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일지 - MBC 느낌표 선정도서, 보급판, 백범 김구 자서전
김구 지음, 도진순 주해 / 돌베개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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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바이트를 구했습니다!


최근 친구가 대학원에 입학한 덕에, 아르바이트 자리를 하나 얻었습니다.

몇 년 전부터 있었던 만화 카페인데, 만화와 음료, 음식까지 같이 즐길 수 있는 곳입니다.

카페 아르바이트는 처음이라 걱정이 많았지만, 3주 동안 주말마다 일을 하다 보니 금방 손에 익어 여유가 생겼습니다.




3주 만에 발견한 하나의 패턴


최근에 하나의 패턴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손님과 마주할 때는 딱 세 번입니다. 손님이 들어올 때와, 손님이 나가실 때, 손님이 나가고 난 뒤입니다. 


이미 나간 손님을 어디서 만날 수 있냐고요?

바로 손님이 머물다간 자리입니다. 손님이 머물다간 자리에도 손님을 분명히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방문한 손님들은 모두 다 다르지만, 손님이 머물던 자리는 몇 가지 모습으로 유형화시킬 수 있습니다.


첫째, 들어왔던 자리 그대로 (어떤 방식으로도 정리를 한)

둘째, 쿠션과 담요가 살짝 흐트러진 채

셋째, 두 번째 경우에 만화책, 먹거리, 쓰레기까지 남아있는

이렇게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남아있다 하더라도, 정리하고 청소를 하는 건 저의 일입니다. 제가 맡은 업무는

다른 손님이 사용하실 수 있도록 원상태로 되돌려 놓는 것이니까요. 또한 위의 세 가지의 어떤 경우더라도, 하는 일의 양이나 시간은 비슷합니다.

이 곳의 기준대로 담요와 쿠션의 위치를 돌려놓고, 바닥을 찍찍이로 밀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은 반드시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손님의 모습과 남긴 자리


제가 이번 글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저와 마주한 사람들의 모습"과 "지나간 흔적"의 모습이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에게 보이는 손님들의 모습도 3가지로 분류를 할 수 있습니다.

손님들은 웃는 모습이거나 , 무표정이시거나, 어쩐 일인지 찡그린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이 모습들은 경험상 90% 이상으로 상관관계를 가집니다.


웃으며 오신 분들은 들어왔던 자리을 원래대로 만들어 놓으시려 하고

무표정이신 분들은 자리가 쿠션이나 담요로 살짝 흐트러진 정도로만 두고 가십니다.

찡그리신 표정으로 오신 분들의 자리는 그 자리도 표정을 찡그리고 있습니다.


"아 손님의 표정이랑 자리의 표정이 비슷하구나!"라는 생각이 드니

이제까지 제가 남긴 자리들의 표정은 어땠는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분명히 매번 그 표정들은 달랐다는 것이었습니다. 

집, 침대 위의 표정과, 아침에 들른 카페 테이블 위에서의 표정, 도서관에서의 표정은 다 달랐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대하는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이었습니다.


집에서는 신경 쓸 필요 없으니 그대로였고, 카페에서는 치워줄 사람이 있으니 흐트러져 있었고, 도서관에서는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닿는 곳이기에 최대한 깨끗이 사용한 것이었습니다.

아마 그 자리 그대로, 그 공간에서의 저의 표정도 그대로 드러났을 것입니다. 






노루의 곡식창고


백범 김구 선생님의 ‘백범일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소 길긴 하지만, 정말 재미있는 부분이라 발췌를 했습니다.


백범일지, 도진순 주해

pp. 36~37, 드디어 나는 과거에 대한 의문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위의 몇 가지 현상만 보아도 과거가 무슨 필요가 있으며 무슨 가치가 있는가? 내가 심혈을 다하여 장래를 개척하기 위해 공부하는 것인데, 선비가 되는 유일한 통로인 과거장의 꼬락서니가 이 모양이니, 내가 시(詩)·부(賦)를 지어 과문6체(科文六體)에 능통하더라도 아무 선생 아무 접장 모양으로 과거장의 대서업자에 불과할 것이니 나도 이제 다른 길을 연구하리라 결심하였다. 

나는 이처럼 과거길에서 불쾌한 느낌과 비관적인 생각만 품은 채 집으로 돌아와 아버님과 상의하였다.

"제가 어떻게든 공부로 입신양명(立身揚名)하여 강가·이가에게 당한 압제를 면할까 하였는데, 그 유일한 방법이라는 과거장의 폐해가 이와 같은즉, 제 비록 큰 선비가 되어 학력으로 강·이씨를 압도하더라도 그들에게는 엽전의 마력이 있는데 어찌하오리까. 또한 큰 선비가 되도록 공부를 하려면 다소의 금전이라도 있어야 하는데, 집안이 이같이 가난하니 앞으로 서당 공부를 그만두겠습니다."

