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회>  

한결이는 별수 없다는 듯, 한 숨을 크게 쉬었다.

‘휴, 어쩔 수 없지.’

한결이는 담임선생님 생일잔치 때 썼던 검은 도화지를 사물함에서 찾아내서 창문들을 대강 가렸다. 깔끔하진 않지만 안에서 뭘 하는지 보이지 않을 만큼은 가려진 듯 했다.

이제 칠판에다 환송식에 어울리는 글을 쓰고 꾸며야 할 일이 남았다. 하지만, 한결이는 이상하게 무슨 말을 써야 할지 떠오르지 않았다. 한 번도 함께 있는 친구와 헤어지는 것을 경험해 본적이 없는 한결이로서는 가슴 한 쪽에서 무언가가 울렁거리는 거 같아 그냥 머릿속이 하얘질 뿐이었다. 파란 분필을 들고 한 참을 칠판을 바라보다가 한결이는 '미르'라는 두 글자를 쓰고는 또 긴 한 숨을 쉬었다.

 “미르 녀석, 난 이렇게 하루 종일 이상한 기분인데 휘파람이나 불고 놀러나 가버리고 정말 미워.”

 이런 생각이 들자 한결이는 파란 분필로 엉성하게 미르의 모습을 그리기 시작했다. 언제나 무서운 척하는 미르의 눈동자를 우스꽝스럽게 그리자, 한결이는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다.

“바보 미르!”

 한결이는 씩 미소를 짓더니 미르 옆에 자기 얼굴을 그려 넣었다. 그리고 뚱뚱한 석우와 밤톨머리 찬이의 얼굴도 그렸다. 삐뚤빼뚤 그린 그림이지만 석우도 찬이도 한결이도 그리고 우스꽝스럽게 그려진 미르의 얼굴도 모두 환하게 웃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한결이의 마음은 더욱 무거워졌다.

“미르……. 안녕.”

그때였다. 갑자기 한결이의 등 뒤에서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한결이의 눈에는 어른 키보다 훨씬 큰 불기둥이 솟구치는 게 보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교실엔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이, 이게 뭐야.”

 한결이는 당황해서 뒷걸음질 치다가 그만 칠판에 쿵 부딪혔다. 뒷머리가 깨질듯이 아팠지만 점점 번져가는 불 앞에서 그냥 주저앉아 있을 수 없었다. 한결이는 교실 앞문으로 뛰어가 있는 힘껏 문을 열었다. 하지만,  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 순간 한결이는 찬이와 석우가 바깥쪽으로 문을 잠근것이 기억났다.

‘어떻게! 찬이야! 석우야! 빨리 와 ,빨리!’

“콜록, 콜록!”

연기는 교실 전체에 퍼져갔다. 한결이는 별수 없이 운동장 쪽 창문으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간신히 숨을 쉴 수 있었지만 새로운 공기가 들어온 탓인지 불길은 더욱 거세졌다. 게다가 뜨거운 열기 때문에 더 이상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무엇보다 무서움 때문에 온 몸이 덜덜 떨려왔다.

“미르야, 석우야, 찬이야, 제발 누가 날 좀 살려 줘.”

하지만, 한결이 주위에 들리는 것은 무서운 불덩이가 점점 커지며 내는 쉬익! 하는 기분 나쁜 소리뿐이었다. 한결이는 덜덜 떨리는 왼쪽 다리를 간신히 들어 올려 창문에 걸쳤다. 어떻게 해서든지 더운 열기를 피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기 때문이었다. 한결이는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간신히 창문 밖 난간을 왼 발에 디뎠다. 이어서 몸을 앞으로 숙여 오른쪽 다리도 간신히 창틀에 걸칠 수 있었다. 창틀을 잡은 두 손은 아직까지 바들바들 떨렸다.

‘제발, 한 발만 더 닿으면 돼’

 한결이는 있는 힘을 다 해 오른쪽 발을 들어올렸다. 그러나 불길은 이미 교실 천장까지 번졌다.

“펑펑!”

그때였다. 형광들이 열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는 소리에 놀라 한결이는 오른 발을 창문 난간이 아닌 허공을 딛고 말았다.

“어!”

 순간 한결이의 몸은 그대로 아래서 떨어지기 시작했다.

‘4층에서 떨어지면 죽는 걸까?’

