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사랑 백석 - 문학동네 글과 길 2
김자야 지음 / 문학동네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백석 시인의 시 중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한 편만 안다. 그것도 몇 해 전 아내가 소개해줘서 안 것이고 다 외우지도 못한다. 그러니까 누군가 백석의 위대함을 말할 때 나는 그 위대함의 실체를 정확히 모르는 것이다. 
단, 그 시에서 풍기는 샤갈의 그림같은 선연한 회화성과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라는 비장미의 언발란스가 매우 독특해서 단박에 뇌리에 꽂힌 기억이 있다. 무엇보다 흰당나귀가 좋았다. 당나귀는 얼마나 조형적으로 아름다운 동물인가. 게다가 흰당나귀라니. 최근에 안 사실인데 백석의 시들 중에 나귀와 당나귀가 종종 등장하곤 한다. 당나귀가 자유와 유토피아를 상징하는 것 같은데 그것뿐만 아니라 순수하게 조형적인 회화성을 시에 부여하고자 당나귀를 사용했으리라고 나 멋대로 생각해 보는 것이다. 
시인 백석에 대한 이야기는 여기까지. 그 백석이 첫눈에 꽂혀서 사랑한, 그리고 백석의 사랑 못지않게 백석을 사랑한 한 여자의 이야기가 내게는 더 흥미롭다. 자야 여사의 회고록 <내사랑 백석>이다. 

백석의 연인이었던 기생 김자야 여사의 이야기인데 백석의 문학성을 잘 모르는 나로서는 백석 자체를 읽는 것보다 더 흥미진진했다. 서양 인텔리들 식으로 말하자면 ‘자야로 백석 읽기’라고 해도 되려나. 아무튼 자야 여사는 위대한 시인 백석으로라기보다는 인간 백석을 사랑했기 때문에 더 와닿는 느낌이다. 

1936년, 고교 선생님이던 26세의 백석과 조선권번출신 기생이던 22세 김진향은 함흥의 한 술집에서 운명적으로 만났다. 두 사람 다 첫 눈에 반해 그 날로 사랑을 불태웠다. 백석은 김진향에게 자야라는 이름을 지어줬고 스스로 마누라라고 부르며 끔직히 사랑했다. 그 후로는 완고한 집안 출신의 인텔리 남자와 자유분방한 여자가 그 시대에 겪던 비극이 되풀이됐다. 자야는 자유분방 정도가 아니라 조선권번의 알아주는 기생이었으니 두 사람의 공식적인 결혼은 꿈도 못 꿀일이었다.

자야와 백석은 함흥을 떠나 서울에서 재회한다. 청진동에 비둘기집같은 살림을 차리고 여염부부처럼 알콩달콩하게 신혼살이를 하던 짧은 시간이 이들에겐 유일하게 행복했던 시절이다. 백석은 자야를 사랑하면서 다른 여자들과 세 번 결혼했다. 집안의 강경함에 거역하지 못하는 효자였던 백석은 세 번 강제로 결혼을 당하면서도 자야를 잊지 못했다. 내 멋대로의 생각이긴 하지만 그렇게 잊지 못하고 떨어질 수 없는 여자가 있다면 왜 더 결사적으로 결혼을 거부하지 못했을까 답답할 정도다. 백석에게 첫날밤부터 소박을 당한 그 세 여자들은 뭐란 말인가. 자야 여사 못지않게 시름으로 나날을 보냈을지 모르는 그 여인네들의 인생궤적도 궁금하기 이를데 없다. 