아버님 역시 옳게 여기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 그러면 풍수공부나 관상공부를 해보아라. 풍수에 능해 명당에 조상을 모시면 자손이 복록을 누리게 되고, 관상을 잘 보면 선한 사람과 군자를 만날 수 있다."

나는 이치에 맞는 말이라 생각되어 "그것을 공부하여 보겠습니다. 서적을 얻어주십시오."하고 부탁하였다.

아버님이 우선 "마의상서(麻衣相書)" 한 권을 빌려주셔서 나는 독방에서 이것을 공부하였다. 관상서를 공부하는 방법은 먼저 거울로 자신의 상(相)을 보면서 부위와 개념을 익힌 다음, 다른 사람의 상으로 확대·적용해 나가는 것이 첩경이다. 
나는 두문불출하고 석 달 동안이나 내 상을 관상학에 따라 면밀하게 관찰하였다. 그러나 어느 한 군데도 귀격(貴格)·부격(富格)의 좋은 상은 없고, 얼굴과 온몸에 천격(賤格)·빈격(貧格)·흉격(凶格)밖에 없다. 
과거장에서 얻은 비관에서 벗어나기 위해 관상서를 공부했는데 오히려 과거장 이상의 비관에 빠져버렸다. 짐승과 같이 살기 위해 산다면 모르지만 인간으로서 세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어졌다. 그런데 "상서" 중에 이런 구절이 있다.

상 좋은 것이 몸 좋은 것만 못하고(相好不如身好)
몸 좋은 것이 마음 좋은 것만 못하다(身好不如心好)

이것을 보고 나는 상 좋은 사람(好相人)보다 마음 좋은 사람(好心人)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였다. 이제부터 밖을 가꾸는 외적 수양에는 무관심하고 마음을 닦는 내적 수양에 힘써 사람 구실을 하겠다고 마음먹으니, 종전에 공부 잘하여 과거하고 벼슬하여 천한 신세에서 벗어나겠다는 생각은 순전히 허영이고 망상이요, 마음 좋은 사람이 취할 바 아니라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마음 좋지 못한 사람이 마음 좋은 사람으로 되는 방법이 있는가 스스로 물어보니 역시 막연하였다.


김구 선생님은 과거를 보려고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17세에 관상과 풍수지리를 공부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방에만 틀어박혀 관상 공부를 한 지 어언 2달, 어린 김창수(김구 선생님의 개명 전 이름)는 관상 공부를 포기하는 지경에 이릅니다.


관상 공부는 자신의 얼굴로 연습을 한 뒤, 차츰 주변 사람의 관상을 보며 데이터를 축적시킨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사람이 데이터베이스(이미지)를 모으고, 그 사람만의 알고리즘을 이용해 얼굴 모양에 대한 판별을 하여 사람의 성격, 과거, 미래, 재산 등을 파악한다는 것입니다.


관상 공부를 하며, 자신의 얼굴에 대한 관상을 본 김창수는 자신의 얼굴이 상놈 중의 상놈이어서 복을 찾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갑자기 관상이야기를 꺼낸 것은, 그다음 이야기 때문입니다.

어린 김구 선생님께서는 상서에  나오는 이 구절에 인생을 걸기로 했다고 합니다.

몸이 좋은 사람은 상이 좋은 사람을 이길 수 없고
상이 좋은 사람은 마음이 좋은 사람을 이길 수 없다.


이 격언을 보신 김구 선생님은 "마음 좋은 사람"이 되길 정하시고 다시 길을 떠나십니다.

이후의 행적에 대해서는, 여러분도 익히 알고 계시겠죠.


관상이나 손금이나 발금은 항상 변한다고 합니다.

그 말은 즉, 몸의 행적이 쌓여 보여지는 "상"들이 "운명"을 결정할 수는 없다는 말이겠지요.


만화 카페에서의 저의 경험도 그랬습니다.

처음 들어오실 때의 표정이 좋지 않았더라도, 나갈 때의 자리에는 웃는 얼굴을 남겨 놓으신 분들이 계셨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정말 다행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보는 관상이나 이미지의 한계도 명확히 보입니다.

결국 이미지란 이제까지의 나의 마음과 말과 행동의 결과일 뿐이구나!

그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 이후의 모습까지는 결정할 수 없구나!


이런 생각이 드니, 손님들을 보고 넌지시 혼자 어림짐작하던 습관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 좋은 마음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를 맞이하는 사람들과 내가 지나간 자리에는 어떤 표정이 남겨질까 항상 고민하고 신중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다짐하면서 글을 마치겠습니다.

