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비의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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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타그램에서 이 책 제목 태그로 피드를 살펴보던 중 박준 시인을 만난 어떤 분이 이 책의 알맹이만 들고 갔다가 박준 시인이 눈을 빛내며 쳐다봐서 책을 드리고 왔다는 내용의 글을 쓰신 것을 봤다.

‘운다고 달라지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이라는 제목의 산문집을 낸 시인이기도 하니 ‘슬픔의 비의’라는 제목의 이 책에 관심을 가지신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이 책은 책을 보호하는 형태의 표지가 있다. 그것을 벗겨내면 일어로 쓰인 제목이 담긴 표지의책이 나온다.

이 책을 펼치기 전에 앞서 읽었던 책은 공교롭게도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은 신형철이라는 한국의 문학평론가의 산문집이고 슬픔의 비의는 와카마쓰 에이스케라는  일본의 문학평론가의 산문집이다.

같은 날 산 책 두 권의 주제는 슬픔에 관한 것이었기에 어딘가 통하는 데가 있었다.

이 책의 저자는 아내의 간병을 하며 슬픔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경험이 있는데 신형철 문학평론가 역시 아내가 수술을 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며 슬픔에 대해 생각한 경험이 있어서 두 분의 삶도 약간 통하는 데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아내는 암 투병을 하다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런 슬픔을 겪은 사람이 쓴 슬픔에 관한 글이기에 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며 자신의 고통 속에서 깨달은 이야기를 전하기에 더욱 진실하게 느껴지는 부분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책에는 소리내어 읽으라고 적혀 있는 문장이 있다.

소리내어 읽으라고 나와 있어서 소리내어 읽었다. 왜 작가가 소리내어 읽어보라고 했는지 알 수 있었다.

미나마타 병에 걸린 여자아이가 벚꽃잎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듯 그것을 집으려 들지만, 손발이 구부러져 집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을 집으려다 마루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진다. 그 모습을 발견하고 달려오는 어머니에게 여자아이는 “엄마, 꽃”이라고 말한다.

여자아이는 결국 얼마 가지 않아 세상을 떠나게 되었고 죽은 아이의 어머니는 죽은 딸 아이를 위해 꽃잎 한 장을 집어 달라며 그 병의 발병 원인이 된 화학 폐기물을 바다에 흘려보낸 기업에 부탁의 편지를 쓴다.

미나마타 병은 미나마타시에서 집단 발병한 병으로 수은 중독이 원인인 병인데 짓소라는 화학공장에서 화학 폐기물을 바다에 몰래 버리는 바람에 그 어촌 지역에 사는 물고기를 주로 먹는 어민들이 이 병에 걸렸다고 한다. 손발이 구부러지는 병이므로 꽃잎 한 장조차 손바닥 위에 올려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개인적으로 종이책을 선호하는 이유가 마음껏 밑줄을 긋고 또 마음을 두드린 문장을 필사해보며 그 책을 나만의 책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이 좋아서였는데 이 책의 저자도 그런 이야기를 이 책에 다음과 같이 해 두어서 공감이 많이 갔다. 공감하며 읽어내려가며 밑줄 그었던 문장이 많은 책이다.

글을 쓰면서 생각이 더 명확해질 때가 있고 쓰면서 나의 생각을 보다 분명히 알게 될 때도 있고, 글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흐릿했던 것들이 구체적으로 드러날 때가 있어 글을 쓰는 것에는 그런 이유도 있지 않나 생각했는데 (내 생각을 발굴해내고 캐내고 구체적으로 만드는) 저자도 그런 생각을 이 책에 밝혀 놓아서 많이 공감이 됐다. 이 외에도 내가 평소 생각했던 것과 같은 생각을 저자가 이 책을 통해 밝히고 있어 공감을 많이 했고, 이런 이유로 저자에게 더없는 친밀감을 느끼며 읽었던 것 같다.

나는 이 책을 온라인 서점에서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을 구매하면서 이 책을 구매한 사람들이 많이 구매한 책으로 이 책이 소개되어 있어 알게 되었다. ‘슬픔의 비의’라는 제목과 미리 보기로 읽어본 문장에 매료되어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과 함께 구매하게 됐다. 국내에 잘 알려진 저자는 아닌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이 책은 한국에 번역된 저자의 첫 책이라고 한다.

궁금하다면 읽어보기를 권한다.


