쌓아둔 것들 다시 1
강인석 지음, 강은지 그림 / 소야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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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게 헹구어낸 낱말들을 하나 하나 조립해서 만들어낸 정결한 시어들이 만들어낸 문장들로 투명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시집 전체를 통틀어 단 한 군데도 관용적 시구가 없다. 군더더기도 없다. 마침표 하나, 조사 하나에도 꼭 필요한지를 묻고 또 물었을 시인의 시간들이 느껴진다. 시의 내용도 좋지만 그것을 담는 시어라는 그릇들도 정결해야 하는 것을 다시 배운다.

모두를 실을 수 없어 몇 편만 골랐다. 시를 읽고 느낀 감상을 간단히 소개했다.

쌓아둔 것들

강인석

툭-

발끝으로 건드렸을 뿐인데

와르르르-

쏟아지는 인형들.

-예쁘다고 했었잖아, 언제까지 모른척할 건데?

-다시 나랑 놀아주면 안 돼?

-먼지라도 털어주면 좋겠어.

인형들 다시 쌓으려는데

함께 쏟아져 있는 말들.

미안한 마음에

인형 놀이

온종일.


=어쩌다 건드려 쌓아 두었던 인형들이 우르르 떨어져 내린다. 바쁜 화자는 다시 인형들을 쌓아 놓으려는데 인형들이 한 마디씩 한다. 언제까지 모르는 척을 할 거냐고. 화자는 어린 아이이지만, 아빠가 될 수도 있고 엄마가 될 수도 있고 형이나 누나나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늘 바빠서 놀아주지 못하는 사람이다. 인형은 혼자서는 놀 수 없다. 인형은 놀아야 하는 존재이지만 혼자서 놀 수 없다. 그래서 늘 기다려야 한다. 함께 놀아줄 엄마, 아빠, 형, 누나, 선생님과 같은 사람들을 기다려야 한다. 화자는 인형과 놀아주기로 했지만 놀아주지 못하고 먼지가 쌓이도록 시간을 보내고 만다. 미안한 마음에 화자는 일정을 미루고 온종일 인형과 놀아준다.

바쁜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아빠와 놀고 싶은 어린 아이의 마음이 느껴진다. 바쁜 아빠가 아이와 놀아주지 못해 미안해 하는 마음이 느껴진다. 일에 많은 시간을 빼앗겨야 하는 고달픈 아빠의 일상이 보이고, 정작 소중한 것들을 쌓아 놓기만 하고 소중한 삶을 살지 못하는 우리의 모습이 보인다.

밤비처럼

또록또록

똑똑똑

내 방 안이 궁금한 걸까?

창문 두드리는 밤비

소리만 넘어오는 호기심

틱틱툭툭

콕콕콕

필통과 공책 건드리며

내 책상 기웃거리는

짝꿍 상우의 손가락.

내 마음 엿보고 싶겠지?

손가락 보다 먼저 넘어오는

상우의 속마음

=좋아하는 마음을 말로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깜깜한 밤에 몰래 창문을 두드리는 밤비처럼,

나를 좋아하는 상우의 마음도 조심조심 내 필통을 두드리며, 내 마음을 엿보고 싶어한다. 귀엽고 사랑스럽다. 좋아하는 마음도 어여쁘고, 수줍어서 조심조심 두드리는 모습이 사랑스럽다.

낙엽

봄바람에

여린 잎 흔들리지도 않더니

여름 장맛비에도

투둑거리기만 하더니

가을바람에

떨어진 낙엽들

사락사락

뽀슥뽀슥

바람에도

발걸음에도

간지러워 소리 낸다.

가을 가득

소리로 채운다.

=사람도 이와 같을 것이다. 어릴 땐 세상에 별로 관심이 없다. 좀 커서 어른이 되면 세상에 관심도 생기고, 조금 동화되기도 한다. 그러다 좀 더 원숙해지면 가을 낙엽이 세상과 함께 소리내고 세상과 함께 동화되어 세상의 일부가 되듯이, 중장년의 어른이 되면 자기 안에서 벗어나 세상의 일부가 되어 세상의 소리를 낸다. 낙엽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러움, 세월, 낡음, 죽음이던 이전의 시들과는 차별되는 시각이다.

몰래 몰래

엄마가 청소해 놓은

깨끗한 계단

먹이 찾는 개미들

두리번두리번.

동화책을 읽어도

컴퓨터 앞에 앉아도

빈 계단 개미들

자꾸만 아른아른.

계단으로 나가

과자 부스러기 흘린다.

조그만 개미들

못 올라올까봐

한 칸 한 칸 흘린다.

혼자 들기 힘들까봐

잘게 부숴 흘린다.

엄마가 눈치챌까봐

몰래몰래 흘린다.

=주체적인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어른의 통제와 감시와 지시에서 벗어나 주체적으로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집중하고, 실행하는 아이의 모습이 보인다. 사소한 사건이지만, 아이는 엄마의 지시에서 벗어났고, 규제에서 벗어나 작은 생명과 동화되어 있는 모습이다. 자연과 교감하는 아이의 성장은 이런 방식으로 진행된다. 아이가 스스로 자신의 내면에서 하고 싶은 일들이 생기고, 그것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성장한다. 커다란 사건을 다루지 않고도 사소하고 흔한 일상들 속에서도 아이의 자발적 성장을 다룬 좋은 동시이다. 아이가 주체이고, 아이의 성장이 담겨 있는 동시다운 동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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