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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신형철 지음 / 한겨레출판 / 2018년 9월
평점 :
위로는 단지 뜨거운 인간애와 따뜻한 제스처로 가능한 것이 아니다. 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사람이 나를 위로할 수는 없다. 더 과감히 말하면, 위로받는다는 것은 이해받는다는 것이고, 이해란 곧 정확한 인식과 다른 것이 아니므로, 위로란 곧 인식이며 인식이 곧 위로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 38쪽 _ 신형철
몇 년 전에 어떤 사람을 위로하려 했던 적이 있다. 아버지를 잃은 기혼 여성이었다. 나 역시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내가 그녀의 슬픔을 이해할 수 있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어설프게 위로하려 했고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결혼을 하는 것도 보았고 그녀와 오랜 시간을 함께 했다. 오랜 시간 함께 했으니 후에 곱씹어볼 추억이 많이 쌓여 있어 좋겠다라고 생각할 수 있으나 그런 추억이 있기에 더 슬플 수도 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던 것이다. 함께한 시간이 나에 비해 더욱 길었으므로 그녀가 느낀 상실감은 더욱 컸을지도 모른다.
어떤 경험이든 타인의 경험과 내 경험이 완전히 같을 수도 없고 그 슬픔의 깊이도 사람에 따라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이후로 어설픈 위로보다는 침묵을 택했다. 다른 사람의 슬픔을 내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그때 일을 통해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 책에는 타인을 슬프게 한 원인을 제공한 사람이 오히려 그 타인의 슬픔에 무감각해질 수 있으며 그 이유가 원인을 제공한 자가 본인이라 추궁 당하는 느낌을 받아서라고도 나와 있는데 이와 비슷한 경험 역시 한 적이 있다. 어떤 사람에게 나의 내밀한 슬픔을 이해 받으려 했던 적이 있다. 단지 어떤 사건과 진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 사람에게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게는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상처 받은 것 같았고 나는 그 사람을 추궁할 생각이나 의도는 전혀 없었지만 내가 그 사람을 상처 입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가 추궁 당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그래서 사과를 했지만 나는 어떤 슬픔을 느꼈다. 온전히 이해 받을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너와 내가 다른 사람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재차 확인하는 데서 오는 슬픔이었다.
슬픔을 공부하는 슬픔이라는 제목은 타인을 슬픔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슬픔을 공부해야 하는 슬픔을 이야기한 것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