"마음 좋은 사람이 되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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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현재사 - 당신이 말하는 청년은 ‘우리’가 아니다
김창인.전병찬.안태언 지음, 청년담론 / 시대의창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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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고른 이유는


고등학교 친구 하나가 이제 군대를 가게 되었습니다. 약대를 이제 막 졸업한 친구는, 이제 마지막으로 군대를 졸업하기 위해 4월 15일에 입대를 합니다.


저도 어차피 놀겠다, 둘이 재미있는 것  없을까 생각하다 나온 것이 책을 읽고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개도 저도 여행도 좋아하지 않고, 그렇다고 지금 게임을 같은걸 하지도 않으니 고등학교 때처럼 주제 잡고 이야기나 해보려고 했습니다. 


무엇에 관하여 이야기를 해볼까 고민하다 걸린 것이 "청년"이라는 키워드였습니다. 그리고 알라딘에서 책을 검색하다 우연히 "청년현재사"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당신이 말하는 청년은 '우리'가 아니다



도대체 청년이 무엇이길레, 이렇게 책 표지에서부터 단호하게 거절하고 있는 것일까요?

여기서의 당신은 또 누구고, 우리는 또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청년이 무엇일까 표지에서 고민을 시작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또 남들이 생각하기에 저는 청년이 맞았습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은 저를 "학생"이라고 불렀고, 아이의 손을 잡은 아주머니들은 저를 보고 "삼촌, 형아"이라고 불렀으니까요. 제가 생각하기에도 아직 "아저씨"는 아니라고 생각하니 청년이 분명 맞는 것 같습니다. 


이것처럼 보통, 청년을 말한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학생. 젊음, 청춘 등이 떠오릅니다. 수치적으로는 나이로 보는 것이 맞으려나요?


그렇다면, 이 부제에서 나온 "당신"은 누구일까요?


너 청년이니까 힘들지? 그렇지? 그렇다고 말해. 


목차를 읽기도 전에, 만난 프롤로그에서 "당신"의 정체를 알 수 있었습니다.

p13, 청년 문제에 대한 청년들의 괴리감은 '힘듦의 정도'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힘듦'을 다루는 방식에서 나온다. 애초에 '얼마나 힘드냐'라고 질문하고 접근하는 방식 자체가 끊임없이 청년들 스스로 힘듦을 증명하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p14, 그런데 뉴스와 정치권에서는 청년들이 왜 힘든지에 대한 깊은 고민 없이 그저 '청년들이 힘들다'는 사실만 부각시키려고 한다.


당신의 정체는 청년들이 힘들다는 사실만을 부각시키려는 "뉴스와 정치권"이었습니다. 저도 뉴스를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었습니다. "아 애들은 빛이 1,000만 원씩 있다는데, 나는 없어서 다행이다. 뭐 일자리 문제야, 내가 공부한 생물학이라는 학문의 특수성 때문도 있지...", 티브이를 보면서 스쳤던 생각은 "나는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다." 뿐이었습니다. 


 당신(언론과 정치권)이 말하는 청년은 내가 아니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만들어진 이미지는 나를 불쌍한 세대, 사람, 청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내 친구들을 불쌍하게 바라보도록 했습니다. 


언론이 모든 사람의 말을 대변하지 않고, 특정 집단의 말만을 반복할 때, 사람들의 언로(言路)와 사고는 막힙니다. 그리고 흐르지 않는 말과 생각은 썩고, 고정관념, 프레임이라는 찌꺼기로 남게 됩니다.



이렇게 책에서 콕 집어주니, 갑자기 화가 났던 것 같습니다. 힘듦에 대해서 알리는 것도 언론과 정치가 해야 할 일이지만, 그것만 하는 것은 선동이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누군가의 이익과 유지 그리고 고정관념을 만들기 위한.


과연 청년 문제를 다루는 미디어가 만들어내는 콘텐츠들에는 어떤 맥락이 숨어 있을까요? 왜 "청년"이 '힘든 청년"이 되어야만 했을까요?


청년 : 낡은 것을 받아들여, 낡은 사람이 될 것인가?


p14, 그래서 이건 누구나 알고 있지만, '아무도 몰랐던 청년'들의 이야기다. 모두 병들었지만 아무도 아프지 않은, 그런 청년들의 이야기다.

"청년 현재사"는 "당신들"이 애써 말하지 않아 왔던 청년들의 모습과, 청년들의 문제의 원인과 해결책에 대해 제시해줍니다. 


저도 곳곳에 있는 인터뷰에 응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내가 아는 청년은 정말 적었구나" 생각이 들며, 놀라웠습니다. 


