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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ㅣ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평점 :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 165
누구나 이 책을 알고 있다. 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페미니즘에 관심이 적은 사람이라도 이 책의 제목은 알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난 지극히 평범한 여성의 일생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이 책은 많은 여성들의 공감을 자극하여 인기를 끌었다.
페미니즘 담론이 거세지면서 공격을 위한 공격이 SNS상에서 일상적으로 벌어지던 시기였다. 여성 연예인들이 독서인증글을 올리기라도 하면 온갖 악성 덧글이 달려 여성 연예인들의 입을 막았다. ‘여자 연예인의 불온서적’이라는 호칭까지 붙을 정도로 이 책에 대한 많은 논의가 온라인/오프라인 가리지 않고 오갔다. 하지만 정작 커뮤니티에 산재하는 리뷰나 의견들을 살펴보면 소설을 읽지도 않고 비난하는 ‘비난을 위한 비난’, 혹은 픽션인 소설이 현실 담론에 끼어드는 것이 불편하다는 것을 핑계 삼아 관련 목소리를 ‘믿고 거르는’ 경향도 있었다. 너무 유명하니까 ‘나도 읽었지’ 하고 한마디 거들어야 할 것만 같은데 여러 이유로 읽지는 못하고 동영상 컨텐츠나 리뷰글로 돌아다니는 요약 컨텐츠를 찾아보는 사람들도 많았다.
누구나 이 책을 알고 있지만, 의외로 이 책의 내용을 정확히 아는 사람들은 드문 이상한 책. 인터넷상에 빈번히 인용글이 올라와 책을 읽지 않아도 내용을 알 것만 같은 책. 불편한 내용일까봐, 커뮤니티에서 공격받을까봐, 혹은 너무 큰 정신적 소모가 올까봐 책을 읽기를 미루고 있는 독자들의 심정도 어느 정도 이해는 간다. 명성이 너무 높아지면 오히려 굳이 읽게 되지 않는 책이 있는데, 이 책이 그런 책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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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출산기 전후로 현저히 낮아지는데, 20~29세 여성의 63.8퍼센트가 경제활동에 참가하다가 30~39세에는 58퍼센트로 하락하고 40대부터 다시 66.7퍼센트로 증가한다.” - 146
이 책에는 현실이 그대로 담겨있다. 의사의 시점으로 담담히 기술해가는 김지영씨의 일대기는 질척한 감정묘사도, 극적인 반전도 존재하지 않지만 여성이라면, 여성의 현실을 지켜봐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일상적인 장면들이라 그만큼 파괴적이다. 현실을 직면하는 건 누구나 힘들다. 픽션인 소설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사실적인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이 일은 허황된 이야기는 아니라는 것을 뒷받침하듯 통계수치가 삽입되어있어 마치 르포를 읽는 것 같다.
너무나 평범하게 살아온 김지영씨. 어떤 독자의 입장에서 보면 운이 좋다고도 말할 수 있는 김지영씨. 충분히 행복해질 수 있는 조건을 타고났는데도 그녀가 괴로워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왜 그녀는 괴로워야할까. 김지영씨의 가정환경은 불우하지 않았고 취업도 하였으며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지만 그럼에도 정신병이 생겼다는 것에서 무엇이 그녀를 이렇게 몰아세웠는지에 대해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그녀의 병은 그녀가 심약했기 때문에 발병한 것이 아니다. 그 원인을 우리는 김지영씨 개인에게서 찾으면 안 된다. 이 소설은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 이렇게 좋은 사람이 주변에 있음에도 극복할 수 없는 가부장제의 한계를 그린다. 김지영씨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내뱉는 목소리와 행동에서는 그녀뿐 아닌 다른 여성들의 비명이 섞여있다. 뼛속까지 여성혐오에 물들어버린 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목소리를 죽이고 노력했으나 좌절한 절망의 목소리이다. 김지영씨가 선택한 연애, 결혼, 출산은 그녀의 삶에 짐이 되어서는 안 되었다. ‘여성으로서의 삶’을 선택했으니 그것에 따른 희생을 스스로 치러야 한다는 것은 여성을 사회의 공동체에서 내치는 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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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임은 미혼으로 알아봐야겠다.” - 175
우리는 어떤 태도로 이 소설을 읽어야 할까. 소설의 마지막 문장은 가부장제가 만연한 대한민국 사회에 정녕 희망이 있을지 묻는다. 김지영씨는 우리의 주변에서 있을 것 같은 지극히 평범한 인물이다. 이런 ‘김지영씨’가 나의 아내, 나의 언니, 나의 동생이라고 생각하면 경각심이 높아진다. 하지만 남의 일이라면?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의 일이라면? 아마 우리는 습관적으로 ‘안타깝지만 나에게만 피해가 가지 않으면 돼’ 하는 마음으로 눈을 돌려버릴 것이다. 사람은 습관적으로 나의 시선으로만 세계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이 소설의 결말에는 현실의 씁쓸함이 그대로 담겨있다. 자신의 주변에 있는 여성이 아니면 여성문제를 ‘그들’의 문제로 생각하게 되고 마는 확장되지 못한 사고의 안타까움이라고 해야 할까. 이 소설 한 권을 통해 ‘김지영’이라는 인물에 대해, 그녀의 현실과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사회 구조의 문제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고 자각했어도, 독자의 누군가는 소설을 덮고 나서 출산휴가를 사용하는 동료 때문에 자신의 일이 늘어난 것을 아니꼽게 생각하는 팀원들과 맞장구를 칠지 모른다.
우리 모두가 이 문제의 당사자이다. 그것을 잊으면 안 된다. 소설이 바라보는 결말에는 황폐한 미래뿐이지만, 이 시각을 보기 좋게 배신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을 바꿀 수 있는 독자들이다.
가짜 뉴스가 진짜 뉴스보다 6배나 더 빠르게 퍼지는 세상이다.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아이린이 이렇게나 욕을 먹는건지 모르겠다’는 트윗에 ‘주인공이 메갈임’이라는 덧글이 달린 것을 보았다. 그저 소설일 뿐인데 읽지도 않은 채로 무조건적인 비판을 끼얹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아마 그들도 이 소설에 적힌 일화들이, 이 소설에 공감하는 수많은 현실 속 ‘김지영’의 목소리들이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눈치 챘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회구조는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그것을 인정하기 시작하면 지금까지 당연시하게 누려왔던 것들이 뺏길지도 모른다는 것을. 그들의 발작적인 불편함은 그곳에서 오는 것일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서 변화는 시작된다. 누군가는 고집을 멈추고 남에게 귀를 열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보이는 시야가 달라질 것이다. 그렇기에 더욱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더욱 불편해져야 한다.
《82년생 김지영》 조남주 지음, 민음사
죽을 만큼 아프면서 아이를 낳았고, 내 생활도, 일도, 꿈도, 내 인생, 나 자신을 전부 포기하고 아이를 키웠어. 그랬더니 벌레가 됐어. - P165
한국 여성의 경제활동 참가율은 출산기 전후로 현저히 낮아지는데, 20~29세 여성의 63.8퍼센트가 경제활동에 참가하다가 30~39세에는 58퍼센트로 하락하고 40대부터 다시 66.7퍼센트로 증가한다. - P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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