하지만, 한결이는 그 다음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만 정신을 잃었기 때문이었다.

“털썩!”

아주 차갑지만 무척 정겨운 느낌이 들었다. 정신을 차린 한결이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으로 그것을 와락 껴안았다. 그것은 바로 넓고 넓은 미르의 푸른 등이었다.

“바보, 왜 이제 나타난 거야 바보! 미르.”

한결이는 미르가 너무나 고마웠지만 눈을 감은 채, 그냥 투정만 부렸다.
미르는 불타고 있는 교실에 냉기를 뿜어 불을 끄면서 아무 말이 없었다.

“그렇게 우리들하고 헤어지는 게 좋았던 거야? 그래서 이렇게 늦게 나타난 거야?”

한결이는 와락 울음이 나오는 것을 참고는 괜히 화를 냈다. 하지만, 미르는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

“말 좀 해봐. 뭐라고 말 좀 해보란 말이야!”

한결이가 미르의 등을 광꽝 쳤다. 그러자 차지 못한 미르가 한결이를 쏘아 보았다.

“바보는 너야! 나도 너처럼 오늘만 지나면 모든 걸 까먹게 되는 줄 알아?”
“미르야…….” 
 

한결이는 미르의 말에 그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넌 내일이면 내 모습을 볼 수도 없을 거잖아. 내가 누구였는지조차 까맣게 잊을 거잖아. 그런데 난 뭐야? 난 뭐냐고! 너는 다 잊어버릴 텐데 나만 기억하고 있어야 하잖아? 바보…….이제 나도 잊으려고 하는데 노력하고 있는데 왜 자꾸 네 모습, 네 목소리를 잊지 못하게 만드는 거야. 왜?”
“미안해, 미안해 미르야.”

한결이는 눈에 눈물이 흘렀다. 차가운 미르에 눈에도 따듯한 무언가가 흐르기 시작했다.

 불타버린 교실은 미르의 여의주로 감쪽같이 원래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석우와 찬이가 교실에 들어왔을 때 두 친구가 발견한 것은 서로 등을 기대고 자고 있는 미르와 한결이의 모습뿐이었다. 물론 칠판에는 한결이가 서툴게 그린 미르와 삼총사들의 그림도 웃고 있었다.

“쳇 결국, 환송회는 실패잖아.”

찬이는 뭐가 좋은 지 웃음을 터뜨리며 앞장서 가는 미르와 한결이의 뒷모습을 보며 툴툴거렸다.

“뭐, 어때 저 녀석들, 둘이 사이 좋아 보이는데.”
“그런데 어쩌다 교실에 불까지 난 걸까?”
“한결이 말로는 갑자기 마룻바닥에서 불이 시작됐나봐.”
“정말? 진짜 이상한 일이네. 요새 일어난 방화 사건하고 관계있는 거 아니냐?”
“에이 설마, 교실에는 한결이 혼자 밖에 없었잖아. 그럼 혹시 방화범이 한결이란 얘기야?”
“어이구,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그런데 너, 초코파이 네가 다 먹었지?”
“그, 그 이야기가 갑자기 왜 나와?”
“어이구! 환송회 안 한다고 그걸 상자 째 먹니?”
“뭐 배고프니까 그렇지. 넌 배고플 때 없냐?”
“왜 또 싸워? 빨리 따라와. 오늘은 준비해야 할 게 많단 말이야.”

한결이가 뒤를 흘끗 보고 핀잔을 주었다.

“저 바보들 놔두고 날아가자. 오랜만에 지붕에서 콰쾅 어때?”
“좋아 이번엔 두 배로 빠르게 날아가는 거야.”

한결이는 냉큼 미르에 등에 올라탔다.

‘내일이면 미르를 까맣게 잊게 될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미르 너하고 있는 이 순간만큼은 절대 잊지 않을 거야.’

한결이는 미르의 넓은 등을 꼭 껴안았다.

“자 간다!”

미르와 한결이는 뒤따라오는 석우와 찬이를 남겨두고 하늘높이 날아올랐다. 저녁 해는 살며시 고개를 숙이며 햇살을 길게 드리우고 있었다.

“같이 가. 한결아!”

허둥지둥 뛰어가는 석우와 찬이의 그림자도 아주 길게 그려졌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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