또, 멀게만 느껴졌던 일자리 문제,  주거 문제, 출산 문제를 보는 시선들과 실현 가능한 해결책들을 소개해준 부분에서는 "아 그런 방법도 있었구나!" 생각이 들며, 투표를 할 때 꼭 고려해야겠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그 얘기들 다 알고 있지만 모른 척하고 있었던 것들 아니야?"  "여러 문제들이 복합되어 있겠지, 알잖아 모두, 원데이 투데이도 아니고..." "당신, 기성세대도 청년 아니었나?, 이렇게 말하고 생각하는 우리들도, 그들과 똑같은 자리에 갔을 때, 그렇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할 수 있나?"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책은 먼저 "청년이 누구인가"에 대해 고찰하고 청년을 단순히 세대가 아닌 "미래 가치"로 세울 것을 주장합니다. 청년이라는 세대의 문제는, 한국 사회의 병폐들과 가장 가깝게 맞닿아 있는 문제이기 때문에 청년 문제를 다른 세대 문제와 구별되게 이야기해야 한다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청년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사회의 미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며, 청년 스스로의 가능성을 증명할 수 있는 세대론을 정립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은 "청년을 바라보는 기성세대의 시선"에 대해 비판합니다. 또, 그 의도적인 눈빛들로부터 피할 근거들을 던져줍니다. 그리고 그 시선을 부정하고 낡은 것으로 바라볼 것을 요구합니다.

 

"청년"은 낡은 것을 답습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고리를 만드는 역할을 되찾아와야 한다고 소리칩니다.

 

"세상을 바꾸자"

노루의 곡식창고


1, WHO : 청년은 누구인가?, 소결 : 청년의 정체성을 새롭게 규정하자

p37, 결국 청년 문제는 한국 사회가 겪고 있는 여러 병폐들의 집합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청년 세대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계급 착취 문제, 학벌, 도시와 지역 간의 인프라 격차 등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종합적으로 노출되어 있다. 이는 청년이 계급과 젠더를 막론한 포괄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아동 문제, 청소년 문제, 노인 문제 또한 세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종합적인 특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노인 문제가 사회적 책임과 윤리, 도덕의 문제라면, 청년 문제(아동과 청소년을 포함한)는 미래에 우리 사회가 어떻게 유지되느냐의 문제다. 따라서 다른 세대적 문제와는 구별되는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다. 

한국 사회 병폐들이 하나의 사슬이라면, 청년 문제는 그중 가장 본질과 맞닿아 있는 고리다. 그래서 우리는 청년 문제를 특수하게 호명할 수 있다. 

정리하면, 청년 문제 해결은 우리 사회의 미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이 되어야 한다.


청년은 생산력과 소비력의 가능성을 품은 세대입니다. 또한 청년 세대는 시간이 지나면 기성세대가 됩니다. 

그렇다면, 지금의 청년이 기성세대가 되었을 때, 그때의 청년은 "청년이었던 기성세대"를 어떻게 바라볼까요?


나를 둘러싸고 있는 조건들이 바뀌면, 저도 반드시 기성세대가 되는 걸까요? 책에서는 "세상을 바꾸자"라고 말하고 있지만, 너무 터무니없게 느껴졌습니다. 구조와 법을 바꾼다고 해도, 결정적으로 병폐의 근본 원인이 되었던 사람들의 마음까지는 바꿀 수 없을 테니까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내가 돈이 많고, 환경이 좋다고 생각된다면, 당연히 그 상태를 유지하고 싶을 테니까요. 


만약 지금, 권위나 권력이 없기 때문에 세상을 바꿔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면, 사회의 가치를 바로 세우며 청년의 가치를 인정해달라고 하는 것이면 그 언행은 다분히 모순적이고 위선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보다 더 병폐가 되겠지요,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자신까지 속여, 힘이나 권위를 얻고자 했을 뿐이니까요. 

 

그렇기에 "미래 가치를 바로 세우는 일"은 하나의 존재 선언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즉, 이 나라의 "청년"이라는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갈 것임을, 나와 남을 권력이나 재산이 아닌, 하나의 역할로 보고 그 일에 최선을 다할 것임을, 이 역할을 자유롭게 비판할 수 있는 나라를 만들고, 그리고 때가 되면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는 아이디어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 역할을 기쁘게 줄 것임을, 그리고 다만 이 선언과 이 선언을 통해 살아감으로써 만족할 것임에 대한 존재 선언이 아닐까요?


*백범일지, 나의 소원, 정치 이념

p430, 백성들의 작은 의견은 이해관계로 결정되거니와, 큰 의견은 그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으로 결정된다. 여기서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이 생긴다. 국민성을 보존하는 것이나 수정하고 향상하는 것이 문화와 교육의 힘이요, 산업의 방향도 문화와 교육으로 결정됨이 큰 까닭이다. 교육이란 결코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기초가 되는 것은 우주와 인생과 정치에 대한 철학이다. 어떠한 철학의 기초 위에, 어떠한 생활의 기술을 가르치는 것이 곧 국민교육이다. 그러므로 좋은 민주주의의 정치는 좋은 교육에서 시작될 것이다. 건전한 철학의 기초 위에 서지 아니한 지식과 기술의 교육은 그 개인과 그를 포함한 국가에 해가 된다. 인류 전체를 보아도 그러하다. 