질적인 것은 양적인 것과는 달리 대체가 불가능하다. 서점에 쌓여 있는 책을 읽고 감동을 받아 밑줄을 긋거나 포스트잇을 붙인다. 표시를 하지 않아도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그 책을 가슴에 끌어안는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도 그 책은 더 이상 어디에나 있는 흔한 책이 아니라 세상에 단 하나뿐인 <책>이 되는 것이다. 똑같은 부분에 선이 그어진 책은 존재할 수 없다. 읽는다는 것은 양적인 것을 질적으로 변화시키는 힘을 가진다. (174쪽, 슬픔의 비의 _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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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투리드 연필깎이 - 블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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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도 세련된 느낌이지만, 뾰족하게 잘 깎입니다. 저는 블랙 색상으로 샀는데 작아서 자리 차지도 많이 안 해서 좋고요. 휴대하기도 좋을 듯 하네요. 하단에 연필가루 담기는 통은 옆으로 살짝 돌리면 잘 분리됩니다. (큐브 맞출 때 돌리듯이) 너무 뾰족하게 깎여서 부러진다는 리뷰를 쓰신 분들도 봤는데 어떤 연필깎이든 끝까지 돌리면 너무 뾰족하게 깎여서 약간 부러지는 경향이 있더라고요. 깎이는 정도를 조절하고 싶으면 중간에 빼면 됩니다. 잘 쓰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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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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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8쪽 _ 신형철  

 

몇 년 전에 어떤 사람을 위로하려 했던 적이 있다. 아버지를 잃은 기혼 여성이었다. 나 역시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내가 그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어설프게 위로하려 했고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결혼을 하는 것도 보았고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후에 곱씹어볼 추억이 많이 쌓여 있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런 추억이 있기에 더 슬플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함께한 시간이 나에 비해 더욱 길었으므로 그녀가 느낀 상실감은 더욱 컸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과 내 경험이 완전히 같을 수도 없고 그 슬픔의 깊이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후로 어설픈 위로보다는 침묵을 택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일을 통해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타인을 슬프게 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오히려 그 타인의 슬픔에 무감각해질 수 있으며 그 이유가 원인을 제공한 자가 본인이라 추궁 당하는 느낌을 받아서라고도 나와 있는데 이와 비슷한 경험 역시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나의 내밀한 슬픔을 이해 받으려 했던 적이 있다. 단지 어떤 사건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게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상처 받은 것 같았고 나는 그 사람을 추궁할 생각이나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내가 그 사람을 상처 입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가 추궁 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사과를 했지만 나는 어떤 슬픔을 느꼈다. 온전히 이해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너와 내가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제목은 타인을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슬픔을 이야기한 것이라 한다.

 

어떤 책들은 읽고 나서 사랑하게 되는 책들이 있다. 이 책이 내게 그랬다. 슬픔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자신 뿐만 아니라 타인을 위해 울어줄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슬퍼할 줄 아는 사람은, 그런 사람의 존재는 그 자체로 희망이 된다.

그럴 때의 인간은 인간에서 사람이 된다. ‘동물의 일원이지만 다른 동물에서 볼 수 없는 고도의 지능을 소유하고 독특한 삶을 영위하는 고등동물’(인간)에서 ‘일정한 자격이나 품격을 갖춘 이’(사람)가 되는 것이다.

읽으면서 한번 더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이 책과의 만남은 예정된 것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신형철의 문학 사용법을 한겨레21 지면에서 만나며 나는 이 글들이 책으로 묶여 나온다면 그 책을 사서 읽을 것이라 생각했으니 말이다.


어떤 글들은 문학 사용법에서 읽었던 글들이었으나 다시 읽으면서도 또 한번 감동하고 밑줄 그었던 문장에 다시 밑줄을 그으며 읽었다.

내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문학평론가이기도 한 저자의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행복했고 여러 생각들을 했고 그런 생각과 만날 수 있게 해준 이 책에 감사했다.

세월호 사건 이후에 이제는 그만하자, 그만할 때도 되었다, 심지어는 지겹다라고 표현하는 댓글을 보고 슬픔을 느낀 적이 있었다. 타인의 가늠조차 하기 힘든 고통 앞에서 어떻게 지겹다는 말을 할 수 있는가. 나는 어떤 참담함을 느꼈다. 그래서 이 책의 앞장에 나오는 ‘당신의 지겨운 슬픔’이라는 제목의 글에 공감했다.

이 책은 이미 많이 읽히고 있는 것 같지만 (내가 이 책을 구매한 후 얼마 안 되어 이 책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슬픔에 대한 공부는 인간이 아닌 사람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라도 꼭 해야 하는 공부 같기에.

 

타인의 슬픔에 대해 ‘이제는 지겹다’라고 말하는 것은 참혹한 짓이다. 그러니 평생 동안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슬픔에 대한 공부일 것이다.


-졸고, <책을 엮으며>, <눈먼 자들의 국가>, 문학동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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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보다 : 봄-여름 2018 소설 보다
김봉곤.조남주.김혜진.정지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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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 책은 소설집인데 여러 작가의 단편 소설이 수록되어 있다.