결국 백석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만주로 떠나기로 작정한다. 이놈의 땅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맘 편하게 몸을 누일 집이 없다는 절박한 심정이었으리라. 백석은 자야에게 함께 떠나자고 간곡하게 말한다. 자야는 백석이 겪은 수차례의 고초를 아는데다 스스로 괴로워서 몇 번을 도망친 경험이 있는지라 거절한다. 결국 백석은 홀로 만주로 떠나버리고 만다. 훗날 회고를 통해 자야는 함께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백석의 앞날을 위해 훗날에 만날 것을 기약하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 이별이 두 사람에겐 영영 이별이었다. 백석은 만주에서 해방을 맞았고 고향 정주에서 머물다가 분단이 되면서 그대로 월북시인이 되어버렸다. 이후 그의 행적도 생사도 알려지지 않는다. 

세상 이꼴 저꼴 다 보기싫고 사랑하는 이와 함께 어딘가 틀어박혀 세월을 보내고 싶은 소망은 이미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에서 예견되고 있다. 
시 속의 나타샤는 바로 자야였던 것이다. 아름다웠던 청진동 시절 백석과 자야는 당시 단성사에서 개봉했던 <전쟁과 평화>를 보러 간 적이 있다. 자야는 영화를 보는 도중에 백석의 등 뒤로 얼굴을 숨겼다고 한다. 나중에 백석이 물으니 나타샤가 짤똥한 자기와는 너무 다른 팔등신에 엄청난 미인이라서 부끄러워서 숨었다고 자야는 대답했다. 백석은 이렇게 말한다. 
“나 원 참! 난 또 극장에서 어떤 보지 못할 사람이라도 와서 그러는가 했지! 도대체 여자들이란 쓸데없는 데 신경을 써서 남자의 마음을 단련시킨단 말이야!”

역시 청진동 시절, 어느 가을 휴일에 백석과 자야는 서울 근교 광릉으로 나들이를 나갔다. 새파란 하늘과 울긋불긋한 단풍이 그렇게 예쁠 수 없었다고 자야 여사는 회고한다. 개울가를 지날 때 자야를 업은 백석이 발을 헛디뎌 옷이 다 젖었는데 마침 지나가던 노인이 옷을 말리고 가라고 해서 노인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게 된다. 따뜻한 아랫목은 옷을 말리기 위해 내 주고 자야와 백석은 추운 한데서 꼭 끌어안고 밤을 보낸다. 이때 자야는 이런 생각을 한다. “나는 내 소학 동창 중 한 사람의 친언니가 십 년 전 첫날밤에 소박을 당했던 불쌍한 처지를 생각해 본다. 그러한 두 내외를 데려다가 이런 방에 가두어두면 십 년 소박쯤이야 저절로 해결될 수 있었으리라.”
이 대목에선 나도 코 끝이 찡했는데 백석은 집에 와서 엉뚱한 말을 한다. “그 작은 몸에 웬 무게가? 정말 만만치 않았어!”

얼마나 아름답고 귀여운 연인들인가. 나는 아무래도 백석을 시인으로보다는 로맨틱드라마의 귀여운 주인공으로 더 기억할 것 같다. 그리고 만약 백석이 지금 살아있다면 시를 논하기 보다는 인간 백석으로 만나 농을 지껄이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친구가 될 것만 같다. 

백석의 유명한 시 ‘나와 나타샤와 흰당나귀’ 전문을 옮긴다. 오늘밤 눈이 푹푹 나리기를 바라며.

가난한 내가
아름다운 나타샤를 사랑해서
오늘밤은 푹푹 눈이 나린다

나타샤는 사랑을 하고
눈은 푹푹 날리고
나는 혼자 쓸쓸히 앉어 燒酒(소주)를 마신다
燒酒를 마시며 생각한다
나타샤와 나는
눈이 푹푹 쌓이는 밤 흰당나귀 타고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눈이 푹푹 나리고
나는 나타샤를 생각하고
나타샤가 아니 올 리 없다
언제 벌써 내 속에 고조곤히 와 이야기한다
산골로 가는 것은 세상한테 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 같은 건 더러워서 버리는 것이다

눈은 푹푹 나리고
아름다운 나타샤는 나를 사랑하고
어데서 흰당나귀도 오늘밤이 좋아서 응앙응앙 울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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