이 선언이 무엇일까에 대해 생각해보다, 김구 선생님이 쓰신 나의 소원일 일부분이 생각이 났습니다. 결국 이 선언이 김구 선생님이 말하는 국민성과 신앙과 철학이 아닐까요?

그리고 이 모두가 이 선언을 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문화와 교육 아닐까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한 명 한 명 하다 보면 모두가 되지 않을까... 3.1 운동처럼.


*기미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이희승 역

병자수호조약 이후 때때로 굳게 맞은 갖가지 약속을 배반하였다 하여 일본의 신의 없음을 단죄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학자는 강단에서, 정치가는 실제에서, 우리 옛 왕조 대대로 닦아 물려 온 업적을 식민지의 것으로 보고, 문화 민족인 위를 야만족같이 대우하며, 다만 정복자의 쾌감을 탐할 뿐이요, 우리의 오랜 사회 기초와 뛰어난 민족의 성품을 무시한다 해서 일본의 의리 없음을 꾸짖으려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채찍질하고 격려하기에 바쁜 우리는 남을 원망할 겨를이 없다. 현 사태를 수습하여 아물리기에 급한 우리는 묵은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릴 겨를이 없다.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임무는 오직 자기 건설이 있을 뿐이요, 그것은 결코 남을 파괴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엄숙한 양심의 명령으로써 자기의 새 운명을 개척함일 뿐이요, 결코 묵은 원한과 일시적 감정으로써 남을 시새워 쫓고 물리치려는 것이 아니로다.

낡은 사상과 묵은 세력에 얽매여 있는 일본 정치가들의 공명에 희생된, 불합리하고 부자연에 빠진 이 어그러진 상태를 바로잡아 고쳐서, 자연스럽고 합리로운, 올바르고 떳떳한 큰 근본이 되는 길로 돌아오게 하고자 함이로다.

당초에 민족적 요구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던 두 나라 합방이었으므로, 그 결과가 필경 위압으로 유지하려는 일시적 방편과 민족 차별의 불평등과 거짓 꾸민 통계 숫자에 의하여 서로 이해가 다른 두 민족 사이에 영원히 함께 화합할 수 없는 원한의 구덩이를 더욱 깊게 만드는 오늘의 실정을 보라!

날래고 밝은 과단성으로 묵은 잘못을 고치고, 참된 이해와 동정에 그 기초를 둔 우호적인 새로운 판국을 타개하는 것이 피차간에 화를 쫓고 복을 불러들이는 빠른 길인 줄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아닌가.

100년 전에 쓰여진 기미독립선언서의 일부분도 생각이 났습니다. 읽어보면 지금이랑 대상만 바뀌었지 별반 다를 게 없어 보입니다. 하지만 이 선언에서도 밝혔다시피, 옛 일을 응징하고 잘못을 가를 겨를은 없을 것 같습니다. 지금의 이 세태를 만든 기성세대의 권력이라고 하더라... 화낼 때도 있어야겠죠. 하지만 정말로 해야 할 것은, "구별된 세대의 선언"이 아닌, "선언으로서 하나가 된 세대"이지 않을까요?


한 번 써봐야겠어요.


2, WHAT2 : 청년 주거난의 본질, '집 마련'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집'을 상상한다.

p88, 하지만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이상하게도 집이 '권리'보다 '재산'으로 기능하고 있다.


조물주 위에 건물주라는 말처럼, "재산"으로서의 "권력"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뭐든지 만들어낼 수 있는 조물주의 창조력과 돈으로 무엇이든 살 수 있는 건물주의 소비력. 현실에서는 소비력이 더 센 것 같습니다. 누구 말마따나, 요즘 시대의 "신"은 죽었다니까요.


분명히 만드실 때, 땅에 주인은 없었는데, 그리고 사람들이 만들지도 않은 것인데, 왜 이렇게 비쌀까요. 만들었으면 할 말이 없겠지만.


3, WHAT3 : 청년이 가족을 거부하는 이유, 출산율 괴담의 진실

p114, 역사적으로도 출산율이 제대로 통제되거나 예측된 적은 별로 없었다. 애를 많이 낳으면 너무 많아서 문제라고 했고, 저출산 시대에는 애를 많이 낳으라고 성화다. 결국 출산율로 통계 놀음을 하는 것은 현재의 상황에선 별 의미가 없는 'if 놀이'에 불과하다.

