징비록 - 임진왜란에 관한 뼈아픈 반성의 기록 클래식 아고라 1
류성룡 지음, 장준호 옮김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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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비록은 조선 선조때 서애 유성룡이 저술한 임진왜란에 관한 저술로 시경의 소비구절에 나오는 징전비후 - 지난 날의 잘못을 경계하여 뒤의 근심거리가 없도록 조심한다는 뜻 - 를 인용해 서명을 정했다고 합니다. 현재 징비록은 유성룡이 임진왜란의 처절한 경험을 피로 쓴 반성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지만 당대의 유성룡과 징비록에 대한 평가는 부정적이었다고 합니다. 선조실록에 서술된 바에 의하면 징비록에 대해 '식자들은 유성룡이 자기 공만을 내새우고 남의 공은 덮어버렸다'라고 빈정거렸다고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이 글을 보면서 임진왜란이라고 하는 조선의 근간을 흔드는 국란을 겪은 후에 왜 징비록과 같은 서적이 많이 출간되지 않았는 지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진왜란을 기록한 다른 책들이 어떤 게 있는 지 궁금한 마음에 구글링을 해보니 징비록과 함께 난중일기와 쇄미록이 임진왜란을 기록한 3대 저서로 꼽힌다고 합니다. 유성룡이 주관적 관점에서 임진왜란을 기술했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선조를 가장 가까이에서 모시며 명나라 장군과 협상을 하고 그러면서 재상으로서 백성들의 고초를 직접 바라보는 그의 시선을 따라 임진왜란을 살펴보는 것은 충분히 가치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은 크게 징비록 1, 2권 및 녹후잡기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징비록 1권은 신숙주가 임종시 성종에게 남긴 유지인 "바라건대 일본과 평화로운 관계를 잃지 마십시오."라는 유지에서 시작됩니다. 이후 1591년에 통신사로 일본을 다녀온 김성일과 황윤길의 일본 정세에 대한 의견차와 병화가 있을 거라는 황윤길의 정세 보고에 대해 반론하며 그런 정세가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얘기한 김성일의 의견이 기술되어 있습니다. 국사책으로 이 내용을 배울 때는 당파싸움이 치열했던 조선중기에 서인이었던 황윤길의 의견에 동인이었던 김성일이 반대의견을 제시했다고 배웠던 기억이 납니다. 그런데 징비록을 보니 유성룡이 다시한번 김성일에게 질문을 하자 일본이 군대를 일으키지 않는다고 단언할 수는 없으나 민심이 동요할 것을 우려하여 황윤길의 의견에 반대를 했다고 합니다. 김성일의 의견은 단순한 당파간의 알력다툼이라기 보다는 여러가지를 복합적으로 고려하여 대답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이 당시 동인이 득세했다는 점과 이 보고를 기점으로 전쟁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긍정적인 의견이 우세하여 전란에 대비하지 않았던 것이 패착이었던 것이겠지요. 그리고 그 이듬해 임진왜란이 발발한 후의 전황을 징비록 1 장에서는 담담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전국 각 도에서 병력을 징집하여 한성을 구원하게 했습니다만 안타깝게도 경사도 수륙, 충청도에서 모두 패전하여 선조는 몽진을 하게 되고 명나라에 구원군을 요청하게 됩니다. 임진왜란 이후에 왜군이 빠르게 한성을 함락한 것은 알고는 있었지만 징비록에 기록된 날짜로 보니 4월 13일에 왜군이 쳐들어오고 5월 3일에 일본군이 한양을 침입할 정도로 빨랐다고는 알지 못해 이 책을 읽으며 많이 놀랐습니다. 또한 빠르게 일본군이 조선의 북쪽 끝자락인 함경도에 쳐들어오고 두 왕자까지 일본군에 사로잡혔다는 사실에도 많이 놀랐습니다. 징비록 1권을 읽으며 내내 전국 각지에서 패전하고 장군들이 전사한 기록과 선조의 몽진,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이 기록되어 있어 읽으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많이 들었습니다.

징비록 2권에서 드디어 의병이 전국각지에서 일어나 왜군들을 섬멸했으며 특히 권율의 행주대첩을 통해 명나라 군대가 경성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시간을 벌고 동시에 왜군을 크게 격퇴시키게 됩니다. 그와 동시에 명나라 군대가 진격하여 왜적의 기세를 꺽게 됩니다. 징비록을 읽으면서 안타까웠던 점은 명나라 군대는 왜적을 섬멸하는 것이 아니라 화의를 꾀하며 왜군에게 바다를 건너 돌아갈 것을 재촉만 했다는 것과 전쟁에 지원을 한 것을 빌미로 조선에 지나친 요구를 많이 해왔다는 것입니다. 조선의 힘으로 왜적을 무찌르지 못했다는 점에서 조선은 이미 약자이고 명나라의 눈치를 볼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는 점이 너무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왜군들이 물러간 후 원균은 이순신을 모함하였고 이순신을 천거한 유성룡을 좋지 않게 보는 무리들에 의해 이순신은 심하게 공격을 받아 권율장군아래에서 백의종군하게 됩니다. 처참한 전쟁 후에 자기반성보다는 당파가 나뉘어 논공행상으로 다투는 모습이 그려져 읽으면서 속이 많이 상했습니다. 그후 1597년 정전회담이 결렬됨과 동신에 발발한 정유재란으로 한산도 수군이 무너지고 원균이 철천량전투에서 패전한 뒤에 이순신이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되게 됩니다. 조정에서 이를 두고 논의하는 와중에 권율장군은 원균이 패했다는 말을 듣고 벌써 이순신을 보내 남아있는 군사를 수습하도록 했다는 기록을 보며 권율장군의 사람보는 눈에 감탄했습니다.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은 명나라 군사와 함께 연합하여 노량해전에서 일본수군을 크게 격파했습니다. 적선 200여척을 태웠고 죽인 일본인은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순신 장군은 노량해전에서 전사하게 되었습니다. 징비록에서는 이순신의 전사사실을 전해들은 명나라 장군 진린과 모든 병사들이 통곡하여 그 울음소리가 바다가운데 진동했고 그의 상여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이 상여를 붙잡고 통곡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을 때 저도 순간 울컥하게 되더라구요. 예전에 남도에 여행할 때 통영에서 충무공 이순신장군의 사당을 가본 적이 있는 데 그 때는 그저 이순신장군의 사당이구나 생각하며 무심히 지나갔었는 데 언제고 기회가 되면 꼭 한번 다시 가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국사시간에 임진왜란을 배우며 징비록에 대해 들어보고 임진왜란에 관련된 드라마나 영화, 책을 통해서도 꽤 많이 들어봤지만 실제로 읽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저 서애 유성룡은 왜군으로부터 조선을 지킬 수 있었던 명장 충무공 이순신을 천거했으며 임진왜란이라는 국란을 겪은 후에 조선을 재건하는 데 큰 역할을 한 훌륭한 재상이라는 정도만 알았지 그가 어떤 인물인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징비록을 읽으면서 임진왜란에 대해 좀더 자세히 알게 되었고 그 당시 얼마나 급박한 상황이었는 지도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유성룡이 재상의 자리에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느꼈을 패배감과 막막함도 함께 느끼게 되었고 전쟁을 겪는 백성들의 처참한 모습도 눈에 선하게 느껴졌습니다. 징비록을 읽으며 단순히 국사책에 기술된 한챕터의 역사가 아닌 허무하게 무너져 내리는 조선의 모습과 막막하고 답답한 전쟁의 모습이 그려져 임진왜란에 대해 다시한번 생각하게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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