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석우, 구미호들과 만나다

 

(1)

찬이가 마누크마누크의 부리 속으로 떨어져 마누크마누크와 한창 실랑이를 벌일 무렵, 둥지에 남아 있던 석우는 겁에 질려 몸을 잔 뜩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하늘을 가릴 듯 커다란 닭과 은빛 용이 으르렁거리는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지만 몸을 일으킬 용기가 나지 않았다.

"으.... 이건 꿈이야. 꿈일 거야, 제발 꿈이었으면 좋겠어. 무서워, 엄마 ... 아,배고파..."

석우는 이렇게 겁이 나고 무서울 때, 이상하게도 초코맛 젤리가 떠올랐다. 초코맛 젤리를 실컷 먹으면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온 대륙에 올 때 가지고 있엇던 초코맛 젤리가 가득 든 손 가방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정말 최악이다. 어딘지도 모르는 곳에서 초코맛 젤리도 먹지 못하고 죽어야 하다니... 석우는 울음이 터져나올 것 같았다.

그때였다. 무엇인가가 석우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으응? 뭐, 뭐지?”

석우는 눈을 살짝 떠서 어깨를 살펴보았다. 어디서 날아왔는지 사람모양으로 오린 종이조각이 석우의 어깨에 붙어 있었다. 매우 배가가 고팠던 석우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종이 인형을 떼어서 재빨리 입속에 집어 넣었다. 오물오물 씹어보니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초코맛 젤리는 아니지만 그래도 석우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맙소사 저 녀석이 내 부적을 꿀꺽 삼켰어."

노아가 깜짝 놀라 자신의 꼬리를 치켜들었다. 노아와 미호는 구슬의 예언에 따라 찾아간 곳은 용의 계곡에 있는 마누크마누크의 둥지였다. 보통 구미호들은 용의 계곡에 가지도 않을 뿐 아니라 마누크마누크의 둥지를 찾아가는 짓도 하지 않았다. 새벽을 만드는 마누크마누크와 어두운 밤에 예언의 꿈을 만드는 일을 하는 구미호들은 서로의 역할이 달랐기 때문에 만날 일이 거의 없었을 뿐 아니라, 사이도 별로 좋지 않았다. 몇 백년 전 마누크마누크가 너무 빨리 새벽을 만들어 구미호들이 화가 단단히 난 적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걸 미호도 노아도 알고 있었다. 지난 백년 동안 마누크마누크도 새벽을 토해내지 못했고 구미호들도 예언의 꿈을 만들 수가 없었다. 이게 모두 다 나단이라는 용 사냥꾼 나단 때문이었다.

"저 녀석, 예언의 아이가 정말 맞는 거야?"

노아는 의심스럽다는 듯이 미호를 바라보았다. 미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틀림없어, 구슬이 분명 새벽을 토해내는 새의 둥지에 그들이 찾아온다고 예언 했단 말이야. 노아야, 다시 한 번 부적을 보내 보자."

미호의 확신에 찬 얼굴을 보고 노아는 별수 없다는 듯이 허리춤 있는 부적을 다시 뽑아 바람에 날려 보냈다.

 

"응? 또 나타났네. 이 거!"

석우는 또다시 자신의 어깨에 달라붙은 부적을 떼어 다시 입에 집어넣었다. 달콤한 초코 맛은 아니었지만 지금의 허기를 달래줄 만큼 맛이 있었다.

"음 맛있어."

석우는 미소를 씩 지었다. 이제 두려움도 조금 가신듯 했다.

 

"저 녀석, 내 부적을 또 먹 었어! 저걸, 정말! "

노아가 화가 나서 숨어 있던 바위에서 몸을 일으키는 걸 미호가 간신히 막았다.

"진정해, 자칫 잘못하면 마누크마누크가 저 아일 발견 한단 말이야. 그러면 예언은 모두 물거품이 된다고!"

"하지만 저 녀석이 자꾸 부적을 먹어치우잖아. 부적 하나를 만들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해야 하는지 너도 잘 알 잖아. 어휴 성질나."

노아는 화가 잔뜩 난 표정으로 허리춤에 부적을 전부 뽑아들었다.

“에잇, 두고 보자 이 먹보 녀석!”

노아의 부적 수십 개가 석우를 향해 쏜살 같이 날아갔다.

