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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어붙은 여자
아니 에르노 지음, 김계영 외 옮김 / 레모 / 2021년 3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니 에르노 <얼어붙은 여자>
가부장적이지 않은 아빠, 딸이 당당한 여성으로 살아가길 바라는 엄마. 이토록 이례적인 부모와 함께 사는 외동딸의 이야기이다.
어린 시절부터 두 아이를 키우게 되는 순간까지, 주인공이 성장하는 과정에서 느낀 생각들과 분절된 기억들을 시간 순으로 정렬하여 담아낸 책.
실제로 아니 에르노는 1940년 노르망디의 이브토에서 태어나 카페 겸 식료품점을 운영하는 부모님 슬하에서 자랐다. 루앙과 보르도에서 고등교육을 받고, 70년대 교사로 생활했다.
따라서 그녀의 삶을 간략하게 추적하기만 해도 그녀의 작품이 ‘자전적’ 소설이라는 점을 파악할 수 있다. (아니 에르노는 본디 자전적 소설을 쓰기로 유명한 작가이다.)
일반적인 통념과 다른 부모 아래서 자란 아이는 나중에 어떤 삶을 살게 될까?, 라는 호기심으로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지식과 좋은 직업이 모든 것으로부터 주인공을 보호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자신의 자녀를 길렀고, 이러한 영향으로 주인공은 성역할에 구애 받지 않고 자라간다.
하지만 사춘기 시절, 같은 또래의 아이들과 부대끼며 자라는 사회화 과정에서 조금씩 어머니의 가르침에서 벗어난 일탈을 꿈꾸기도 한다. 예를 들면, 브리지트와 친해지면서 ‘사랑’에 대한 호기심이 싹트고, ‘여성미’를 통해 ‘선택받아 행복해지기’ 위해 노력을 할 때도 있었다. 당시를 회상하며 주인공은 자신의 소녀시절은 선으로 그린다면 직선이 아닌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고 있었다고 서술한다. (p.102)
소녀시절을 거친 후 대학에 들어가면서 이 사방팔방으로 나아가는 선은 더욱 중구난방으로 변한다. 그래서일까? 어린 시절의 어머니의 바람과는 반대로, 대학을 다니며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 결혼을 한다.
어린 나이에 결혼한 그녀는 신혼 첫 몇 달 간은 결혼이 위험하면서도 즐거운 모험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신혼생활 3달 차가 되자마자 이 위태하면서도 강렬한 즐거움은 종지부를 찍는다.
남편은 결혼 후에도 시앙스포를 다니며 학위를 따고 커리어적인 성공대로를 달린다.
그러나 주인공은? 논문쓰랴, 살림하랴, 임용 시험을 준비하랴 자신의 일에만 몰두할 수 없었다. 더군다나 아이를 낳으면서부터는 가사노동이 곱절로 늘어났고, 육아를 대부분 전담했으며, 그녀가 꿈꿔왔던 ‘직업을 가지는 것’은 정말 꿈이 되어버렸다.
물론 훗날 아이들이 조금씩 성장하고나서는 교사로 부임하게 되지만, ‘남자와 똑같은 일을 하지만 결코 자신의 가정을 눈에서 떼어내지 못하고, 고등학교 정문에 가정을 내려놓았다가 학교를 나갈 때 가정을 다시 들고’ 가는 사람이 된다. (p.237)
무거운 내용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때로는 거칠게, 때로는 몽롱하게, 때로는 지나칠 정도로 세밀하게, 기억을 길어 올’리기 때문에 내용을 빠르게 파악하며 읽어 내려가는 것이 사실상 어려웠다.어려웠다. (p.253, 옮긴이의 말 인용)
이상과 현실의 괴리 사이에서 점점 뚜렷해지는 내적 혼란. 그러한 혼란을 겪는 주인공의 생각과 감정을 유추하기 위해 몇 번씩 나눠서, 또는 반복해서 읽어야 했다.
페이지 한 장 한 장 넘길 때마다 편집자들의 고뇌를 느낄 수 있었다. 유영하는 기억의 단편, 무작위의 생각들을 조합하여 한국어로 번역하는 것이 쉽지만은 않았을텐데, 덕분에 이렇게 좋은 작품을 모국어로 접하게 되어 기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