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암 산문의 멋 - 연암 박지원이 감추어둔 보석 같은 생각과 만나다
박수밀 지음 / 현암사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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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의 중심에 서고자 노력한 자

2년 전쯤 연암의 열하일기를 읽은 적이 있다. 해석본이 아닌 원본을 그대로 읽었고, 한자에도 약했던 지라 모든 내용을 완벽히 이해하긴 힘들었다. 그렇지만 완독 후 가장 크게 느꼈던 것은 연암의 상대적인 포용성이었다.

이 책은 각 챕터별로 연암의 글을 소개하며 연암이 개혁적으로 사고하면서도 현실적인 관점에서 국가적인 문제를 비판했던 다양한 예를 보여준다. 나는 연암의 다양한 말 중에서도 이 구절만큼 연암의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눈과 귀를 믿지 말고 명심하라‘.

유교의 합리성과 현실성은 그 당시 조선 사회에서 절대적이었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원칙과 개념은 때로는 상대성을 평가절하하고 다양성을 제한하며 개인성의 출현을 엄격히 금지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고전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 새로운 문체나 글에 대한 배타적인 태도, 재혼한 여성의 자식은 벼슬에 오르지 못한다는 국가이념 등은 고루함을 넘어서서 국가의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이기도 했다.

특히 연암이 활동했던 시기는 명나라가 멸망하고 청나라가 세워졌던 시기인데 조선의 양반들은 청의 문화를 명나라의 것처럼 받아들이지 않고 매우 멸시했다. 그 당시 청나라의 첨단기술과 다양한 문화 등은 인식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들이 보고싶어하는 청나라의 잘못된 관습에만 집중했다. 그 잘못된 관습조차 명나라가 그 동안 지켰던 예의범절을 지키지 않는다는, 지극히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은 생각에서 비롯됐다. 형식과 실재 사이에서 조선의 사대부들은 철저하게 형식만을 따졌다. 그들은 청나라가 잘못됐으며 명나라만이 옳다고 여겼다.

그렇지만 절대적인 옳음과 그름이 과연 존재할 수 있단 말인가? 아리스토텔레스는 하나의 절대적인 진리가 있다고 믿었고 모든 인간은 철학적인 사유를 통해 그것에 도달해야만 한다고 했다. 하지만 인간은 구조적으로 절대 그렇게 할 수 없다.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이성적인 존재가 어떻게 절대성을 받아들일 수 있단 말인가?

인간이 절대적인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오로지 두 가지 경우에서만 가능한다. 먼저 첫 번째는 어떤 개인이나 집단의 독재와 같은 강압적인 구조에서이고, 두 번째는 상대적인 논리를 절대적인 진리라고 합리화했을 때이다. 지금까지 인간의 역사를 만든 필연적인 인과관계의 큰 축을 담당해왔던 진리는 다양성이지 절대성이 아니었다.

그러므로 인간에게 절대적인 선이란 결국 자신의 세계를 구성하는 고유한 개념으로 전환되며 그 과정에서 절대적인 선이 마땅히 가져야 할 본질도 흐려진다. 그것이 어느정도의 절대성을 가질 수 있는가의 여부는 자신이 정립한 개념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동조해주느냐에 달려있으며 완전한 절대성은 인간이 집단최면에 걸리지 않는 한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조선의 사대부들이 명나라를 그토록 따랐던 것은 그 때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지배구조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아서였을 것이다. 조선사회는 소수의 기득권을 위해 다수의 인간들이 희생해야 했던 기형적인 사회구조였으며 그들의 논리에 반대한다는 것은 지배계층에 반항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즉, 절대적인 진리가 통용될 수 있는 두 가지 경우를 모두 만족했다.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강압적인 환경과 상대적 논리인 유교를 합리적인 국가이념으로 정했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인 우위에 설 수 있었다.

이 점에서 연암의 비판의식은 빛을 발한다. 현재 선비들이 맹목적으로 따르는 고전도 한 때 중국에서는 풍속적인 유행서였다는 점을 들며 사대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문체로 글쓰기를 좋아하는 제자가 그에 대한 비판을 받아 갈피를 잡지 못할 때는 잘하고 있다며 격려하기도 한다.

또한 연암은 중용을 중시하지만 조선의 양반들은 유교이념이 절대적이었던 조선 사회에서 바꿀 수 없었던 지배계급의 논리를 이용하여 피지배계층을 착취하는 형태로써 중용을 받아들였다. 연암이 말하는 진정한 중용을 이루기 위해서는 상대적인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돼야 한다. 개혁적인 사고를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고 누군가의 논리를 받아들일 때 다양성의 관점에서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한다.

만약 조선에서 다양성이 인정될 수 있었다면, 눈과 귀로 알 수 있는 그들만의 합리적인 관점을 다시 재정립할 수 있었다면 조선이 눈부시게 발전할 수 있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고 계속 보는 것만 보고 듣는 것만 듣는다면 다양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인간의 지성은 퇴색되고 사회는 경직된다. 마음으로 받아들이라는 것은 진정한 열린 마음으로 상대의 논리를 받아들일 수 있는 힘을 기르라는 말로 들린다. 연암의 이런 상대적 포용성은 현 시대에서도 참 이루기 어려운 일인데, 이것의 중요성을 일찌감치 예견한 연암이 더욱 위대해보인다.

개인적으로 가장 공감갔던 부분은 연암이 자신의 마음상태에 따라 계곡의 물소리가 달리 들린다고 했던 부분이었다. 요즘 내가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이기도 하고 그래서 명심(마음을 고요히 하는 것)에 더욱 신경쓰고 있기도 하다. 내 마음이 슬프면 노을도 슬퍼보이는데 내 마음이 평안하면 노을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온다. 모든 것이 마음에서 시작해 마음으로 끝난다는 것을 새삼 실감하고 있다.

그렇지만 마음의 파도가 계속 출렁이기 때문에 파도를 잠재우는 것이 쉽지 않다. 돌이켜보면 지금까지 내 인생의 최우선 과제는 내 마음이 평정심에 이르는 것이었다. 요즘에는 어느정도 과제를 이뤘다는 편안함이 있지만 그래도 불쑥 치고 들어오는 파도의 물결을 보고 있자면 심란할 때도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마음의 평정심을 찾으려고 애썼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연암처럼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남의 날선 반응을 마음에 두지 말고 죽음을 앞에 두었을 때처럼 나에게 중요한 것들을 마음에 담다보면 어느새 마음에 여유가 생기고 나와 다른 생각들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타인의 말과 행동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은 그만큼 내 마음이 여유가 없다는 증거인데 이 때만큼 평정심을 유지하는게 어려운 때가 없다. 내 눈과 귀를 어지럽히는 다양한 것들에 넘어가지 않고 내 중심을 잃지 않아야 하는데 이것은 아마 죽을 때까지 수련해야 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연암은 참 멋있는 인물이다. 내가 느끼기에 세상의 범주에서 벗어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다양한 생각을 할 수 있고, 또 명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명심에도 두 가지 방법이 있다고 생각한다. 스스로를 외부와 철저히 고립시키고 나만의 동굴로 들어가서 마음을 고요히 하는 방법과, 타인과 소통하며 자신의 가치관을 정하고 마음을 잔잔히 하는 법. 두 방법을 적절히 쓰다 보면 어느새 명심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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