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심하는 인간 - 확증편향의 시대, 인간에 대한 새롭고 오래된 대답
박규철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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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이 확산되고 스마트폰이 본격적으로 사용되면서 정보들은 더 빨리 더 많이 확대 재생산되는 현재는 어떤 정보가 신호인지 어떤 정보가 소음인 지 판단하기는 너무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럴 때야 말로 철학을 통해 생각하는 힘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책에서 저자는 진리에 대한 추구라는 관점에서 볼 때 회의 또는 의심은 '탐구' 개념과 같은 뜻으로 이해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 즉 '회의하다'는 '탐구하다'와 같은 의미라고 설파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고대 그리스 회의주의 철학자들과 그로부터 영향받은 중세와 르네상스 시기의 철학자들을 탐구함으로써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삶의 지혜와 방법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회의론자는 자신의 철학적 확신 뿐만 아니라 철학적 의심까지도 의심해야 한다.

데이비드 흄

이 책은 총 5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먼저 1부 "고대 회의주의의 의미"에서는 호모 두비탄스(의심하는 인간)에 대한 정의와 그 의미 그리고 고대 회의주의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회의주의는 피론으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는 인간과 삶의 문제에 있어서 '초연함'과 '태연함' 그리고 '마음의 평안'이라는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피론에 대한 여러가지 일화를 소개하며 그의 회의주의가 어디서 비롯되었는 지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2부 "아카데미 학파의 회의주의"에서는 중기 아카데미 학파의 시조인 아르케실라오스의 회의주의와 신 아카데미 학파의 창시자인 카르네아데스의 회의주의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르케실라오스는 회의주의에 있어서 중요한 두가지 개념인 사물에 대한 '인식 불가능성'과 '판단유보'에 대해 핵심원리를 강조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인식 불가능성'은 감각을 통해서든 이성을 통해서든 사물에 대해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는 것이고, '판단유보'는 인식 불가능성의 원리를 모든 사물에 보편적으로 적용한 것입니다.

3부 "피론 학파의 회의주의"에서는 피론학파의 시조인 피론과 그의 제자 티몬, 피론학파의 창시자인 아이네시데모스와 피론 학파의 완성자인 섹스투스 엠피리쿠스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이 3부를 읽으면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고대 회의주의를 집대성한 섹스투스의 관점이었습니다. 섹스투스에 의하면 회의주의자들은 판단유보의 원리에 따라 '단언하지 않음'과 '판단유보'에 집중함으로써 무언가가 본성적으로 좋거나 나쁘다는 분명한 입장을 정하지 않고, 어떤 것에 대한 열렬한 기피나 추종을 피하는 지혜로운 사람들이었다고 합니다. 섹스투스는 회의주의자를 독단적 믿음을 갖지 않고 스스로 느끼는 바를 보고하며 외부 대상에 대해 결코 확언하지 않는 철학자라고 정의했습니다. 물론 외부 대상에 대해 결코 확언하지 않는 것은 철학적 측면에서는 유용할 수 있겠으나, 이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가 이러한 회의주의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만사 모든 일에는 장점과 단점이 공존한다고 생각합니다. 살아가면서 매일매일 무언가를 결정해야 하는 저희들은 현시점에서 장점과 단점을 모두 고려하여 더 나은 방향으로 결정하는 것이 일상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시대에 판단유보가 과연 가능한 것일까? 하는 의문점이 들었습니다.

4부 "아우구스티누스와 몽테뉴의 새로운 회의주의"에서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새로운 형태의 회의주의와 몽테뉴의 새로운 피론주의를 이야기 합니다. 중세 신학자인 아우쿠스티누스가 회의주의를 받아들였다는 것은 저에게는 꽤 재미있는 사실이었습니다. 믿음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 신앙주의가 과연 회의주의와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지도 궁금했습니다. 저자는 독단적인 판단을 유보한 채 진리탐구를 강조했던 아카데미 회의주의자들의 생각이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주의에 더 부합될 수 있다고 얘기하고 있습니다만 저는 아직 그 대답에는 이르지 못한 것 같습니다. 또한 몽테뉴는 사물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하는 모든 시도를 마치 인간이 물을 잡으로는 것처럼 무모한 짓이라고 비판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사물의 본질은 인식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몽테뉴는 회의주의의 탐구영역을 사물의 본성이 아닌 현상으로 제한하게 되었습니다.

5부 "21세기에 소환된 고대 회의주의"에서는 고대 회의주의가 현대인의 삶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 설명하고 있습니다. 고대 회의주의는 지식의 확실성을 지향하던 르네 데카르트를 비롯한 근대 철학자들에 의해 많이 위축되었으나 영국 경험론 철학자인 데이비드 흄과 프리드리히 니체에 의해 재조명되었습니다. 고대 회의주의 철학은 진리에 대한 충분한 탐구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는 존재하거나 사유되는 모든 것에 대한 단정적인 판단을 유보한 채 겸손하게 살아갈 것을 권했습니다. 이는 불안하고 불행한 삶을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에게 새로운 평안과 행복의 가치를 선사할 것이라고 저자는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이 책을 집필하는 내내 '21세기에도 고대 회의주의는 유의미할까?'라는 질문에 매달렸고 '그렇다'라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또한 회의주의가 인간이 가진 지적자만심과 심적조급증을 치유할 수 있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최근 아는 이로부터 제 단점이 너무 고지식한 것이라는 얘기를 듣고 머리를 한대 얻어 맞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곰곰히 생각해보니 아주 어릴 때부터 부모님과 선생님으로부터 룰은 꼭 지켜야 한다고 배웠고 저도 그 룰이 사회를 지탱하는 기본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했기 때문에 그런 소리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의심하는 인간이란 다시 말해 지식을 탐구하는 인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 글귀를 읽으며 저는 선생님이 가르치는 지식을 의심하지 않고 절대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에게 발전의 기회는 없다는 말로 이해되었습니다. 특히나 어릴 때부터 대학입시를 위해 짧은 시간동안 많은 지식을 배우고 외우는 학습을 훈련한 저의 학창시절을 생각해보면 좀 허무하기도 한 얘기입니다. 물론 개발도상국인 대한민국을 살아왔던 저는 그런 교육도 장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반드시 한계가 있고 그 한계점을 부수기 위해서는 기존에 배우고 익혔던 패러다임을 모두 부정해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된 것이 터닝포인트가 되어 인생을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진리라고 믿던 것들도 한번 더 사유하고 탐구하는 태도를 가지고 진지하게 살아가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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