, 농담에 왜 우리는 죽자고 달려들까? 왜 어떤 사람에게는 재미있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불편하게 다가올까?

작가는 4장에서 ‘왜 웃긴가?’라는 질문을 ‘누가 웃는가?’로 치환해서 설명했다. 나는 이 질문을 ‘무엇에 웃는가?’라는 질문으로 다시 바꿔 보고자 한다. 우리는 무엇에 웃는가? 작가가 언급했듯이, 어떤 집단에 대한 비하는 내가 속한 집단에 대한 우월성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다. 가벼운 농담은 ‘그래도 된다’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고, 어떤 집단을 배척해도 된다는 믿음은 물리적 폭력 등 실질적인 위협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그저 웃자고 한 말’에 민감하게 반응해야 하는 까닭이다.

그러나 불쾌한 농담에 단호히 반응하기는 실제로 쉽지 않다. 소수자에 대한 혐오가 담긴 농담에는 권력관계가 담기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농담을 던지는 쪽은 보통 특권을 가진 집단이고, 불쾌하다고 느끼는 쪽은 소수자다. 약자 집단이 특권 집단에 ‘대들기’ 위해서는 많은 것을 감수해야 한다. ‘예민한 사람’이라는 지적에 그칠 수도 있지만 집단 내에서 배척된다거나, 정체성에 대한 혐오로 이어지거나, 최악의 경우 물리적 폭력까지 벌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교실에서 급우가 자신의 쉰 목소리를 지칭하며 ‘나 오늘 목소리가 트랜스젠더 같아졌어.’라고 말했다. 다른 학생 여럿이 웃었다. 트랜스젠더에 대한 부정적인 스테레오타입을 재생산하는 이 농담은 트랜스젠더 당사자인 내게 상당히 불쾌했다. 그러나 나는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나의 트랜스젠더 정체성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래 집단 안에서 배척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한 사람, 튀는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고, 트랜스젠더 정체성 때문에 공격받고 싶지도 않았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 혐오에 대한 방관은 혐오를 더 키운다. 가만히 두는 것은 결코 정답이 될 수 없다. 그렇다고 소수자 당사자가 매번 지적하는 것 역시 부담스러운 일이다. 이 상황을 타개할 좋은 방법이 없을까? 나는 앨라이가 해답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중학교 시절 자습 시간에 한 학생이 다른 학생을 놀리며 게이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학생은 발끈하며 성소수자에 대한 원색적인 비하 발언을 쏟아냈다. 주변의 학생들은 웃었다. 성소수자로서 익숙한 일이었다. 아무 기대 없이 그 순간이 지나가기만을 바라던 차였다. 선생님께서 그만하라고 하시더니 게이의 뜻을 알고 있는지 물으셨다. 그 학생은 남자 동성애자를 뜻한다고 대답했다. 선생님께서 그럼 왜 그 말을 욕설처럼 사용했냐고 물으셨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가볍게 성소수자에 대해 설명하시더니 다른 방식의 사랑을 하는 사람 역시 우리와 같은 사람이니 그렇게 말해서는 안 된다고 하셨다. 갑자기 그 공간이 안전하게 느껴졌다.

이 말을 내가 했다면 아마도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주변화된 (marginalized) 존재에게는 권력이 없기 때문이다. 안전한 공간을 구축하는 것은 당사자의 힘만으로는 버거울 때가 있다. 앨라이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다.

7장의 제목인 ‘보지 않을 권리’라는 말도 참 익숙하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쫓겨날 당시 상담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었다. 다른 아이들도 동성애자를 보지 않을 권리가 있고, 기숙사에 동성애자가 있으면 위험하다는 학부모의 민원이 있었다고 하셨다. 억울했지만 생각을 정돈된 말로 풀어낼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학교생활기록부의 작성 권한을 갖고 계신 선생님께 함부로 대들기도 쉽지 않았다.

141페이지의 질문을 보고서야 억울함을 호소할 수 있었다. 안전한 것과 안전하지 않은 것을 정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다른 학생들이 내 방에 들어와서 퀴어 깃발에 손을 대고, 공공연하게 나를 괴롭혔는데 지금 누가 누구에게 위험을 가하고 있는가? 동성애자를 보지 않을 권리가 있다고 하면 내게도 이성애자를 보지 않을 권리가 있지 않나? 내가 그렇게 말하면 이성애자 학생들을 모두 기숙사에서 내보낼 것인가? 자퇴를 결정하고 나서 찾아가서 여쭈어보았다. 너를 생각해서 잘 되라는 뜻에서 한 말이었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졌다니 미안하다는 말이 돌아왔다. 사과라고 하기는 시원찮았지만.