돼지의 해에는 유독 다른 해보다 출산율이 높다고 합니다. 또 2002 월드컵 때에도 출산율이 상대적으로 높다고 합니다. 뭐 확실한 것은 아니겠지만 말이에요. 인구수를 통제하려는 정부 입장에서는 당연한 움직임이겠지만, 정책보다는 월드컵과 십이지신이 더 효과적인 것 같습니다. 다시 말하면, 정부에 대한 믿음이 그만큼 없다는 것이겠죠. 내 아이가 안전할 수 없으니.


4, HOW2: 청년의 정치, 정치에 무관심한 촛불세대?

p148, 결국 지금 청년 세대가 가지고 있는 정치에 대한 소극성과 왜곡된 인식의 존재를 인정하더라도, 그 책임은 우리 사회가 모두 분담해야 할 문제다.
...
청년들을 대표할 수 있는 정치조직과 집단성의 회복이다. 이를 위해 최근 많은 청년들이 나서고 있다. 권력을 가진 기성세대의 역할은 이러한 청년들의 움직임을 더 자유롭게 보장하고 지원해주는 것이지, 20대를 '정치 혐오'라고 나무라서는 안 된다.

청년들이 만들어야 될 정치는 아마도 고여버린 물에 새물을 붇고, 물길을 만드는 것일 겁니다. 힘은 넘치지만, 삽을 쥐어 본 적이 없으니, 삽 쥐고 파는 법부터 배워야겠죠. 


가르쳐주지도 않아 놓고, 삽질 왜 못하냐고 혼만 내면, 물은 계속 고여갈 수밖에 없고, 곧 썩은 내가 진동할 것입니다.


이렇게 보니, 나중에 "기성세대가 된 지금의 청년"들의 역할도 분명하게 보입니다. 권력을 물려 받음이 아닌,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바꿀 수 있는 힘을 기르고 그 권리를 얻을 것. 그리고 또 다음 일어나는 다음 청년들의 더 나은 정치에, 그 권리를 물려줄 것.


5, AND : 청년담론, 세상을 바꾸자

p193, 대한민국은 '늙은 나라'다. 건국부터 현재까지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변화에 둔감하고 또 변화를 바라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늙었다. 
p194, 낡은 것을 청산한다는 기치는 생각보다 사회에서 많은 것들을 바꿔낼 수 있다. 이것은 낡은 시대를 살아온 기성세대가 아니라, 청년 세대의 책무다. 세상을 바꾸자. 

생물이 항상성을 가지듯, 국가라는 하나의 관념도, 생물들의 관계로 이루어졌기에 항상성을 갖습니다. 하지만 항상성이 유지된다는 것은 항상 그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항상성이 유지된다는 것은 변화에 재빠르게 반응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유지 능력이 약해진 사람은 질병에 취약합니다. 당뇨병이 여러 합병증을 불러오듯, 이 재빠르게 변화에 반응하지 못하는 국가도 여러 병에 들 것이 뻔합니다.


 생각으로만 변하지 않는다, 변하고 싶지 않다고 우겨봤자 소용이 없을 것 같습니다. 항상 같은 것은, 영원한 것은 이 세상에는 없으니까요. 


저도 제 안의 낡은 저를 버려봐야겠습니다.



읽어보세요


청년이라고 스스로 생각한다면

청년이라고 불렸던 적이 있었다면


그리고 목소리를 내어주세요.



추신 : 이 책을 써주신 청년담론에 감사합니다! 정말 재미있게 읽었고, 다른 책 또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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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몸이 세계라면 - 분투하고 경합하며 전복되는 우리 몸을 둘러싼 지식의 사회사
김승섭 지음 / 동아시아 / 2018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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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들어가면서


처음에 당황을 했습니다. 분명히 새 책을 시켰는데, 누군가가 책을 선물해줬던 것을 판 것 처럼 이렇게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알고보니, 교수님의 사인을 이 앞에 인쇄해 놓은 것이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무난한 "항상 건강하시길"이란 말이, 책을 다 읽었을 때는 다르게 다가왔습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저의 시력도, 저의 시선도 건강하지 않았구나, 책을 덮으면서 스친 이 문구가 저를 찔렀습니다.

부끄러워져 괜히 깨끗한 안경알을 다시 닦았습니다.


저는 이렇게 읽었어요



과학과 인문학이 만나는 곳은 어디일까요?


과학은 조금 더 작은 세계를, 인문학은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구합니다.


그리고 이 두 "학"은 "인간"을 접점으로 이어집니다. 그중 하나의 학문이 생물학이고, 조금 더 "사람"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학문이 "의학"입니다.


