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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의 주장법
허진희 지음 / 자이언트북스 / 2025년 1월
평점 :
근데 자비초는 말이야,
전에 없이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도록 인도한단다.
비록 그들 스스로 목을 매달았다고 해도
그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그들 자신이 아니었거늘.
물론 아직 쥐뿔 가진 건 없지만
사람이 꿈꿀 수 있는 것만큼
행복한 게 없다는 걸 알았거든.
"나는 위악이 싫다.
악은 바스러지기 쉬운 거야.
악한 체하다가는 약해지기 마련이고.
그런데 그 시인이 왜?"
백오교는 항상 달아나려고 하지요.
자기 정체성으로부터,
한으로 얼룩진 역사와
불운한 시대로부터 달아나려고 해요.
우리 때와는 다르죠.
이런 상황에서도,
다들 운치와 풍류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단다.
되찾은 나라에 낭만이 없다면
그 또한 애석한 일 아니겠니.
"사람들이 사냥당했다.
조선인들이 사냥당했어.
짐승 사냥도 그렇게는 안한다.
죽이고, 죽이고, 또 죽였어.
갈라진 땅을 시신으로 채웠어.
땅이 화가 났다고 우리를 제물로 바쳤어."
사람이 살 만한 세상.
그런 세상이 오기는 오는가.
차돌은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 같은 건 몰랐다.
세상이라는 말은 자신이 품기에
너무 큰 단어 같았다.
허망하다는 말조차 허망한,
허망하기 그지없는 죽음이었다.
내가 무슨 자격으로 죽음을
이야기한단 말인가.
사지가 잘려나간 듯한 상실감과
골수에 사무친 원한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어찌.
따지고 보면 다 내 나라 탓이다.
세계를 대환멸의 구렁텅이로
만들어버린 우리의 조국 탓이다.
나는 악을 쓴다.
악데 물든 세상에서 나 하나쯤
더 물들었다고 뭐 그리 대수랴.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는데
어찌 나만을 탓하랴.
분하다. 억울하다.
나는 다시 입에 거품을 물고 악을 쓴다.
그 누구도 동지들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선사할 수는 없다.
그 어떤 인간도 다른 인간에게
자비로운 죽음을 산사할 수 없듯이 말이다.
하지만 적어도 피할 수 없는
죽음의 순간에는 고통 받지 않길 바랐다.
•••
일제강점기에 경성에 일어난 죽음.
억울한 죽음이 낭자하는 시대에
조선 곳곳에 피어나는
의문의 멍울독이 그들의 영혼은 아닐까,
짐짓 생각해 본다.
처음 책을 받고 궁금했던,
표지 그림 속 손에 들려 있는 것은
이 책에서 구하기 정말 힘들고 희귀한 독초,
자비초인 것 같다!🫢
독초를 연구하는 박사 희비와
그녀의 비서 차돌이 사건을 풀어가는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이다.
끝까지 악을 쓰는 쥰을 보며
"환멸"이라는 단어를 곱씹어봤다.
그리고 제목이 백번 이해가 되었다.
피로 물들지도 않고,
긴장감 넘치는 스릴러는 아니다.
하지만 충분히 시대의 분함과
원통함이 담겨 있다.
마지막 책장을 덮고 나면
책 속의 천붕대에 사는 군산댁과
막동, 용손, 맹단이,
아내와 자식을 잃고 잠들지 못하는 오정이,
먼 만주 땅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오연과 동하가,
부모를 잃고 마음이 곪은 주인공 희비와
그래도 살아가려는 차돌이,
꼭 해사한 시대를 맞이하기를 바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