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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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어가면서


처음에 당황을 했습니다. 분명히 새 책을 시켰는데, 누군가가 책을 선물해줬던 것을 판 것 처럼 이렇게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교수님의 사인을 이 앞에 인쇄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난한 "항상 건강하시길"이란 말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저의 시력도, 저의 시선도 건강하지 않았구나, 책을 덮으면서 스친 이 문구가 저를 찔렀습니다.

부끄러워져 괜히 깨끗한 안경알을 다시 닦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읽었어요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곳은 어디일까요?


과학은 조금 더 작은 세계를, 인문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합니다.


그리고 이 두 "학"은 "인간"을 접점으로 이어집니다. 그중 하나의 학문이 생물학이고, 조금 더 "사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문이 "의학"입니다.


김승섭 교수님은 이 책에서 "인간의 몸"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통해, 그 지식을 만든 사람들의 "시선"을 읽어냅니다. 그는 그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읽어냅니다. 그리고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을 질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할까?"

"우리는 지금 바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많은 시선이 많은 권력이 된 지금, 우리가 가져야할 시선은 무엇일까?"


그리고, 김승섭 교수님은 이 책 전체를 통해 대답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노루의 곡식창고

1.

p6, 이후 백산을 떠올릴 때마다 묻곤 했습니다. 어떻게 그 자그마한 언덕이 존엄하게 살고 존업하게 죽고자 하는 사람들의 꿈을 감당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요.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었던 그 일상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언제든 오를 수 있었던 그 낮음 때문이었을까. 제 공부가 어떤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백산으로부터 배우고 싶었습니다.

교수님의 이 문장 앞에서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과학자가 되려 했고, 또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며 뽐내왔던지 기억이났습니다. 


저는 그저 나의 행동과 말과 생각들을, 내 삶의 가치를 인정해 달라고 투정부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을 스스로 납득할수도, 인정해 줄수도 없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2.

p6,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은 다양한 관점이 각축하는 전장입니다. 저는 그관점들이 모두 동등한 수준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에서 소위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눈길을 주고, 권위에 굴하지 않고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여러 가설과 경쟁하며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관점들이 그렇지 못한 관점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의미를 준다고 믿습니다.
p50, 아직까지 근거는 없지만 담배회사의 주장대로 전자담배가 기존의 담배에 빟 덜 위험하다고 가정하고, 동시에 흡연자 중 상당수가 기존의 궐련 담배 대신 ' 덜 위험한 전자담배'를 이용해 사망자 숫자를 30%가까이 줄일 수 있다고 가정해보지요. 

그렇다 해도 여전히 4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흡연으로 인해 사망하고, 여전히 담배는 가장 많은 사람을 조기사망에 이르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남게 됩니다. 그 변화가 사소한 차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우리 사회가 목표로 하는 결과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독서 토론에서 목표를 위해 타협을 하는 얘기가 오고가던 중 "가벼운 혐오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라는 구절을 한 선배님께서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김승섭 교수님의 책이 뜨거웠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저 믿음을 바탕으로 의사, 교수, 과학자라는 이름으로 뜨겁게 연구할 수 있었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덜 위험한 전자담배" 속에도 "가벼운 혐오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전혀 가볍지 않아 보입니다. 가벼운게 아니라 겁나 무거우면서, 가벼운 척하는 듯 보입니다. 아니면 실제로 자기자신까지 속였든지 말이에요.


그리고 또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믿음 위에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뜨겁든지, 차갑든지.



3.

p87, 일제 강점기의 인종주의 과학은 실증적, 정령적 측정이라는 측면에서 과학의 외피를 둘렀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통치해야 하는 '이웃집 원주민'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식민 지배의 합리화라는 정답을 정해놓고 그에 부합하는 근거를 수집하는 작업이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이 연구들을 과학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입니다.
p85, 백인제는 경성의전을 전 학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이자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반발해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10개월 옥살이를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거럼에도 경성의전에서의 혈액형 조사 연구 이후, 일본인은 진화의 중간형이고, 조선인은 그보다 못하다는 말을 남깁니다. 당대 최고의 수재 중 한 명이었던 그조차 '과학적 권위'에 굴복했던 것이지요. 당시 조선에서 '과학'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면입니다.