챕터는 크게 봄과 여름으로 나뉘어져 있다. 봄에는 김봉곤의 소설 '시절과 기분', 조남주의 '가출'이 자리를 차지하며 여름에는 김혜진의 '다른 기억'과 정지돈의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가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김봉곤 작가의 소설은 내게 무해한 사람의 최은영 작가의 소설을 일부 떠올리게 했는데 그 이유는 그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 중 데자와가 나오기 때문이다. 이 책에도 데자와가 나온다. 데자와는 권해봄 PD의 인스타그램에서 처음 접해 이름을 알게 된 밀크티이다. 공교롭게도 최근에 읽은 책들에 데자와가 자주(?) 나오다 보니, 데자와가 왜 이렇게 많이 나오는 걸까? 일종의 PPL인가 하는 생각도 약간 들었지만 공대생과 명문대생들이 즐겨 마시는 음료수라고 한다. 그런 이미지를 심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 음료수를 등장시켰을까 하는 생각도 조금 해봤는데 잘은 모르겠다.

데자와 자체에 대한 호불호도 많이 갈린다고 하니 아마도 데자와를 나눠 먹는다는 것은 같은 음료수를 좋아하는 나와 당신의 관계가 얼마나 친밀한 것이었는가를 드러내기 위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살짝 들기는 했다. 김봉곤 작가는 자신의 이야기를 소설로 쓴다고 했고, 이 소설은 주인공이 게이이므로 김봉곤 작가가 게이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조금 리서치를 해보니 커밍아웃을 한 게이 소설가라고 한다. 현재는 게이이지만 소설 속 주인공은 과거 여자를 사귄 적이 있다. 이 소설은 그 여자를 만나러 가는 남자의 이야기를 다룬다.  소설 속 주인공은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으로 그려지기 때문에 양성애자로 보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시절과 기분은 지금은 동성애자가 된 내가 이성애자였던 과거의 나를 만나러 가는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아무튼 그때로 돌아가기에는 이성애자와 동성애자의 간극만큼이나 너무 멀리 와버렸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한 시절을 통과한 어떤 감정과 현재의 감정 사이의 간극에 대한 이야기, 좁혀지지 않는 차이에 관한 이야기로도 읽혔다.

조남주의 가출은 '아버지의 가출'이라는 사건과 맞닥뜨리는 가족이 등장한다. 아버지가 가출을 했지만 가족들은 적극적으로 아버지를 찾지 않는다. 일상은 그런대로 흘러가고 다들 그럭저럭 괜찮게 살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페미니즘 소설로 읽히기도 하는 '82년생 김지영'을 쓴 저자이기 때문에 가부장적인 아버지를 의도적으로 작가가 부재하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작가 인터뷰를 보니 의도적으로 가부장의 부재를 그렸다고 한다.

김혜진의 다른 기억은 '윤리의식'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다. 저마다 갖고 있는 윤리의식. 내게는 선善인 것이 그에게도 선인가 묻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떤 사건과 상황에 대한 해석이 각기 다른 데서 오는 소통의 부재와 관계의 단절을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지돈의 '빛은 어디에서나 온다'는 예전에 읽었던 '건축이냐 혁명이냐'와 같은 선상에 놓여진 작품 같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그다지 새롭게 느껴지지 않았다.

정지돈의 소설은 인물과 인물 사이에서 일어나는 어떤 일들에 관해서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기에 인간이 배제된 그의 소설은 사실 내게는 읽기 쉬운 작품은 아니었다. 이것을 새로움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을 것이지만 한결같은 그 인물의 서사에  관한 철저한 배제는 그의 작품 세계를 구성하며 어떤 스타일을 만들어낸 것 같다.

그러나 그로 인해 어떤 지루함과 식상함을 불러일으켰다. 만약 '건축이냐 혁명이냐'를 먼저 읽지 않고 이 작품으로 정지돈의 소설을 처음 접했다면 신선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인물이 보이지 않는 그의 소설을 읽으며 나는 문득 내가 인물이 선명하게 보이는 소설을 좋아하는구나라는 것을 느꼈다.

젊은 작가의 엄선된 신작을 계절마다 만나게 하기 위해 이렇게 계절별로 나눈 것 같지만 딱히 그렇게 나뉘지 않아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에 실린 작품들은 모두 계절과의 연관성은 그리 깊게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단순히 시리즈물로 기획하기 위해 붙여놓은 제목인 것 같아 약간 아쉬웠다. 작품을 하나의 주제와 키워드로 묶어서 네이밍을 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약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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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무해한 사람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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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와 리저드라는 영화가 있다. 어떤 사건으로 상처를 받은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 영화를 보면서 사람이 사람에게 상처를 주지 않고 살아가는 일은 어렵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저자는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다고 했다. 나 역시 무해한 사람이 되기를 바랐던 적이 있다. 그래서 이 책을 덮을 때 "나도 무해한 사람이 되고 싶었어요"라고 읊조렸는지도 모른다.