 

“쩝쩝, 아 맛있다. 이거 좀 더 먹으면 배가 부를 텐데.”

노아가 날린 부적을 먹고도 아직 배가 고픈 석우가 더 먹을 걸 찾으려고 마누크마누크의 둥지에서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때였다. 노아가 석우에게 보낸 부적들이 멀리서 석우에게 날아오는게 보엿다.

“야호! 또 날아온다 !”

그 모습을 보고 석우가 웃는 얼굴로 입을 좍 벌렸다. 하지만 이번엔 부적들이 석우의 두 눈에 달라붙었다.

“윽! 뭐야, 안 보여 안 보여!”

당황한 석우가 손으로 부적을 떼려 했지만 나머지 부적들이 두 손에 달라붙어 손을 쓸 수 없게 만들었다.

“어, 엄마야!”

석우는 겁이 덜컹나 비명을 괙 질렀다. 그때였다. 석우의 얼 굴앞에 떠 있던 부적 하나가 입을 열었다.

“조용해 이 녀석! 그러기에 함부로 내 부적들을 먹어 치우래?”

부적의 입에서 노아의 화가 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누, 누구야! 왜 나,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왜 이러냐고? 이 녀석이 정말! 더 혼나 볼래?”

“사, 살려줘. 나 겁나 죽겠단 말이야. 제발 그만해. 으앙!”

겁을 잔뜩 집어먹은 석우는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뭐야, 이런 녀석이 정말 예언의 아이란 거야? 나 참... 야, 빨리 울음 그쳐 안그러면 진짜 혼날 줄 알아!”

노아의 호된 다그침에 석우는 깜짝 놀라 울음을 삼켰다.

“아, 알았어. 흑흑.”

“좋아 그럼 이제 내 이야기를 잘 들어. 알았지?”

“으, 응...”

겁에 질린 석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석우의 눈 앞을 가리던 부적들이 떨어져 나갔다. 석우가 눈에도 눈 앞에 떠 있는 사람 모양의 부적이 보였다.

“앞을 봐봐. 커다란 두꺼비 모양의 붉은 바위가 보일 거야.”

“그런데 지, 지금 네가 말하는 거야?”

석우가 신기한 표정으로 부적을 바라보며 말했다.

“잔말 말고 빨리 보기나 해!”

노아가 소리를 빽 지르자 석우는 화들작 놀라 둥지 밖으로 목을 길게 뺐다. 과연 두꺼비 모양의 붉은 바위가 눈에 띄었다.

“응, 봤어.”

“좋아 그럼 지금부터 내가 신호를 하면 그 쪽으로 달려가는 거야 알았지?”

“으 응, 그런데 왜 그래야 하는데?”

“나 참, 계속 그 둥지에서 멍청이 남아 있다가 마누크마누크에게 쪼이고 싶어?”

노아의 말에 석우가 고개를 들고 하늘 위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은빛용의 모습은 없어졌지만 마누크마누크는 아직 거대한 날개를 활짝 피고 하늘에 떠 있었다.

“아, 알았어.”

석우는 부적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준비 됐지? 지금이야! 뛰어!”

석우는 부적의 신호에 따라 달음박질을 시작했다. 숨이 차고 팔다리에 힘이 점점 없어졌지만 두꺼비 모양의 바위가 보는 곳 까지 멈추지 않고 계속 달렸다. 드디어 두꺼비 모양 바위 뒤쪽까지 와서야 석우는 달리기를 멈추고 주저앉았다.

“헉헉! 이, 이제 더는 못 뛰어.”

바닥에 큰대자로 들어 누워버린 석우에게 노아와 미호가 다가왔다.

“얘, 괜찮니?”

석우의 두 눈에 걱정스런 표정의 미호의 얼굴이 보였다. 그리고 못마땅하다는 표정의 노아의 얼굴도... 그런데 둘 다 귀가 뾰족한 게 사람의 얼굴이 아니다. 그리고 엉덩이에 달린 여러 개의 여우꼬리...!

“너희들은 설마 구, 구미호?”

석우가 덜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뱉었다.

“맞아, 우린 구미호야!”

노아가 팔짱을 낀채,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구, 구미호... 으... 으 으악!”

석우는 그만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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