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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관조 씻기기 - 제31회 김수영 문학상 수상 시집 ㅣ 민음의 시 189
황인찬 지음 / 민음사 / 2012년 12월
평점 :
시인은 단어를 수집해서 바느질을 하듯 꼼꼼하게 연결해서 어떤 마음에서 파생된 의미를 들여다보게 하는 사람들 같다.
안 보이는 것을 눈앞에 펼쳐 보이는 것이 시인의 일이니까.
텍스트 시대를 넘어서 이미지를 소비하는 시대. 이 시대의 젊은 시인들의 시는 그래서 이미지로 가득 차 있다. 이미지는 물처럼 넘치고 흐른다. 어떤 건 윤슬처럼 반짝 빛이 나기도 하고 몇 개의 단어만 모스 부호처럼 남긴 채 스쳐 지나가기도 한다.
표지에 파란색 직사각형이 들어가 있는데 이 시집의 시를 색깔로 표현하면 파란색에 가깝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시를 읽으며 영화 아가씨의 한 장면이 떠오르기도 했다. 벚나무에 목을 매달아 죽은 아가씨의 어머니가 떠올랐다. 그래서 찾아보니 벚나무 아래 시체를 묻는다는 얘기가 있었다.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것은 그 아래 시체가 묻혀 있기 때문이라고. 죽음이 있기에 삶은 빛나고 인간의 시간은 유한하기에 벚꽃이 피는 봄은 슬프도록 아름다울 수 있다. 벚꽃의 화사함을 등지고 죽음을 선택하는 인간의 삶은 그래서 더 극적으로 죽음과 삶을 대비(對比)시키고 그래서 더 강렬하게 오래 남는다. 아가씨의 그 장면은 회화적으로 느껴졌던 유일한 장면이기도 했다.
건조과라는 시가 마음에 들어서 산 시집이었다.
'건조과'는 이 시집에서 가장 먼저 등장하는 시이기도 하다.
건조과 _ 황인찬
말린 과일에서 향기가 난다 책상 아래에 말린 과일이 있다
책상 아래에서 향기가 난다
나는 말린 과일을 주워 든다 말린 과일은 살찐 과일보다
가볍군 말린 과일은 미래의 과일이다
말린 과일의 표면이 쪼글쪼글하다
말린 과일은 당도가 높고, 식재료나 간식으로 사용된다
나는 말린 과일로 차를 끓인다
말린 과일은 뜨거운 물속에서도 말린 과일로 남는다
실내에서 향기가 난다
'말랭이'라고 불리는 말린 과일. 말라 비틀어져서도 뜨거운 물 속에서도 제 형태를 잃지 않는 말린 과일. 나로 남는 것. 어떤 고통이 가해져도 나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의 가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시였다. 깎고 다듬어 더 아름다워지려고 하는 욕망 사이에서 자기를 잃지 않으려는, 변형되지 않는 아름다움에 대해.
이 시집에서 가장 많이 알려진 시는 무화과 숲이지만. 고요한 응시가 있는 시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