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의 집의 기록 도스토예프스키 전집 19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덕형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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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의 집에서 돌아와도 죽음은 항상 곁에 있다.

시베리아에서 유형수이자 귀족 출신인 알렉산드르 빼뜨로비치가 감옥에서 10년 동안 지내면서 보고 느꼈던 기록들의 단편을 모은 소설이다.

실제로 도스토예프스키도 시베리아에서 유형생활을 4년 동안 했다고 하는데 그 점을 고려해본다면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감옥에서의 사건들이 사실적이라고 볼 수 있겠다.

평민과 농부들에게 동료로 인정될 수 없었던 신분의 제한선과 인간적으로 공감받을 수 없던 고독함 사이에서 주인공은 고뇌하고 깊은 우울감을 느꼈다.

그렇지만 그를 진심으로 배려하고 사랑하던 이들도 있었다. 그랬기에 10년이라는 긴 세월을 그나마 잘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그의 기록에 따르면 폭력적인 죄수도 있는 반면 심성이 착하고 정직한 죄수도 있다. 자유를 억압당하고 음식과 생활여건이 모두 최소한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제정신을 유지하기란 여간 쉬울 것 같지가 않다. 죄수들은 서로 말다툼을 하고 때리고 싸우기도 하지만 크리스마스나 그리스도의 축전일과 같은 때에는 경건하게 마음가짐을 만들 줄도 알았다.

이 소설을 읽고 느낀 것이라기보다는 궁금해진 점이 있었다.

첫 번째. 도대체 200년 전의 농민들의 삶은 얼마나 고달팠기에 감옥에 들어온 것을 만족스러워했을까?

감옥은 적은 양이지만 음식이 매번 제공되고 일정한 시간의 노역만을 하며 지주들의 횡포를 견디지 않아도 되어서 감옥이 차라리 낫다는 그들의 말이 섬뜩했다. 그 당시의 농민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았을지 짐작도 못하겠다. 주인공의 묘사에 따르면 이들은 무감각한 표정과 무심함으로 지냈다고 하는데 그 당시 노동계급을 향한 부조리에 지치고 분노와 체념의 단계를 거쳐 고통을 무감각하게 바라보는 상태에 이르지 않았나 싶다. 몸과 정신이 모두 타버린 재 같은 상태이지 않을까?

두 번째. 그 시대의 러시아 여성들은 얼마나 비참하게 살았던 것일까?

이 이야기는 주인공이 병원에 입원했을 때 시쉬꼬프라는 청년이 자신이 감옥에 들어오게 된 사건을 다른 유형자에게 설명하던 것을 듣고 기록으로 남긴 것이다. 자신이 살던 마을에 한 여자를 어떤 못되먹은 자가 자신과 잠자리를 했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그 여인은 정식결혼을 하기 전에 정숙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부모와 마을 사람들로부터 지탄과 폭행을 당했다. 부모는 어떻게든 여인을 시집보내기 위해 시쉬꼬프에게 지참금을 주었고 그는 그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다. 여인은 소문과는 다르게 순결한 여자였고 그도 여인을 무분별하게 비난한 것을 사과하지만 그 때뿐이었다. 그는 여인의 소문을 유포한 자와 친구가 되면서 그의 말에 휘둘려 아내를 때리기 시작한다. 아침부터 밤까지 계속 때린 적도 있을 만큼. 그러다 친구가 군대에 가기 전 별안간 사실은 여인을 사랑하고 있었다며 그녀에게 나쁘게 군 자신을 용서해달라고 하자 그녀는 용서하고, 그 자를 사랑한다는 아내의 말을 듣고 아내의 목을 칼로 베어 죽였다.

일단 여인을 가지고 싶은데 여인이 자신의 마음만큼 따라주지 않자 악의적인 소문을 유포한 사람은 혐오스럽다는 표현도 아까울 정도다. 그런 것은 사랑이 아니라 그저 소유욕과 같은 징그러운 욕망일 뿐이다. 타인의 인생을 철저히 파괴하기 위해, 자신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공격하는 비열한 인간이다.

시쉬꼬프는 감옥 안에서는 다른 죄수들에게 멸시를 당하는 사람이었고 겁도 많고 소심했다. 강한 자에게는 꼼짝도 못하면서, 자신의 반려자가 아무 죄가 없음을 알면서도 타인의 말에 휘둘려 아내를 때린 괴물이다. 첫 번째 남자나 두 번째 남자나 모두 죽어 마땅한 인간들이다. 여자를 동등한 인격체로 보지 않고 자신의 불완전함, 그것이 여인이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아서 생긴 열등감이든 인정욕구든 그것은 여성을 상대로 잔인하게 발휘된 공격성에 지나지 않으며 이들 또한 자신들보다 더 잔인한 이들에게 짓밢혀봐야 죗값이 치러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아내를 적당히 때려야한다는 극중 인물들의 말은 그 당시 여성의 인권이 얼마나 낮았을지 짐작케 한다. 그렇지만 현재의 러시아에서 또한 여성인권의 침해는 심각한 수준이다.

나는 지금도 러시아에서 가정폭력이 많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2017년에는 가정폭력 처벌법이 완화됐다고 한다. 이 법에 따르면 병원에 실려가지 않을 정도의 폭력 행위는 벌금형에 그친다고 한다. 남편의 폭력으로 인해 아내가 가벼운 멍이나 뇌진탕이 생겨도 남편이 처벌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21세기에 이런 법이 있다니 믿기지가 않는다. 국가가 약자를 최소한으로도 보호하지 않는다면 힘없는 사람들은 누구에게 구제를 받을 것인가?

