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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바키 문구점
오가와 이토 지음, 권남희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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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포포,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 마.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오는 거야."

바바라 부인의 이 말이 마음 깊이 박혔다. 이미 알고 있는 개념이지만 바바라 부인의 대사로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실제로 바바라 부인과 대면했던 포포는 이 한마디에서, 그녀와 함께하는 일상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느꼈을까.

주인공 포포는 타계한 할머니의 대필업을 이어받아 고향에서 머물게 된다. 유년시절 할머니의 강압적인 훈육에서 받은 상처가 있는 그녀는 여러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천천히 성장한다. 포포를 향한 할머니의 마음을 알게 되어 이미 세상에는 없는 할머니와 뒤늦게 연결되는 장면은 가족과 거리감이 있는 나에게 많은 위로를 주었다.

엄한 가정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면 꼭 한 번 쯤 읽어보는 것을 추천한다. 특히 절대로 화해할 수 없다고 여길 정도의 상처가 있다면. 이 소설은 그 상처를 먹먹할 정도로 따스한 붓과 펜의 검은색 잉크로 담담히 어루만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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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편지는 슬픔의 눈물에, 기쁜 편지는 기쁨의 눈물에 각각 우표를 적셔서 붙이라고 하던 선대의 가르침이 생각났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냥 수도꼭지에 대롱대롱 맺힌 물방울에 적당히 적셨다."

포포는 선대(할머니)의 틀에 속박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모든 정성을 다하라'라는 할머니의 가르침을 나름대로 해석하여 훌륭히 소화해냈다. 손님의 마음을 효과적으로 옮기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세심함을 발휘하여 마음을 다하는 그녀의 일상에는 언제나 할머니가 함께한다. 그리고 포포 또한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가족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포포에게 대필 편지를 의뢰하는 다양한 손님들의 사연들은 그 어느 것 하나 빠지지 않고 공감할 수 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아름다운 가마쿠라와, 그곳에서 만난 이웃과의 일상도 소소하고 따뜻하다. 그들의 행복을 위하며 종이부터 잉크, 우표 그림까지 신중하게 고르는 포포를 가만히 지켜보다보면 어느새 포포와 함께 행복을 향해 걸어가고 싶다는 기분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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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특이한 구성을 하고 있다. 소설 속에서 포포가 쓰거나 받은 편지들이 뒤에 차곡차곡 모여있다. 모든 편지들의 잉크의 농도나 서체, 그 뒤로 엿보이는 종이의 질은 사연에 따라 각양각색이다. 사연을 읽고 나서 첨부된 편지를 보면, 보낸이의 고뇌와 정성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일본어를 할 수 있으면 이럴 때 참 행복하다. 하지만 일본어를 몰라도 느낄 수 있는 특유의 감성이 있으니 꼭 중간중간 들춰보기를 추천한다.

생각해보면 편지를 썼던 기억이 까마득하다. 소설을 모두 읽고, 어딘가에 편지지가 박혀있지 않을까 집 여기저기를 뒤적였다. 보낼 사람도 보낼 일도 없는데 새삼스러웠지만 나름의 아날로그 감성을 느끼고 싶어 괜히 연필도 깎아 보고, 이전에 받았던 편지도 다시 꺼내보았다. 더 이상 연락하지 않는 친구에게서 왔던 편지부터, 외할머니의 사랑이 가득 담긴 편지까지.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도 글자는 여전히 생생하게 그 마음을 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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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는 변하지 않지만 사람은 점점 바뀌거나 사라진다. 그러니 주변 이들을 더욱 아껴야 한다.
전해야 하는 말은 최대한 빨리 전하는 것이 좋다.
언제나 그 자리에 있을 것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기 시작하면, 언젠가 그것을 후회할지도 모른다. 몇 년 전의 포포처럼 말이다.


"포포, 그렇게 슬픈 얼굴 하지 마. 생명이 있는 것은 언젠가 움직이지 못하는 날이 오는 거야."
- P272

슬픈 편지는 슬픔의 눈물에, 기쁜 편지는 기쁨의 눈물에 각각 우표를 적셔서 붙이라고 하던 선대의 가르침이 생각났다. 하지만 나는 아직 그게 뜻대로 되지 않는다. 그냥 수도꼭지에 대롱대롱 맺힌 물방울에 적당히 적셨다. -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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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나비클럽 소설선
민지형 지음 / 나비클럽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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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휴 그래도 한남은..."

이 한마디와 함께 재결합을 거부하는 그녀를 설득하고 설득해서, 심지어는 '헤어지게 된다면 100만원을 주겠다'는 계약서에 서명까지 하여 주인공은 헤어진 사이에 페미니스트가 되어 나타난 첫사랑을 '남친의 사랑으로 보듬어' '정상적으로' 바꿔놓겠다는 결심을 한다. 그렇게 이 소설은 '페미니스트 여친'과 연인 관계를 맺으며 '그녀'의 생각을 엿보게 되는 주인공의 생각을 가감없이 서술해 간다.

간결하고 잘 읽히는 문체에 페이지가 술술 넘어갔다. 페미니스트가 아닌 남성 주인공의 투명한 무지를 적나라하게 묘사하는 것이 새로웠다.

'나는 아무 잘못 없고, 잘만 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싸움을 걸어서 불편하게 하냐'며 필사적으로 자신을 포장하려는 몇몇 인터넷 글이 주인공의 생각 사이사이에 겹쳐보였다.

주인공은 '한국 사회에서 언제,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지극히 평범하고 착한 남자사람'으로 본인을 묘사한다. 납득했다. 일상을 보내며 스쳐지나간 '이런 남자사람'들은 손으로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주인공은 '그녀'의 일상과 자신의 일상 사이의 거리감에 무력감을 느끼면서도 왜 그녀가 이렇게 바뀌었는지에 대한 이유를 알지 못해 답답해한다. 그리고 그 답답함은 소설이 끝날때까지도 풀리지 않는다.

2016년, 인터넷 속 분노에 휩쓸리듯 페미니즘에 몰두했던 시기가 있다. 지금까지 '누구나 한번 쯤 겪었겠지' 하고 잊어버렸던 사소한 일들을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무차별적으로 공격적인 여성 혐오적인 말들을 인터넷에서 찾아보며 '왜 이 사람들은 같은 인간이면서 여성들을 공감하지 못하지' 하는 끝없는 의문을 가졌었다. 마음 속으로 거리가 생기니 연애와도 자연스레 멀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더욱 연애를 다룬 이 소설에 관심이 간 건지도 모르겠다.

이 소설은 이 의문에 명확한 답을 내어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나는 매우 짧게 이어졌던 30대 남녀의 연애생활을 지켜보며 주인공에게 '일침'을 가하며 자신의 길을 자신의 발로 걸어가는 '그녀'를 응원하였고, 그런 '그녀'를 진심을 다해 사랑했지만 절대로 그녀와 같이 나아갈 수 없는 주인공에게 심심한 위로를 보내게 되었다.

책을 덮으며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생각과 함께 이렇게 중얼거렸다.

"어휴 역시 한남은..."

《나의 미친 페미니스트 여자친구》 민지형 지음, 나비클럽

어쨌거나 마지막까지 그녀는 이상한 여자였다. - P2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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