성소수자가 기숙사에서도 쫓겨나는데, 하물며 화장실에서는 어떻겠는가. 175페이지에서는 트랜스여성이 화장실에서 겪는 어려움을 언급하는데, 트랜스남성으로서 나의 경험을 말해 보겠다. 짧은 머리를 하고 바인더를 사용할 당시 나는 남성으로 패싱되는 상태였다. 여자화장실을 이용하면 쫓겨나기 일쑤였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많았다. 심한 정도는 아니었지만 얻어맞은 적도 있었다. 남자화장실에서는 생리대를 처리하기가 마땅치 않았다. 성폭력을 당하면 어쩌나 하는 고민도 있었다. 성중립화장실을 만났을 때 이런 고민이 눈 녹듯 사라졌다. 그건 단순히 안전하게 화장실을 이용할 수 있다는 안도가 아니었다. 나를 환영하는 공간의 존재에서 오는 기쁨이었다. 나는 성중립화장실이 더 많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화장실을 이용하는 것은 모두의 기본적인 권리라는 데서 논의를 시작해야 한다. 여성의 안전과 트랜스젠더의 안전은 양립 가능하다. 화장실에서 어떻게 트랜스젠더를 배제할 것인가가 아니라 어떻게 안전한 화장실을 만들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

차별을 겪으며 살아온 내게 이 책은 든든한 무기처럼 느껴진다. 차별을 경험한 적은 많았지만 왜 그것이 잘못되었는지 설명하기는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나는 차별의 억울함을 언어로 표현할 방법을 배웠다. 트랜스젠더이자 바이섹슈얼이고 여성으로서 차별을 겪는 뇌전증 환자인 나는 아마도 살아가면서 더 많은 차별을 겪을 것이다. 그럼에도 이제 나는 두렵지 않다. 이제 나는 내 경험과 정체성을 지킬 논리를 가졌기 때문이다.

비록 사회적 소수자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지만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다. 차별금지법을 위해 힘쓰는 사람들도, 성소수자를 포용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고 있다. 언젠가는 그 누구도 차별을 더 이상 경험하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희망한다.

#선량한차별주의자 #김지혜 #창비 #선량한차별주의자리뷰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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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말고 모모
로진느 마이올로 지음, 변유선 옮김 / 사계절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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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언니, 나랑 결혼할래요?”의 저자 김규진 씨의 출산 이야기를 뉴스에서 보았다. 나의 출산이 아니었음에도 그 뉴스가 가깝게 다가왔던 건 아마도 내가 성소수자이기 때문이리라. 그러던 차에 이 책을 접하게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프랑스는 우리나라보다 진보적이고 성소수자의 권리도 잘 보장되어 있으니 큰 어려움은 없었을 거라고 짐작했다. 그러나 로진느와 나탈리의 이야기를 읽으며 그 어떤 나라에서도 동성 부부의 임신은 쉬운 일이 아니며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기증을 이타적인 누군가가 선물한 사랑의 씨앗이라 생각해보자는 말이었다. 정자 또는 난자 공여로 태어난 아이와 그의 생물학적 부모와의 관계는 항상 궁금하던 부분이었다. 이 책에서는 부모와 생물학적 부모가 서로의 경쟁 상대가 아님을 명심해야 한다고, 아이는 그 둘을 명확히 구별할 수 있다고 말한다. 이 부분을 명쾌하게 정리해 두어서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러고 보니 한때 나도 아이를 원하던 적이 있었다. 결혼에 대한 생각은 없었지만, 나와 닮은 개체를 출산해서 키워 보고 싶었다. “너 같은 애 낳아서 고생해 봐라”는 말에 호기심을 느끼기도 했다. 한국에서 내가 로진느처럼 아이를 낳아서 기를 수 있을까? 그것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려면 세월이 얼마나 흘러야 할까? 많은 생각할 거리를 던져 주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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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내 마음이 버거울까? - 정신과 의사 캘선생의 상담소
유영서 지음 / 미래의창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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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회로 #미래의창 에서 나온 #캘선생 님의 책 #나는왜내마음이버거울까 를 읽고 후기 님깁니다😆

혹시 내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아 불안한 적이 있나요?
이 책은 그런 분들 마음에 쏙 드실 거예요. 마음을 마음대로 하는 방법을 알려 주냐고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음과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에요. 저는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 중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다룬 챕터가 가장 마음에 들었어요. 주변에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다면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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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 피해자에서 생존자, 그리고 감시자가 된 마녀 D의 사법연대기
D 지음, 김수정 외 감수 / 동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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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폭력 피해자의 등불이 되어줄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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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이으면 길이 된다 - 피해자에서 생존자, 그리고 감시자가 된 마녀 D의 사법연대기
D 지음, 김수정 외 감수 / 동녘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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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님을 믿고 펀딩했습니다! 기대 많이 됩니다 :) 대한민국 여성의 등불같은 D님,,, 책 받으면 꼼꼼히 읽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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