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아, 행복해 너무 오래만이야 이런 기분.’

두 용의 걱정과 상관없이 시간이 지날수록 한결이의 얼굴엔 미소가 점점 더 크게 그려졌다. 사실 최근 몇 주 동안 미르와 지내면서 한바탕 소동을 겪어온 탓에 하루라도 마음 편히 지내는 일이 드물었다. 큰 사건이 없는 날에도 혹시 오늘 미르가 사고를 치지 않을까? 닷발 괴물이나 그리들이 또 나타나면 어쩌나 하고 걱정을 하느라 마음에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미르와 여러 까지 모험을 하는 건 재미있긴 했지만 사실 한결이의 원래 성격과는 맞지 않는 부분이 많았다. 그런데 오늘 바양과 결투를 하면서 이렇게 꿀맛 같은 시간을 보낼 수 있다니... 한결이는 이 시간이 아주 영원히 지속되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을 할 정도였다.

한결이가 이렇게 기분 좋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누워 있기를 즐기는 동안 옆에 누워 있는 바양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우돌이라는 용 사냥꾼에게 속아 몇 십년 동안 노예처럼 일만했고 또 백년동안은 아무도 찾지 않는 베다왕의 등위에서 혼자 있었다. 그렇게 긴 세월 끝에 겨우 나온 바깥세상이었다. 그런데 오랜 기다림을 끝내고 하는 첫 결투가 고작 누워서 아무 일도 하지 않기라니... 어수룩해 보이고 겁이 많이 보이는 인간 꼬마에게 결투 방법을 선택하게 만들게 너무 후회 되었지만 이미 결투는 시작되었고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별수 없지. 참자. 참아. 백 년간 상자 속에서 갇혀 있는 것도 참아왔는데 이 정도 쯤이야.’

바양은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닥 감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이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사실 바양은 작은 크기로 줄어들어 상자에 갇혀 있을 때도 상자 속에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를 멈추지 않았다. 상자 안이 갑갑하기도 했지만 원래 가만히 있지 못하는 성격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바양이 아무것도 안하고 꼼짝없이 누워 있어야 하다니... 바양은 은근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기기만 해봐라. 저 꼬마 녀석과 용들까지 다 먹어 치구고 말테다.’

시간은 어느덧 결투를 시작한지 두 시간이 가까이 되었다. 지켜보던 부루와 미르도 세상에서 가장 재미없는 결투의 지루함을 버티지 못하고 크게 하품을 하기 시작 하였다. 그런데 한결이는 처음 때와 별로 달라지지 않고 느긋한 표정이었다. 마치 지금까지 누리지 못한 느긋함을 한 거번에 즐기려는 양 입가의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바양은 달랐다. 바양은 온몸이 슬슬 가렵고 허리가 시큰거리며 아파왔다. 잠이라도 자려고 해도 이상하게 정신이 말똥말똥했다. 게다가 귀는 얼마나 예민해졌는지 지나가는 바람소리, 숨소리 하나도 모두 귀에 거슬렸다.

‘으.. 으.. 도대체 언제까지 계속 되는 거야. 저 인간 아이는 어떻게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계속 있을 수 있지? 가만 혹시 저 녀석 그만 죽어버린 건 아닐까. 그럼 결투에서 내가 이긴 게 되잖아.’

고개를 들어 한결이를 볼 수 없는 까닭에 바양은 궁금해서 죽을 지경이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게다가 한결이에 대한 궁금증이 커지면 커질수록 더욱 더 참는 것이 힘들 지경이 되었다. 입은 바삭바삭 말랐고. 이러다 끝나지 않을 침묵 갇혀 자신이 죽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덜컥 들었다.

 

“에이잇! 도저히 못 참겠다!”

결국 바양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와 동시에 바양과 한결이를 둘러싼 검푸른 연기도

사라져 버렸다.

“우와! 한결이의 승리야!”

미르와 부루가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환호성을 질렀다. 그 소리에 놀라 바양이 황급히 누워있는 한결이를 보았다. 한결이는 세 시간이 다되도록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누워 있었어도 뭐가 그리 즐거운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 이건 무효야. 저 녀석 무슨 속임수를 쓴 게 분명해 이건 절대 인정 못해!”

바양이 버럭 화를 내며 어느새 거대한 족제비로 모습을 바꾸었다. 부루와 미르는 푸륵 푸륵 입김을 내뿜으며 재빨리 한결이 옆으로 모여들었다. 한결이도 그제야 겁이 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번엔 절대로 네 맘대로 하게 그냥 놔두진 않을 거야.”

