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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인 ㅣ 최인훈 전집 2
최인훈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평점 :
최인훈 선생님의 <회색인>. 딱 50년 전인 1964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분단과 이데올로기, 전쟁 그리고 징그러운 독재를 거치면서 민족주의, 애국주의 등 집단적 이즘들의 강요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러한 이 나라의 독특한 사회 분위기를 이해할 수 있는 단초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개인적으로 대단히 훌륭한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제국주의를 대외정책으로 민주주의를 대내정책으로 쓸 수 있었던 저 자유자재한, 행복한 시대는 영원히 가고 우리는 지금 국제협조, 후진국 개발의 새 나팔이 야단스러운 새 유행 시대에 살고 있으니 민주주의의 거름으로 써야 할 식민지를 부앙 천지 어느 곳에서 손에 넣을 수 있으랴. 그러나 식민지 없는 민주주의는 크나큰 모험이다.
이런 고민을 하는 주인공에게 그가 존경하는 여자친구는 식민지의 대용물을 찾아야 한다고 말한다. 막 뺏고, 퍼내도 아깝지 않을 그런 것이 어디 있냐고 그가 반문하자 여자친구는 있다고 말한다.
바로 ‘사랑과 시간’이라고.
남자는 경악하여 넉넉히 십 분 남짓을 망연자실한 끝에 모기 소리만하게 대꾸한다.
‘여자여, 그대의 언(言)이 미(美)하도다’
그리고 그녀를 미친개처럼 키스하였다.
미국 유학을 다녀온 다른 여자가 그에게 미국에 갈 생각이 없냐고 묻자 그는 흥미없다고 말한다. 우리 민족 전체가 유학하고 있는 셈 아니냐고. 보는 것, 듣는 것, 행동하는 것 모두가 미국문화아니냐고. 앉아서 경험하는데 뭣 하러 돈 쓰고 가냐고.
여자는 그에게 내셔널리스트라고 말한다.
그는 그게 문제라고, 난 내셔널리스트가 아니라고, 국문학이라는 과가 내셔널리스트 되기에는 나쁘지 않은 분얀데 그렇게 안 된다고 말한다.
여자가 왜냐고 묻자 이렇게 답한다.
‘자신이 없어서 그렇죠’
주인공은 장광설을 펼치며 이야기하는데 요지는 이렇다.
한국문화가 서양문화를 몰아세울 앞날이 있는가? 없을 것이다. 춘향이는 절대 줄리엣이 될 수 없고 어차피 파마를 할 것이고 자동차를 타고 끝내는 재즈에 춤추고 급기야 이몽룡과의 사랑에도 권태에서 오는 저 무서운 사랑의 파국을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이 흐름이다.
이런 식의 지식인의 비겁하고 비관적인 태도 때문인지 ‘민족문학’을 추구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회색인>은 비판받기도 했다. 물론 주인공의 자조대로 비겁하고 나약하지만 지금 우리의 현실-혁명과 역사보다는 장미꽃과 사랑, 등산이 중요한 현실에서 애국주의, 민족주의를 생각해 보는데 훨씬 적확한 지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물론 이 정도의 감상만으로 <회색인>의 방대한 내용을 다 전할 수 없을 뿐더러 나도 모르는 곡해가 있을 수도 있다. 관심있는 분들은 한번 찬찬히 이 책을 읽어 보기를 권한다.
이런 가슴에 꽂히는 대목들이 많이 나온다.
혁명, 피, 역사, 정치, 자유 그런 낱말들이 그들의 자리를 풍성하게 만들고 있었으나, 그것들이 장미꽃, 저녁노을, 사랑, 모험, 등산 같은 말과 얼마나 다른지는 의문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는 그 무거운 낱말들-혁명, 피, 역사, 정치, 자유와 같은 사실의 책임을 질 만한 실제의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언어 뿐이었다. ‘사실’에 영향을 주고 ‘밖’을 움직이는 정치의 언어가 아니라 제 그림자를 쫒고 제 목소리가 되돌아온 메아리를 되씹는 수인(囚人)의 언어 속에 살고 있었다.
이런 부제들도 참 좋다.
청춘을 따르자니 부족이 울고 부족을 따르자니 청춘이 울더라.
생활,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맘만 먹으면 - 맘 먹는다는 게 좀 대단한 일이지만
하늘과 나만이 아는데 왜 악(惡)을 놓칠 것인가? - <생활의 발견>
이건 임어당의 글에서 발췌한 거 같은데 홍상수 감독님이 임어당 책을 보기 보다는 혹시 이 <회색인>을 보고 영화제목을 얻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