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기본적으로 범죄를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다루는 것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영화는 좋아하지만 범죄 영화는 좋아하지 않는다. 현실에서 쏟아지는 범죄 뉴스를 보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데 영화에서까지 폭력을 접하고 싶지 않다. 시사점이 있다고 평해지는 영화들은 보지만 피해자에 이름조차 붙지 않거나 범죄를 미화하는 영화는 피한다. 범죄를 오락적으로 소비하는 것이 나는 불편하다.
이런 성향인데도 나는 고민 없이 책을 들었다. 이유는 저자였다. 평소에도 방송에 출연할 때마다 찾아볼 정도로 이수정 박사를 좋아했기 때문에 '믿습니다 이수정 박사님' 이라고 마음속으로 외쳤다. 이다혜 기자가 《아무튼, 스릴러》의 저자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얼마나 조심스럽게 분석이 이루어질지가 짐작되었다. 아무렴 그렇지, 어떤 방향으로 토크를 진행할 것인지가 서문에 명확히 적혀있었다. 피해자와 약자의 입장에서 작품을 분석할 거라는 것.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안심했다.
이 책은 영상 매체에서 등장하는 범죄를 분석하는 동명 팟캐스트를 엮은 것이다. 이수정 프로파일러의 냉철하고 현실적인 분석과 MC 이다혜 영화 저널리스트의 깊은 조예는 새로운 캐미스트리 자아낸다. 두 저자의 대화는 새롭고 흥미로우면서도 묵직한 시사점을 내어준다.
완독하는 데에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다. 팟캐스트를 같이 정주행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다루는 영화들을 될 수 있는 한 모두 보기위해 OTT플랫폼을 휘젓고 다녔다. 완독까지 거진 한 달이 걸렸다. 책 한 권 읽는 것뿐인데 사서 고생한 걸 수도 있지만 심한 스포일러를 줄이기 위해 적정한 선에서 조절한 영화 설명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었다. 힘든 여정이었지만 뿌듯했다. 이 책은 지식도 주고 영화도 보게 하는 엄청난 책이다. 범죄 교양을 얻기 위해 책을 손에 들었다면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어느 순간 영화를 찾아보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니 말이다.
"그런 부적절한 행위를 반복하는 교사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적 판타지를 구축하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제목은 ‘영화 프로파일’이지만 드라마와 다큐멘터리도 다룬다. (넷플릭스 다큐 <팔려 가는 소녀들>은 꼭 보고 싶었는데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제일 놀란 점은 범죄가 소재의 메인이 아닌 영화 또한 다루고 있었다는 거다.
성별과 시대를 초월한 로맨스로 유명한 <번지 점프를 하다>를 미성년 그루밍 성폭행을 중심에 두고 바라보는 것에 무릎을 쳤다. 판타지적인 설정과 스토리를 참신하고 새로운 픽션이라고만 받아들여 미처 발견하지 못한 지점이었다. 미디어는 이렇게나 자연스럽게 범죄를 미화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 남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 결과 피해를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사람들은 보통 '프로파일'이라는 단어를 강력범죄, 연쇄살인마, 사이코패스와 연관짓는다. 하지만 이 책은 강력범죄만을 다루지 않는다. 권력구조, 사이비, 차별문제 등, 더욱 안전한 사회가 되기 위해 조명 받아야 할 소재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있다. 책에 수록되지 않은 팟캐스트 중에는 도박문제나 동물학대, 트라우마를 다루는 화도 있다. 위험은 생각보다 일상 가까운 곳에 존재한다.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효용적인 법안의 필요성을 이수정 박사는 반복해서 주장한다.
이수정 박사는 영화 속에서 나온 범죄를 해결하기 위해 현행법이 어떻게 보완되어야 하는지를 현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설명한다. 의제 강간 연령의 낮음이나 있으나마나한 신고 포상금 제도 등, 부족한 법안들에 분노를 느끼다가도 '현장은 틀림없이 점점 나아지고 있다'는 이수정 박사의 말에 위로와 응원을 받게 된다.
현실은 나아질 것이다. 더욱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만으로도 힘이 된다. 그리고 변화의 시작은 개인의 연대와 지지에 있다. 두꺼운 사회문제를 다루는 책에 위로를 받을 줄은 몰랐다.
전체적으로 어두운 표지이다. 여성 인권, 아동 인권, 성폭력, 가부장제와 관련된 중요한 단어들이 작은 글씨로 적혀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작고 어두운 색이라 가만히 들여다봐야지만 보이는 이 단어들은 사회적 약자에게 지속적인 관심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닐까. 많은 생각이 들어 다시금 들여다보게 되는 표지이다. (+ 보라색은 박이다. 내 사랑 박. 가산점 오백만점)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 영화 프로파일》 이수정 · 이다혜 ·최세희 · 조영주 지음, 민음사
저는 기본적으로 범죄를 지나치게 선정적으로 다루는 것은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입장입니다. - P6
그런 부적절한 행위를 반복하는 교사는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성적 판타지를 구축하는 중인지도 모릅니다. - P297
많은 사람들이, 저 역시도 마찬가지고, 남의 입장을 생각하지 못하고 그 결과 피해를 잘 인지하지 못합니다 - P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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