“어디 덤벼보시지 오랜 만에 용 두 마리를 먹어치우는 것도 나쁘지 않으니까.”

바양이 으르렁거리다 꼬리를 쳐들고 달려들기 시작했다. 미르와 부르도 냉기와 열기를 내뿜으며 바양에게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멈춰! 모두 멈추라고!”

한결이의 고함 소리에 움직임을 멈춘 것은 미르와 부루 분만이 아니었다. 달려들던 바양도 마치 돌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서 꼼짝을 하지 못했다.

“크르르! 내 몸이! 말을 안 들어! 내 몸이!”

바양이 괴로운 듯 날카로운 소리를 내었지만 여전히 몸은 온몸이 밧줄에 묶인 것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저 녀석 왜 저래? 무슨 문제가 있나봐.”

한결이가 놀란 눈으로 바양을 보며 물었다.

“저 녀석. 이제 꼼짝없이 한결군의 명령하는 대로 할 수밖에 없어요. 결투에서 져서 노예가 되었기 때문이에요.”

“정말?”

“그래요, 상자가 없어지지 않는 한 바양은 한결이의 명령에 복종하며 살아야 해요.”

부루가 약간 고소하다는 듯이 말했다.

“자, 저 꼴도 보기 싫은 족제비 녀석 상자에 다시 가두고 우리는 일이나 하자.”

미르가 냉기를 뿜으며 한결이에게 재촉했다.

한결이는 백년간 상자 속에 갇혀 있다가 이제 겨우 나왔는데 다시 상자 속에 들어가야 하는 바양이 조금 불쌍하게 생각되었다. 하지만 상자에서 꺼내준 자신을 잡아먹겠다고 말했던 바양의 행동이 괘심하기도 했다. 어떻게 할까? 한결이는 잠시 고민을 하다가 대나무 상자를 번쩍 들어 바양에게 향하며 이렇게 외쳤다.

“미안하지만 넌 반성 좀 해야겠어. 이 상자 속으로 들어가!”

한결이의 말이 끝나자마자 갑자기 바양이 엄청난 속도로 한결이에게 달려오기 시작했다. 마치 한결이를 잡아먹겠다는 듯 이글이글 노려보는 눈빛으로...

“위험해 한결아!”

“엄마야!”

한결이는 그만 놀라 상자를 땅에 떨어뜨리며 뒤로 벌러덩 넘어졌다. 그 순간 바양은 상자 속으로 손살 같이 빨려들어갔다.

“휴우! 깜짝 놀랐네.”

한결이는 아직도 바양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상자를 겁에 질린 눈으로 바라보며 몸을 일으켰다.

“미르, 이 상자... 미르가 맡아주면 안 돼? 난 무섭단 말이야.”

한결이는 상자를 미르 쪽으로 스윽 밀었다.

“나보고 버릇없는 족제비 놈을 맡으라고? 절대 싫어. 게다가 저 상자는 주인 밖에 못 만져. 다른 사람이 만지면 아까처럼 녀석이 탈출 할 수 있단 말이야.”

“맞아요. 상자의 주인이 바양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지만, 다른 사람이 상자를 만지면 바양은 그 순간 자유의 몸이 되요.”

부루도 어림없다는 투로 고래를 가로저었다.

“어휴 그럼 이 상자를 계속 까지고 다녀야 한단 말이야?”

한결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갑자기 귀찮은 상자를 맡게 된 것도 이상한 괴물들이 나오는 온 대륙에 오게 된 것도 모든 게 귀찮아졌다.

“에이, 귀찮아. 아까처럼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살면 참 좋을 텐데. 어? 그런데 저 구멍 움직이네?”

한결이는 위를 쳐다보다 가온 나무의 우물 구멍이 천천히 오른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나 참, 세 시산이나 누워 있었으면서 또 누어 버린 거야. 일 하자고 일!”

미르의 핀잔에 한결이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만, 미르. 저기 위를 봐 우물 구멍이 움직이고 있단말이야. 저기 봐.”

미르와 부루는 모두 한결이가 가리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구, 구멍이! 마, 맙소사!”

부루가 놀란 표정으로 불기운을 푹푹 뿜어냈다.

“뭐야? 부루 무슨 일이 생긴거야?‘

미르도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부루를 쳐다보았다.

“베 베다왕이 움직이고 있어. 우..우린 끝장이야.”

부루가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한결이는 침을 꼴깍 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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