김승섭 교수님은 이 책에서 "인간의 몸"에 대한 과학적 지식을 통해, 그 지식을 만든 사람들의 "시선"을 읽어냅니다. 그는 그저 조심스럽지만, 단호하게 읽어냅니다. 그리고 그의 글을 읽는 사람들을 질문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할까?"

"우리는 지금 바르게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많은 시선이 많은 권력이 된 지금, 우리가 가져야할 시선은 무엇일까?"


그리고, 김승섭 교수님은 이 책 전체를 통해 대답하고 호소하고 있습니다. 



노루의 곡식창고

1.

p6, 이후 백산을 떠올릴 때마다 묻곤 했습니다. 어떻게 그 자그마한 언덕이 존엄하게 살고 존업하게 죽고자 하는 사람들의 꿈을 감당해낼 수 있었는지에 대해서요. 고통받는 사람들과 가까이 있었던 그 일상성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언제든 오를 수 있었던 그 낮음 때문이었을까. 제 공부가 어떤 자리에서 세상을 바라봐야 하는지 백산으로부터 배우고 싶었습니다.

교수님의 이 문장 앞에서 너무 부끄러웠습니다. 나는 무엇을 위하여 과학자가 되려 했고, 또 그것을 어떻게 포장하며 뽐내왔던지 기억이났습니다. 


저는 그저 나의 행동과 말과 생각들을, 내 삶의 가치를 인정해 달라고 투정부리고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삶을 스스로 납득할수도, 인정해 줄수도 없었기 때문에 말입니다.




2.

p6,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의 몸은 다양한 관점이 각축하는 전장입니다. 저는 그관점들이 모두 동등한 수준의 합리성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권력에서 소위된 사람들에게 더 많은 눈길을 주고, 권위에 굴하지 않고 비판적 질문을 던지는, 여러 가설과 경쟁하며 검증을 통해 살아남은 관점들이 그렇지 못한 관점들보다 우리에게 더 많은 의미를 준다고 믿습니다.
p50, 아직까지 근거는 없지만 담배회사의 주장대로 전자담배가 기존의 담배에 빟 덜 위험하다고 가정하고, 동시에 흡연자 중 상당수가 기존의 궐련 담배 대신 ' 덜 위험한 전자담배'를 이용해 사망자 숫자를 30%가까이 줄일 수 있다고 가정해보지요. 

그렇다 해도 여전히 400만 명이 넘는 사람이 흡연으로 인해 사망하고, 여전히 담배는 가장 많은 사람을 조기사망에 이르게 하는 원인 중 하나로 남게 됩니다. 그 변화가 사소한 차이라고 주장하는 게 아닙니다. 그게 우리 사회가 목표로 하는 결과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 독서 토론에서 목표를 위해 타협을 하는 얘기가 오고가던 중 "가벼운 혐오감" 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성경에서 "차든지 뜨겁든지 하라"라는 구절을 한 선배님께서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김승섭 교수님의 책이 뜨거웠던 이유가 그거였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수님은 저 믿음을 바탕으로 의사, 교수, 과학자라는 이름으로 뜨겁게 연구할 수 있었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덜 위험한 전자담배" 속에도 "가벼운 혐오감"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니, 전혀 가볍지 않아 보입니다. 가벼운게 아니라 겁나 무거우면서, 가벼운 척하는 듯 보입니다. 아니면 실제로 자기자신까지 속였든지 말이에요.


그리고 또 질문이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어떤 믿음 위에 어떻게 무엇을 할 수 있을까? 뜨겁든지, 차갑든지.



3.

p87, 일제 강점기의 인종주의 과학은 실증적, 정령적 측정이라는 측면에서 과학의 외피를 둘렀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었습니다. 통치해야 하는 '이웃집 원주민' 조선인에 비해 일본인이 인종적으로 우월함을 보여주는 것이었습니다. 식민 지배의 합리화라는 정답을 정해놓고 그에 부합하는 근거를 수집하는 작업이었던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이 연구들을 과학이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입니다.
p85, 백인제는 경성의전을 전 학년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이자 조선인에 대한 차별에 반발해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10개월 옥살이를 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거럼에도 경성의전에서의 혈액형 조사 연구 이후, 일본인은 진화의 중간형이고, 조선인은 그보다 못하다는 말을 남깁니다. 당대 최고의 수재 중 한 명이었던 그조차 '과학적 권위'에 굴복했던 것이지요. 당시 조선에서 '과학'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했는지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면입니다.


이 부분을 읽고는 "기레기"라는 단어가 떠올랐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이 기사들을 기사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와 같이, 논문과 기사가 만들어내는 과학자와 기자의 시선의 중요성을 다시 한 번 새겼습니다. 