이 부분을 읽고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기사들을 기사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와 같이, 논문과 기사가 만들어내는 과학자와 기자의 시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새겼습니다. 


또, 백인제의 경우처럼 그 가짜 논문과 기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못했을 때 발생되는 "허위의 강력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이 부분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논문의 비판적 수용 없이 받아들여 큰 파장을 주었던 "황우석 사건" 그리고 사실확인 없이 기사를 퍼 나르면서 발생한 "204번 버스 사건"은 아직도 "논문"과 "기사"의 탈을 쓴 거짓말에 맹목적인 믿음을 얹음으로써 생기는 힘들의 횡포가 빈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저도 사람들도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실에는 말이죠. 논문이든 기사든, 그것을 팩트체크 하든 하지 않든 결국에는 두 믿음이 부딪히고 있는 것 아닐까요.


믿음을 믿기 위한 믿음과 믿음을 믿지 않기 위한 믿음이.

 


4.

p124, 그러나 당대 여러 역량의 한계 속에서, 조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최선인가를 고민하고, 그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생각해내고 현실을 바꾸어나간 과정이 저는 놀랍습니다.

"조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장 중요한 최초의 시작, 시선을 던지는 나를 위해서 하는 그 행동들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인가 다시 묻게되었습니다.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생각해내고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과정'은 담배회사가 더 탁월하지 않나요? 다만 같은 사람들을 보고도, 다른 위치에서 보는 시선으로 인하여 서로 다른 행동을 하게됩니다. 결과적으로, 한 사람은 그들의 삶과 건강을 증진시켰고, 한 사람은 저해하였습니다. 그 두 결과 모두,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5.

p153, 건강은 사랑하고 일하고 도전하기 위한 삶의 기본 조건입니다. 건강이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선배님꼐서, 이 문장을 읽으시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최근에 위경련으로 2~3일을 정말 아파하며 집에 있었는데, 늦은시각 병원에 갈 것을 고민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선배님이 가장 첫번째로 한 일은 응급진료 비용을 검색하는 것이였다고 합니다. 18만원 정도의 응급진료 비용을 보고, 그 다음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씁쓸했지만,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저도 별반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책에서 이야기 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수 없는 것이니까요. 


 



6.

p175, 한국사회는 '혼혈인'들에게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피부색만으로 스스로를 열등한 2등 시민이라고 낙인찍게 만드는 사회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재화된 인종차별은 교육, 노동, 사랑가지 삶의 전면에서 스스로의 삶을 옥죄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스스로 믿게 만드니까요.

비단 혼혈만의 이야기일까요? 금·은·흙·다이야 수저로 분류되는 우리들은 색보다도 더한 "원료"로써 서로와 자신을 차별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7.

p241, 그러나 우리가 과학의 목소리를 신뢰하는 것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합리적 사고 과정 때문이지, 그 결론이 진리를 담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과학은 어떤 사실에 다가기 위한, 새로운 시선으로 현상을 관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자체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종교이고, 자연과 현상에 대한 가시적인 결과를 뽑아주는 도구가 과학이니까요. 한 다큐멘터리에서의 이야기처럼, 상어와 사자는 싸울수 없지 않을까요? 만날 수가 없으니.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세상을 봐야 할까


책을 보다가도 답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지, 그런데 뭘 어쩌라고, 내가 바꿀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태어났을 때 부터도 이랬는 걸. 결국 모두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반하는 것 아닌가? 사회의 책임이 있다면 사회를 어떻게 고칠건데?" 속에서는 계속 불평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건강한가? 괜찮은가 물으니 괜찮지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내가 그나마 조금 바꿔볼 수 있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저 질문을 잃지 않는 것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추신: 전적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진짜 재미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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