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고요 산책길 - 나무 심는 남자가 들려주는 수목원의 사계
한상경 지음 / 샘터사 / 2014년 5월
평점 :
품절


 

 

 

 

 

 

 

 

 

 

대구수목원은 대구 인근의 사람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휴식공간이다. 봄과 가을에 걸쳐 꽃 축제를 하고 가끔 묘목 나누기 행사도 한다.

하지만 수목원을 거닐며 느긋하고 여유롭게 사색을 했던 기억보다는 바삐 걸어 완주했던 기억이 더 많았다.

치유나 사색보다는 특별한 축제나 코스정도가 되어버려 정작 수목원의 묘미에는 푹 젖지 못했다.

아침고요수목원의 설립자이자 상록수의 이상주의자이기도 한 한상경 교수는 4계절의 아침고요수목원을 통해 자연과 삶이 주는 통찰과 기쁨을 선사하고 있다.

 

 

<아침고요산책길>의 저자, 한상경 교수는 불혹을 지나 전공 분야인 과수원예학 대신 원예미학을 공부하고자 U.C Davis로 터를 옮겼다.

지인들에게, 제자들에게, 나에게, 나의 자화상은 어떻게 남을 것이며, 또 어떻게 남기고 싶은가?라는 물음에서 시작된 행보였다.

무엇보다 저자는 무엇이 한국 자연의 아름다움인가, 한국식 정원이란 무엇인가, 동양 다른 나라의 정원과 무엇이 다른가에 대한 고민을 안고 있었다.

결국, 곡선과 비대칭의 균형이 한국식 정원의 미이며 자연에 가까운 미가 가장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아침고요산책길 이다.

<아침고요산책길>에는 저자의 일대기도 감동적이지만 깊은 사유에서 비롯된 주옥같은 글들이 나를 부끄럽게 한다.

 

 

花無十日紅’, 화무십일홍.

우리에게 만개한 꽃이 허락된 시간은 1365일 중, 10여일 뿐이다.

10일을 제외한 나머지 355일은 이름 없는 야생초의 모습처럼 을씨년스럽고 볼 품 없어 보인다.

꽃과 꽃 사이의 간극이 상당할진데 언제나 꽃을 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수목원을 찾곤 했다. 그리고 꽃이 없는 대다수의 기간에 실망했다.

꽃 필 다음 계절을 향한 기다림’, 그 쉼표를 읽을 줄 몰랐다. 꽃이 진 기간을 초췌함으로만 바라본 미숙함과 만개한 꽃만 찾아 카메라 셔터를 누른 어리석음이 저자의 글을 통해 보이기 시작한다. 꽃 과 꽃의 사이, 희망과 희망의 사이가 중요하다. 10일간의 꽃을 피우기 위해 준비하고 인고하는 355일의 가치를 왜 여지껏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을까. ‘조화인생이 아닌 이상 언제나 만개해 있을 수만은 없는 게 우리 삶인데도 말이다.

 

 

너와 나의 간극.

한쪽 가지가 없는 두 나무를 어울려 심었다. 가지가 없는 쪽을 서로 채워줄 것이다. 서로의 부족을 채워주는 두 나무는 실로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94-99)

반쪽씩 부족한 나무들이 함께하게 됬지만, ‘함께 머문다는 것은 조심스러운 일이다.

서로에게 친구도 되지만 햇볕을 가려서 그늘을 던지는 부담스러운 존재가 되기 때문이다.

이건 마치 누가 누구에게 걸림돌이 되는 관계와 같음이다. 또한 우열의 비교가 되는 만남 역시 행복한 만남은 아니다.

누구의 월등함과 수려함에, 주눅 들고 왜소해지는 만남도 고통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하여 함께 함으로 부족한 부분이 가려지고 채워지는 만남, 아픔이 감싸지는 만남이야말로 아름답지 않을까.

독야청청 홀로 푸르른 나무는 현실세계와 다른 멋진 풍광이어서 액자 속 그림 같은 감동이 온다.

하지만 얼싸안은 두 나무는 현실세계에서 겪는 우리네 모습이 그려져 가슴을 전율케하는 감동이 온다.

액자 속 그림같은 감동은 요란한 감탄사와 함께 사진기에 담기지만, 가슴을 전율케하는 감동은 외마디 감탄사마저 없이 훅하고 다가와 가슴에 담긴다

 두 나무가 한 나무일리는 없다. 두 나무가 한 나무처럼 보일 필요도 없다.

다만 두 나무가 서로의 뿌리 내릴 거리만 유지한 체, 어울려 살 수만 있다면 가장 좋은 만남이지 않을까.

문득 이은조의 <수박>, ‘비자림에서 통찰하는 대목이 떠오른다.

비자나무와 덩굴이 각자의 뿌리에서 독립적으로 자라나오지만 일정한 거리와 평행선을 유지하며 나란히 성장하는 모습을 유지한다. 각자의 색을 묻어두고 겹치는 색깔로 살아가기를 원했던 것은 아닐까

반쪽씩 부족한 너와 나의 간극은 꼭 필요하다. ‘함께 머문다는 것은 너와 나의 색을 가지고 어울리는 것이다.

 

 

살아짐사라짐

우뚝 솟은 나무가 바라보는 태양조차 생명마다의 지분이 있다. 바라보는 태양 뒤로 기울어지는 그늘조차 잊지말아야 한다.

태양조차 온전히 제껏이기만 한 것은 아니기에 우리 삶 속에서도 나의 그늘로 누군가에게 괴로움을 주지는 않는지 성찰할 일이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또는 모임에서 나는 누군가의 길을 막거나 누군가의 그늘이었던 적이 있던가.

그걸 알고 난 후의 반성은 햇빛의 차양막을 스스로 걷어내는 자기희생이자 숭고함이다.

아직 그런 고매한 성품까지는 이르지 못했을지언정, 주위를 둘러보는 몸가짐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살아짐은 또한 사라짐이니, 온전히 내 것이기만 한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더 내려놓아야할 때에 애타지 않았으면 한다.

 

<아침고요산책길>을 통해 촉촉하게 내리는 적요의 사색에 젖기를 바란다.

 

 

 

    (보듬)  원문은  http://thinker777.blog.me/220052161560 에 있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