또, 백인제의 경우처럼 그 가짜 논문과 기사를 비판적으로 수용하지 못했을 때 발생되는 "허위의 강력함"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조선시대나, 지금이나 이 부분은 별로 달라진 것 같지 않습니다. 논문의 비판적 수용 없이 받아들여 큰 파장을 주었던 "황우석 사건" 그리고 사실확인 없이 기사를 퍼 나르면서 발생한 "204번 버스 사건"은 아직도 "논문"과 "기사"의 탈을 쓴 거짓말에 맹목적인 믿음을 얹음으로써 생기는 힘들의 횡포가 빈번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안타깝지만, 저도 사람들도 별로 관심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진실에는 말이죠. 논문이든 기사든, 그것을 팩트체크 하든 하지 않든 결국에는 두 믿음이 부딪히고 있는 것 아닐까요.


믿음을 믿기 위한 믿음과 믿음을 믿지 않기 위한 믿음이.

 


4.

p124, 그러나 당대 여러 역량의 한계 속에서, 조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엇이 최선인가를 고민하고, 그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생각해내고 현실을 바꾸어나간 과정이 저는 놀랍습니다.

"조선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가장 중요한 최초의 시작, 시선을 던지는 나를 위해서 하는 그 행동들이 진정 나를 위한 것인가 다시 묻게되었습니다.

 

"합리적인 개선 방안을 생각해내고 현실을 바꾸어 나가는 과정'은 담배회사가 더 탁월하지 않나요? 다만 같은 사람들을 보고도, 다른 위치에서 보는 시선으로 인하여 서로 다른 행동을 하게됩니다. 결과적으로, 한 사람은 그들의 삶과 건강을 증진시켰고, 한 사람은 저해하였습니다. 그 두 결과 모두, 진정으로 그들을 위한 것이었을까요? 





5.

p153, 건강은 사랑하고 일하고 도전하기 위한 삶의 기본 조건입니다. 건강이 누구에게나 평등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한 선배님꼐서, 이 문장을 읽으시고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 해주셨습니다. 최근에 위경련으로 2~3일을 정말 아파하며 집에 있었는데, 늦은시각 병원에 갈 것을 고민하셨다고 했습니다. 그 선배님이 가장 첫번째로 한 일은 응급진료 비용을 검색하는 것이였다고 합니다. 18만원 정도의 응급진료 비용을 보고, 그 다음날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으셨다고 했습니다.


이야기를 듣고 씁쓸했지만, 남 일 같지 않았습니다. 만약 나라면 어땠을까 생각을 해보았지만, 저도 별반 해결책은 없었습니다. 돈이 없으면 병원에 가지 못하는 것이 사실이니까요. 책에서 이야기 하듯이,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어쩔수 없는 것이니까요. 


 



6.

p175, 한국사회는 '혼혈인'들에게 자신의 노력과 무관하게 피부색만으로 스스로를 열등한 2등 시민이라고 낙인찍게 만드는 사회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내재화된 인종차별은 교육, 노동, 사랑가지 삶의 전면에서 스스로의 삶을 옥죄는 효과를 가져옵니다. 자신이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라고 스스로 믿게 만드니까요.

비단 혼혈만의 이야기일까요? 금·은·흙·다이야 수저로 분류되는 우리들은 색보다도 더한 "원료"로써 서로와 자신을 차별되게 바라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7.

p241, 그러나 우리가 과학의 목소리를 신뢰하는 것은 결론에 도달하기까지의 합리적 사고 과정 때문이지, 그 결론이 진리를 담보하기 때문이 아닙니다.

과학은 어떤 사실에 다가기 위한, 새로운 시선으로 현상을 관찰하기 위한 하나의 도구일 뿐, 그 자체가 진리가 될 수 없습니다. 진리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이 종교이고, 자연과 현상에 대한 가시적인 결과를 뽑아주는 도구가 과학이니까요. 한 다큐멘터리에서의 이야기처럼, 상어와 사자는 싸울수 없지 않을까요? 만날 수가 없으니.





우리는 어떤 자리에서 세상을 봐야 할까


책을 보다가도 답답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 세상은 원래 불공평하지, 그런데 뭘 어쩌라고, 내가 바꿀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가 태어났을 때 부터도 이랬는 걸. 결국 모두 가해자와 피해자를 동반하는 것 아닌가? 사회의 책임이 있다면 사회를 어떻게 고칠건데?" 속에서는 계속 불평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생각하는 나는 건강한가? 괜찮은가 물으니 괜찮지가 않았습니다. 어차피 내가 그나마 조금 바꿔볼 수 있는 것은 나 하나밖에 없으니까요.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저 질문을 잃지 않는 것 하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그래야 더 이상 부끄럽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으니까요.


추신: 전적으로 읽으셔야 합니다! 진짜 재미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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