세 번째. 과연 인간은 교화될 수 있는 존재인가? 죄수를 감옥에 넣는 것이 교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 있을까?

이것은 작중 주인공도 의문을 가진 부분이었다. 죄수들을 감옥에 몰아넣어도 그들 중 일부는 같은 죄를 저질러 돌아왔다. 그리고 다시 인간적이지 못한 취급을 받으며 마음 속에 악의를 품게 된다. 이후로는 그 일련의 것들이 반복된다.

죄수들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받고 인정받고 싶어한다. 그리고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동경한다. 만약 그러한 욕구가 좌절된다면 그것은 자기비하나 타인을 공격하는 것으로 대체될 수도 있다. 그러한 상태에서 죄수들이 다시 인간성을 회복하고 사회적인 책임을 다하는 인간으로 변할 수 있을까?
나는 이러한 의문에 회의적이다. 적어도 교화의 목적으로 본다면 그러한 억압된 환경에서 인간성이 다시 꽃피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다만 죗값을 치러야한다는 처벌의 목적에서는 감옥이 필요하다. 기록을 읽다보면 죄수들 간의 협동심, 배려, 따뜻함이 느껴지는 부분도 있지만 섬뜩한 죄를 지은 죄수들의 이야기에서 분노를 느끼기도 한다. 위의 두 번째 이야기에서 아내를 살해한 죄목으로 잡혀들어온 시쉬꼬프 같은 경우가 그렇다. 그런 정신상태를 가진 인간이 감옥에 갇혔다고 하여 아내의 죽음에 죄책감을 느낄 것 같지는 않다.

이런 부류는, 뒤틀린 사고회로 속에서 타인에게 인정받고 싶어하는 욕망이 과도한 이들은 처벌로도 교화로도 사회기준에 맞추어 살아가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들은 감옥 안이든 바깥이든 격리가 필요하다. 다만 그들이 죄은 죗값에 마땅한 처벌이 필요할 뿐이고 이것은 심지어 그들에게는 관대한 처사이다. 그들이 앗아간 생명에 비해 그들의 목은 아직 몸에 붙어있지 않은가. 다만 수감생활이 길어질수록 충족되지 못한 욕구로 인해 정신적으로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게 그들을 향한 최대의 죗값일 것이다.

네 번째. 주인공은 왜 감옥에서 나오고 난 후 사람들과의 섞일 수 없었던 것일까?

주인공은 마침내 10년의 형기를 마친 후 출소한다. 마지막 기록에는 출소로 인한 기쁨, 죽음에서 부활했다는 환희, 새로운 생활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이후 자신이 기대했던 삶을 살지 못하고 병으로 죽고만다. 사실 이 부분은 주인공과 친하게 지내고 싶었던 한 귀족남성에 의해 서술되고 있기 때문에 주인공이 원하는 삶을 산 것인지 아닌지 제대로 분간할 수가 없다.

그의 눈에 비친 주인공은 폐쇄적이지만 똑똑하고 내면에 정직함과 따뜻함을 가진 인물이었다. 주인공은 출소 후 시베리아에서 프랑스어를 가르치기 시작하는데 수업을 위해 나오는 날 빼고는 그 누구와도 대화나 교류를 하지 않았으며 그와 친해지고 싶어서 무작정 그의 집에 방문한 서술자의 말에 따르면 서술자를 본 순간 주인공은 낯빛이 창백해지고 굳었다고 한다.

그러다 서술자가 잠시 마을을 떠난 사이 주인공이 방에서 약사도 부르지 않고 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주인공의 통찰력과 따뜻함은 왜 출소 후에는 발현되지 않았을까? 주인공의 기록을 읽다보면 분명 사건 발생 순서 등에 있어 혼란스럽기는 하지만 그가 인간적인 순리를 이해하며 세상을 긍정적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느꼈다. 뛰어난 관찰력으로 죄수들의 행태를 분석했고 그것을 통해서 제도의 불합리함을 기록하기도 했다. 또한 다른 죄수들과 소통하고 그들을 진심으로 아낄 줄도 알았으며 그 누구도 돌보지 않던 개를 돌보기도 했다.

감옥 안에서 고독과 우울함이 그를 삼켜도 꿋꿋이 감내하며 인간다움을 잃지 않았던 그가 왜 감옥 밖에서는 그러지 못한 것일까? 이것의 이유가 설명되지 않은 채 이야기는 끝나버린다.

아마도 현실에 나오자 자신이 지은 죄의 의미를 절실히 느꼈을 수도 있고 갑자기 주어진 자유가 익숙하지 않아 그 자신도 어쩔 수 없는 상태였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자신이 하숙했던 집의 어린 소녀에게 글자를 가르치며 유난히 예뻐했다는 것과 소녀가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는 것은 그가 사랑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는 점을 증명하기도 한다.

그에게는 사랑과 자유를 느끼며 온전히 그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유를 오랫동안 박탈당한 인간이 선택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의 자유뿐이었다.

그를 격려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시간이 그에게 좀 더 주어졌다면 삶과 죽음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궁금해진다. 그가 마지막까지 자신을 죄수로 생각하며 죽지는 않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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