무해하다는 것은 해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자라온 환경이나 놓여 있는 상황이 다르면 그 다름이 사람 사이에 거리를 만들기도 한다. 때론 그 거리가 좁혀지지 않아 서로 등을 돌리게 되는 일들도 더러 일어난다.

그러니 무해한 사람이 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다름'을 '다름'으로 수용하고 있는 그대로 존중 하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나역시 그가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밀쳐낸 적은 없었을까. 존중 받기 원하는 마음,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싶은 마음. 그런 마음들을 이 책 속의 인물들에게서 읽었다.

속이 깊다거나 어른스럽다는 말은 적당하지 않았다.
이해라는 것, 그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택한 방법이었으니까.
(모래로 지은 집_최은영)


얼마전에 어떤 사람에게 어떤 일로 적의를 가졌다. 나는 그냥 내 깊은 마음 속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던 것뿐인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받아들여지지 않은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자신과 무관한 이야기를 자신과 관련지어 생각했고 그래서 상처 받은 것 같았다. 의도와 다르게 상처를 입혔으니 사과를 해야했다. 사과를 하면서도 너와 내가 다르다는 것이, 내가 이해를 받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는 과정이 주는 맛은 쓰디 썼다. 나는 그 사람이 나를 쉽게 어떤 사람이라 단정 짓는 것이 싫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문장을 책 속에서 접했을 때 왠지 위로 받는 기분이 들었다.

애쓰고 애쓰고 또 애써온 시간이 그애의 얼굴에 그대로 남아 있어서
나도 그애를 대할 때는 불성실하고 싶지 않았다.
무성의하게 공무가 이런저런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싶지 않았다.
(모래로 지은 집 _ 최은영)

그래 무성의한 것이었구나. 어떤 사람인지 더 알아보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쉽게 단정 짓는 것. 그렇게 규정되는 나의 존재가 나는 싫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어떤 사람이든 가까이 지냈다는 이유만으로, 그 시간의 무게로 사람을 쉽게 단정 짓는 실수를 저지르지 않으려 노력했었으니까. 그러면서 나는 그동안 내내 내가 그 사람에게 어쩌면 적의를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과 나의 관계가 깨진 접시처럼 산산조각 나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어쩌면 가깝다는 이유만으로. 가깝지만 먼 사이였는지도 모르겠다고 느끼며 시간을 보냈다고 말하지 못했다. 나 역시 솔직하지 못했다. 그리고 적의를 가졌던 것 같다. 표현할 것을 제때 표현하지 못해 쌓인 그 적의가 알게 모르게 그 사람을 상처 입힌 것은 아닐까.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내가 상처를 받고, 또 나 역시 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순간도 있었을지 모르는 것처럼.

그렇게 상처를 주고 받을 수밖에 없는 관계들 속에서도 무해함을 원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내게 무해한 사람을 찾고, 또 누군가에게 나 역시 무해한 사람이기를 바랐는지도.

늘 엄마를 만날 수 있었던 그때의 기다림을
윤희는 아프게 기억했다.
어른이 된 이후의 삶이란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려야 하는 일이었으니까.
윤희야, 온 마음으로 기뻐하며
그것을 기다린 자신을 반갑게 맞아주고
사랑해주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지나가는 밤 _ 최은영)



상처를 받고, 상처를 드러내지 않으려 애쓰고, 끝내 상처 받으며 삶을 견디는 나날들에 관한 이야기였던 것 같다.  읽으면서 나의 일을 생각했다. 나를 둘러싼 관계들을. 적의는 어쩌면 작은 오해에서 비롯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서. 그리고 또 우리는 상처 받는다. 그리고 상처 받을 것이다. 무해함은 어디에서 오는가. 사랑일 것이다. 존재에 대한 지극한 사랑. 그런 사랑을 가지고 싶은 마음 하나를 책을 덮으며 내 안에서 발견했으므로 이 책을 읽는 순간은 내게 유익했다.

초가을이었지만 새벽공기가 쌀쌀했다. 어릴 때처럼 주희는 이불을
발로 밀어내고 있었다. 윤희는 주희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이불을 들어 덮어줬다. 예전에 그랬던 것처럼.
윤희는 주희가 추워하지 않기를, 추워 잠에서 깨어나지 않기를,
따뜻한 단잠을 자기를 바랐다. 쌀쌀한 밤, 이불이라도 덮어줄 수 있는
사람으로 주희의 곁에 있다는 사실이 윤희의 마음에 작은 빛을 드리웠다.
(지나가는 밤_최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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